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78)
로판 속 공무원 378화(379/451)
아침이 밝았다. 어제 있었던 실언 때문에 잠자리가 약간 어색하기는 했으나 오해가 현실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패닉에 빠졌던 페넬리아도 금방 이성을 되찾았으니까.
대신 저택을 돌아다니다가 만나는 사용인들이나 묵광대가 흐뭇한 시선으로 인사하더라. 아무리 봐도 오해인 거 알면서 일부러 저러는 것 같다. 주인을 놀릴 기회가 생기자마자 저런 모습이라니, 통탄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페넬리아는 내 옆에 있다는 죄로 그 시선을 정면에서 받아야 했다.
“제, 제가 대원들에게 잘 말해두겠습니다.”
“됐어, 괜찮아.”
더듬거리면서도 당찬 포부를 밝히는 것이 기특하기는 하지만 이건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오직 시간만이 정답인 문제겠지.
게다가 페넬리아 혼자 묵광대를 꾸짖으면 오히려 반격을 당할 미래가 뻔히 보인다. 페넬리아가 대장으로서 애들을 잘 이끌기는 하나, 솔직히 언변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니 그냥 넘기자.”
그렇기에 페넬리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작게 속삭였다. 부인 사이의 순서가 중요하니 당장은 무리일지라도, 언젠가는 오해가 현실이 될 것이라고.
“그래도 미안해. 괜히 기대하게 만들고.”
“아닙니다!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농담 섞인 사과를 덧붙이자 페넬리아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마치 내 사과를 받은 것이 황송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흐음.
“그래? 페넬리아는 그런 일에 딱히 관심이 없구나.”
“그, 으, 그건…”
기습적인 가불기에 허리를 감싼 손을 타고 진동이 느껴졌다.
당사자에게는 미안한 생각이지만 페넬리아의 반응이 너무 좋다. 조금만 툭 건드려도 엄청난 리액션이 돌아오니 말하는 보람도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이 이상 놀리면 페넬리아가 울며 도망칠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건 곤란하지.
“농담이야.”
그 말과 함께 이마에 입을 맞추자 거짓말처럼 진동이 끊겼다.유감스럽게도 페넬리아와 일상적인 스킨십을 즐기려면 갈 길이 먼 것 같다.
…사실 페넬리아만 갈 길이 먼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렇다.
아카데미에 복귀하기 전, 제도에서 보내는 마지막 일정으로 감찰부 방문을 택했다. 북방에서 무사 귀환했으니 차장과 과장들에게 인사라도 해야 하니까. 어제는 황제의 호출을 받고 달려가느라 미처 들르지 못했다.
그리고 감찰부에 도착하자마자 유일하게 출근해있던 차장이 두꺼운 책 한 권을 건넸다.
“6검분들이 리브노만 백작위를 받으셔서 명단을 갱신했습니다.”
‘아.’
차장이 건넨 책─ 감찰부 관료 명단을 빠르게 살피자 귀족 카테고리에 그 녀석들의 이름이 보였다.
감찰부 성립부터 지금까지 감찰부에 몸을 담았던 공무원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 나와 그 녀석들은 신분이 달라 서로 다른 페이지에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이번에 일곱 명 전원이 같은 페이지에 적히게 되었다. 이제 그 녀석들은 평민이 아닌 귀족이니 가능한 일.
이건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 녀석들이 작위를 받았다는 것에만 신경 쓰느라 정작 감찰부는 살피지 못했다.
“…고맙다. 내가 했어야 하는 일인데.”
“명단 갱신은 부장님께서 최종적으로 승인하셔야 적용됩니다.”
자신의 공을 나에게 넘기는 말인지라 슬쩍 입꼬리가 올라갔다. 부장을 대리하고 있는 차장에게 고작 명단 승인의 권한이 없겠나. 분명 내가 오는 걸 기다리며 고의로 승인하지 않은 것이다.
