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75)
로판 속 공무원 375화(376/451)
제도로 가는 병사들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죽을지도 모르는 전장으로 가는 것이 아닌, 만인의 환호를 받을 장소로 돌아가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겠지.
물론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해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해도 전쟁은 전쟁. 동료와의 원치 않은 이별로 어두운 안색을 한 병사들이나 영원한 안식에 빠져 수레에 실린 병사들이 있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모두가 행복한 전쟁은 있을 수 없으니까.
그 지울 수 없는 그림자를 알기에 지휘관들은 최대한 병사들의 편의를 봐주었다. 행군도 여유를 가지며 했고, 목을 적실 수준의 술도 풀었다.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는 없으니 산 자를 편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기는 하다.
‘조용해서 다행이다.’
그리고 본토인과 북방인이 섞인 행렬에서 소란이 터지지 않는 것도 지휘관들의 처절한 노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제국과 공존할 수 없다며 생명을 불태운 유목민이 있는 것처럼, 유목민을 언짢아하는 제국인도 적지 않다. 구체적으로는 유목민의 약탈에 시달린 경험이 있는 북부 출신이나, 북쪽 국경 수호가 의무인 북부 방면군 소속 병사들.
유목민이 일종의 발작 버튼인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잔잔한 것을 보면 속에 품었던 분노를 전쟁에서 전부 쏟아낸 것 같다. 아니면 투항을 한 유목민과 시비가 붙으면 곤란하다는 이성의 힘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상관없기는 하지.’
사실 무슨 이유든 서로 싸우지만 않으면 충분하다.조금 무책임한 말 같지만 과정보다 중요한 것이 결과 아니겠나.
“제국에 발을 들인 것은 처음이나, 일개 지방의 번영이 이 정도이니황제 폐하의 통치가 얼마나 훌륭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지금처럼 본토 귀족과 북방 귀족이 대화를 나누어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고 있다.
“이제 북방에도 폐하의 통치가 닿을 터이니, 언젠가는 이 번영이 북방을 덮을 것입니다.”
“상상만 해도 두근거리는 일이군요.”
기대된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 바란디가 후작의 모습에 마주 미소를 지었다. 북방이 워낙 넓고 황량하다 보니 바란디가 후작 생전에 번영이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후손은 제국 고위 귀족으로서 번영을 누릴 것이다. 후손을 위한 장기 투자라고 생각하자.
“구르트 후작가는 북방의 유일한 후작가이니, 북방의 발전을 위해 많은 의무를 지실 겁니다.”
“큰 은혜를 받았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폐하와 제국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평범한 덕담을 주고받으며 바란디가 후작의 안색을 살폈다. 이미 북방에서도 여러 번 주고받은 인사치레를 다시 꺼낸 이유는 따로 있으니까.
‘슬슬 신물 얘기를 꺼내야 하는데.’
전쟁이 끝나면 제사장인 바란디가 후작에게 신물을 넘기기로 구두 약속을 했었다. 제사장이 신물을 가지면 신앙심이 늘어날 테고, 그렇다면 영원한 푸른 하늘의 힘도 늘어나 세계수 부활이 앞당겨질 거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제사장(신앙심 없음)은 신물을 봐도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신물이 신물인 것도 모르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물을 넘겨봤자 세계수 부활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냥 세계수에 신물을 바치고 말지.
– 맞아. 그게 더 좋을 거야. 장담할게.
결정적으로 머릿속에서 맹렬하게 양도 반대 시위를 하는 영원한 푸른 하늘 때문에 도저히 넘길 수 없었다.
그런데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무리 구두라지만 사절이 약속을 번복하는 건 너무 추한데. 게다가 제사장한테 ‘너네 신물 내가 가져도 됨?’ 이라고 하는 것도 많이 난감하고.
물론 약속을 물린다고 바란디가 후작이 제국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리는 없지만, 괜히 이런 문제 때문에 감정이 상하면 곤란하다. 비호감 이미지가 누적되면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
‘그냥 줘버릴─’
– 안돼! 제발 그러지 마!
절박함과 눈물 가득한 외침에 슬쩍 뒷목을 주물렀다.만약 이 외침을 무시하고 넘기는 날에는 내가 잘 때도 울며 난동을 칠 거다. 확신한다.
‘어쩔 수 없지.’
고민 끝에 일단 상황을 유보하기로 했다. 바란디가 후작에게 넘길 수 없고, 내가 완전히 소유할 수도 없다면 대여 형태로 가자. 당장은 그거 말고 답이 없다.
“헌데 후작 각하. 신물에 대해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신물이요?”
그 말을 들은 바란디가 후작은 몇 번 눈을 깜빡이다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이 인간 설마 신물 자체를 잊은 건가?
– 개새끼…
유감스럽게도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닌지, 영원한 푸른 하늘의 원망이 머릿속에 울렸다.