역시 차장이 감찰부의 기둥이다. 차장이 없었다면 난 진작에 고혈압으로 죽었거나 크게 사고를 쳐서 장기 구금 중이었을 거다.
“그래, 내가 해야지.”
차장에게 손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 서류 한 장을 건넸다.
제목을 보자마자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난 1차와 2차를 승인한 기억이 없는데 3차는 내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내 승인이 필요한지도 의문이다. 이미 저 두꺼운 책이 정상적으로 수정되어 있는 상황 아닌가. 일은 다 끝난 상황에서 의미 없는 서명만 남은 것이다.
결국 참다 못해 픽 웃음을 흘리자 차장도 민망한 듯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부하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차장과 페넬리아, 5과장을 보면 분명 좋은 건데, 에르제베트와 2, 3과장을 보면 차마 좋다고 말할 수가 없다.
정말 기가 막힌 균형이다. 이런 균형 따위 필요 없는데.
“아, 장관 각하는?”
“장관실에 계십니다.”
서명한 서류를 돌려주며 묻자 원하던 대답이 돌아왔다.장관과 투닥이는 시간이면 그 사이에 과장들도 전부 오겠지.
만약 그때까지도 오지 않는 놈이 있으면 상사가 직접 자택에 찾아가는 출근 서비스를 보게 될 거다.
***
업무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각하. 접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서류를 향하던 시선을 문 쪽으로 돌렸다. 저 건방진 놈. 기껏 전쟁까지 끝나고 돌아왔으면 그날 인사를 하러 올 것이지 이제야 오다니.
하지만 어제가 아닌 오늘 찾아온 것이 다행 같기도 하다. 어제 봤다면 징징거리고 있는 모습이나 봤을 테니까.
“들어와.”
“옙.”
이윽고 문이 열리자 우중충했던 평소 안색과 달리 밝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 새끼,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이제 왔냐?”
“죄송합니다. 어제는 워낙 바빠서요.”
대놓고 퉁명스레 말했음에도 웃으며 답하는 꼴이 보니 확실하다.
‘다 풀었군.’
이제야 가슴 속 응어리를 다 풀었다.
그래, 당연한 일이다. 도르곤을 직접 죽이고, 북방이 제국의 영토가 되고, 그 녀석들이 리브노만 백작위를 받았다. 아무리 속이 썩어 문드러졌어도 완치되기에 충분하다. 아직도 끙끙거리고 있다면 그건 정신병에 걸렸다는 의미겠지.
“바빴겠지. 게다가 동기들이 자기보다 윗사람이 됐으니 잠도 제대로 못 잤겠어.”
“부하가 위에 서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망할 놈이.”
내 말에 그 녀석도 낄낄거렸다. 리브노만 백작위는 단승 작위에 영지도 수여되지 않지만, 모든 백작보다 높은 대우를 받는 명예로운 작위다. 즉 일반 백작인 나도, 언젠가 제국백이 될 저 녀석도 리브노만 백작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것.
이 기가 막힌 상황에 절로 웃음이 터졌다. 평민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나보다도 위라. 앞으로 묘비에 가면 엎드려서 인사해야 되나? 감히 리브노만 백작 앞에 두 다리로 설 수는 없는 법.
“아, 명단도 갱신했습니다.”
“벌써?”
그리고 자랑하듯 내미는 감찰부 관료 명단을 보고 조금 놀랐다. 작위를 받은 게 어제였는데 오늘 갱신이 됐다고? 저 새끼가 섬세한 놈은 아닌─
“저도 잊고 있었는데 차장이 대신 해줬습니다.”
그럼 그렇지. 저 새끼가 그렇게 꼼꼼할 리가 없지.
“좋은 부하를 뒀어. 나는 너 같은 놈을 둬서 미치겠는데.”
“아니, 적어도 각하는 다른 부장들이 정상이지 않습니까. 전 비정상이 셋입니다.”
“그것도 네 복이지. 꼬우면 사직하든가.”