“그러고 보니 저도 신물과 관련해서 백작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 예. 먼저 말씀하십시오.”
공교로운 우연에 발언권을 양보하자 바란디가 후작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저는 신물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신물이 백작의 손에 있는 것은 신의 뜻일 터. 일개 제사장이 신의 뜻을 어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신물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소유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욕심 없고 자비로운 제사장의 발언인지라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게 진짜 신물인 걸 모르니 가벼운 마음으로 포기하는 건가?
‘…망할.’
가능성 있는 일이다. 진짜 신물이라면 제사장으로서 쉽게 양보할 수 없겠지만, 그냥 평범한 검이라고 여긴다면 아무 관심도 없겠지. 오히려 내 물건을 뺏는 느낌이 들어서 사양하고 싶을 거다.
무슨 말로 약속을 무를지 고민한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제도에 도착했다. 북방을 정복할 것을 다짐하며 나아갔던 원정군은 당당히 승리를 쟁취한 채 제도로 돌아왔다.
위풍당당히 제도의 성문을 통과하자 광장으로 향하는 대로에 꽃비가 내렸다. 대로 양변에 선 시민들이,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며 환호하는 시민들이 꽃을 뿌리며 반겨줬다.
“황제 폐하 만세! 제국 만세!”
“제국에 영광 있으라!”
“대제시여, 제국을 보우하소서!”
그리고 황제와 제국의 영광을 찬양하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위대한 치적을 이룩한 황제를 향해, 다시 승리의 역사를 쟁취한 제국을 향해, 이 모든 것을 보우하고 있을 대제를 향해.
드높은 찬양이 들릴 때마다 원정군의 표정에는 자부심에 새겨졌다. 황제의 명을 받아 치적과 승리를 만들어낸 것은 원정군이었기에. 지금의 황제를 위대한 황제로 만든 것에 공헌하였기에.
목이 찢어져라 만세를 외치던 시민들은 누가 봐도 유목민인 행렬을 보자마자 더욱 크게 만세를 내질렀다. 황실이 투입한 바람잡이의 영향도 있겠지만, 저 행렬이야말로 제국의 천명이 굳건하다는 증거니 당연한 일이다.
‘오.’
어느새 하늘에는 황실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마법사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맹활약을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성대한 환영을 만끽하며 광장으로 향하자 부복한 시민들과 황실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서있는 황제가 보였다. 심지어 황제 뒤에는 황태자와 황태자비까지 있는 것을 보니 아카데미에 있을 아인테르를 제외하면 모든 황실 인사가 모였다.
그건 그렇고 의외다. 황제가 먼저 나와서 신하를 맞이한다고?
‘진짜 성대하기는 하네.’
보통 개선식은 광장을 거쳐 황궁 앞에 도달한 책임자가 황제에게 승전 보고를 하는 것이 관례다. 이는 제국만이 아닌 대륙 전체의 관례인데, 그걸 무시할 정도로 황제의 만족도가 매우 높은 모양.
하긴, 길고 긴 정주민과 유목민의 대립에 끝난 전쟁인데 관례 하나 정도는 어겨도 무방하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쨌거나 그 성대한 맞이에 선두에 선 전승공은 황급히 말에서 내려 부복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윽고 원정군도 빠르게 부복했다. 황제가 친히 행차하여 공을 치하하는 자리에서 건방지게 고개를 드는 건 역적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일어나도 좋다.”
황제의 만족도가 높은 상황에서 스스로 역적을 자초할 머저리는 없다.
황제는 원정군 총사령관인 전승공의 훌륭한 지휘, 휘하 귀족들과 장병들의 용맹, 스스로 제국의 품에 안긴 충성스러운 족장들을 치하했다.
물론 말뿐인 치하는 아니었다. 이 원정에 참여한 모든 이들, 안타깝게 목숨을 잃거나 군에서 물러나야 하는 이들에게 확실한 포상을 줄 것을 언급하였다. 영광스러운 개선식에서 언급한 포상이 가벼울 리는 없으니 원정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전쟁도 끝난 상황에서 사기가 오르면 무슨 의미인가 싶지만, 포상도 없이 입을 닦아 제국판 보너스 아미가 터지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늘을 섬긴다 자부하였지만 정작 하늘의 뜻을 모르고 방황한 우둔한 자들이 마침내 하늘의 뜻을 보았나이다. 이에 변방의 미천한 양치기들이 하늘의 뜻을 받드는 존귀하신 분께 칸의 작위를 바치니, 부디 이 양치기들을 가엽게 여겨 받아주소서!”
뒤이어 이어진 작위 내정자들의 칸 추대식은 구경하는 시민들의 경외와 감탄을 이끌어냈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짜고 치는 판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시민들이 보면 유목민이 황제의 위엄에 굴복한 것처럼 보일 터. 착각이겠지만 황제의 무표정에서 짙은 미소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짐은 유목민이 예의와 도리를 모르는 야만인이라 생각하였으나, 경들을 보고 나서야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리도 현명하며 의기 넘치는 자들이 있는데 어찌 유목민을 야만스럽다 여기겠는가. 그저 일부 포악하며 우둔한 자들이 유목민을 대표하는 것처럼 날뛰었으니 실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황송하옵나이다, 폐하.”
“경들의 뜻에 따라 짐은 크펠로펜의 황제이자 북방의 칸으로서 경들과 그 동포들을 보듬을 터이니, 이는 짐이 제국과 신민을 사랑함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선언과 함께 황제는 작위 내정자들을 친히 작위 귀족으로 임명하였다. 내가 보낸 최종안과 다른 점 없이 진행되었기에 내정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다행이다. 혹시 황제가 ‘뭐 이리 많냐.’ 라며 조정했다면 난감했을 텐데.
“…제국과 북방의 다툼은 길고도 길었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제국의 뜻에 저항하는 역도가 대군을 일으킨 적이 있었으니, 오늘날 북방에 올바른 질서가 선 것이 기쁠 따름이다.”
작위 수여까지 마친 황제는 슬슬 개선식을 끝내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 질서는 하루아침에 바로 선 것이 아니다. 그 이전까지 이어진 무수한 희생과 헌신이 작금의 평화를 이룩한 것이다.”
그 말에 들뜬 분위기가 역력하던 광장은 조금씩 고요해졌다. 황제가 연설 마지막에 과거의 헌신을 언급하는 건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니까. 이번에도 과거의 희생을 잊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말로 끝낼 것─
“애석하게도 짐은 그 희생과 헌신을 딛고 선 자로서, 쓰러져간 영웅들에게 마땅한 보답을 주지 못하였다.”
인데…?
갑작스러운 드리프트에 고요해지던 광장의 분위기가 다시 부산스러워졌다.
마땅한 보답을 주지 못했다? 확실한 신상필벌과 능력에 따른 신분 상승을 기치로 내세운 크펠로펜의 황제가 말하기에는 다소 위험한 발언이다.
“그에 짐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였지만 북방이 제국의 품에 안긴 것은 그 영웅들의 공로가 매우 컸다. 더 이상 부끄러움에 젖어 현실을 외면할 수 없으니, 짐은 지금이라도 마땅한 보답을 그들에게 주리라.”
그렇게 선포한 황제가 옆으로 손을 뻗자 뒤에 있던 황태자가 조심스레 두루마리 하나를 건넸다.
“과거 역천자가 있었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며 교만하고 우둔한 역도들을 모아 제국에 대항한 거악이 있었다.”
두루마리를 펼친 황제는 언제나처럼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허나 천명이 아직 제국에 있음에, 거악은 쓰러지고 순리는 바로 섰다. 그 거악을 꺾은 영웅들이 있으니, 짐은 그들을 리브노만의 영웅으로 여기리라.”
하지만 내 표정은 덤덤하지 못했다.
“전 감찰부 4과 1팀장, 제라드에게 바트나의 성을 내리며 백작으로 임명한다. 전 감찰부 4과 2팀장, 올리버에게 크로비엔의 성을 내리며 백작으로 임명한다. 전 감찰부 4과 3팀장, 드레이크에게 쉴러의 성을 내리며 백작으로 임명한다. 전 감찰부 4과 5팀장, 발터에게 프레나즈의 성을 내리며 백작으로 임명한다. 전 감찰부 4과 6팀장, 이드리드에게 레덴의 성을 내리며 백작으로 임명한다.”
지금 황제가 하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전 감찰부 4과 7팀장, 헤카테에게 라리드의 성을 내리며 백작으로 임명한다. 이 여섯의 작위는 단승 작위이나, 그 이름은 리브노만 백작이라 칭할 것이다.”
리브노만 백작. 황실의 이름을 딴 작위로, 사실상 제국이 개인에게 하사할 수 있는 최고의 명예나 다름없는 작위.
그대들은 황실을 지탱하였으니, 영원히 황실이 보듬을 귀족이라는 의미.
“무엇도 바라지 않고 제국을 위해 희생한 영웅들에게 이제야 마땅한 보답을 주니, 우둔한 짐을 대신하여 그대들이 제국의 영웅들을 영원히 기억하라.”
순식간에 폭탄을 터뜨린 황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돌렸다. 황태자와 황태자비, 황실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황궁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황제 폐하 만세!”
그러다 선두에서 만세 소리가 터졌다.
전승공이다.
“황제 폐하 만세! 리브노만 만세!”
만세 소리가 점차 번져나갔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리브노만 만세! 여섯 영웅 만세!”
“영웅들이여, 제국을 보호하소서!”
빠르게, 빠르게 퍼져나갔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괜히 눈이 뜨거워진다.
“황제 폐하 만세! 리브노만 만세!”
하지만 입은 어느새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