평소처럼 사직 기원으로 주제가 이어졌지만, 이상하게 이번에는 반응이 조금 달랐다.
“그건 못하죠. 아직 젊은 놈이 사직 운운하면 사람들이 욕합니다.”
“뭐?”
그 말에 순간 귀를 의심했다. 정말 사람들이 욕을 했다면 이미 100년 치는 들었을 놈이 이제 와서 저런다고?
“폐하께서도 일부 업무는 직접 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도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본능적으로 책상 서랍에 시선이 갔다. 지금 이 서랍 안에만 저놈이 제출한 사직서가 가득한데 무슨 말인지.
혹시 북방에서 머리를 다친 건가? 아니, 머리를 다쳤다면 여기 있을 게 아니라 마탑이나 교회에서 요양 중이어야 할 텐데.
“그래, 열심히 해라.”
그래도 저놈이 열심히 한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더 이상 잊을만하면 날아오는 사직서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니.
사실 저놈 하는 꼴이 괴랄해서 잊고 있었지만, 저 녀석의 몸에는 제국백의 피가 흐르지 않나. 황실에 충성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오히려 지금까지 사직 타령한 것이 이상할 정도로.
…흠.
“야.”
“예?”
“사직할 생각 없으면 다시 가져가.”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놈에게 서랍을 가득히 채운 사직서를 보여줬다.
그러자 흉한 걸 봤다는 듯 내 눈앞에서 사직서를 하나하나 찢기 시작했다.
‘더 미쳤군.’
원래도 정상이 아니었던 놈이 더 이상해졌다.
응어리만 풀고 돌아온 게 아니라 그 속에 광기를 품고 돌아온 모양이다.
***
장관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가니 과장들도 전부 모여있었다. 다행히 상사의 자택 방문 서비스는 폐기해도 될 것 같다.
그렇게 인사할 사람들과도 다 인사를 나누고,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명단이 갱신되기도 했으니 만족스러운 방문이었다.
유일한 오점이 있다면 장관이 추악한 과거의 잔재를 보여줬다는 것. 하지만 과거의 치욕을 내 손으로 찢음으로서 나는 과거의 나를 이긴 것이다. 이제 사직만을 갈구하던 나약한 공무원 칼은 사라지고, 황제에게 충성하는 칼만 남았다.
‘이렇게 머리가 깨지는 건가.’
문득 아버지처럼 열렬한 황제파의 길을 가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그런 은혜를 받고 입을 닦으면 사람 새끼가 아니라 짐승 새끼잖아. 그날부터 바로 머리 검은 짐승이 되는 거다.
‘예순까지는 열심히 하자.’
사직서도 예순까지는 쓰지 말고.
어차피 그 이전으로는 황태자가 놓아주지 않을 거다. 고작 40, 50대에 은퇴한 고위 관료는 제국 역사를 뒤져야 나올 정도니까.
‘예순까지 38년 남았나.’
끔찍하다. 38년을 더 일해야 겨우 사직을 노릴 수 있다니, 이게 무슨 지옥이야.심지어 내가 베아트릭스와 수명이 같아지는 날에는─
‘시발.’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끔찍한 상상을 털어냈다.
만약 수명이 늘어나면 철저히 가족끼리만 공유하자. 여든 정도 되면 세르베트 공작성 지하에 숨어지내던가 해야지.
‘…지하라.’
무심코 오른팔에 시선이 갔다.어쩌면 여든이 아니라 8시간 후에 공작성 지하를 볼 수도 있다.
제도에서 할 일이 끝났으니 이제 아카데미로 가야 하는데, 거기서 입을 잘못 놀리면 분노한 베아트릭스에게 감금당할 미래가 뻔하다. 그나마 전투에 참가한 걸 들키는 건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지만 팔이 잘린 것이 들키면 답이 없다.
그러니 숨겨야 한다. 내 처우와 연인들의 멘탈을 위해서라도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