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79)
로판 속 공무원 379화(380/451)
분명 평화의 상징이어야 할 곳이지만 나에게는 작은 전장이나 다름없는 아카데미. 애석하게도 작년에는 77년도 부원 놈들의 트롤링 때문에, 지금은 탈탈 털릴 미래 때문에 내 마음 속 아카데미는 절망스러운 장소에 불과했다. 이거 내년에도 무슨 일 터지는 거 아니냐.
아무튼 나 홀로 절망스러운 장소에 가는 것은 자폭이나 마찬가지인 일이라, 수치심을 무릅쓰고 지원군과 함께 복귀했다.
“다 모이는 건 오랜만이지?”
“네, 1학기가 시작한 이후로 처음입니다.”
두리번거리며 아카데미를 구경하는 페넬리아를 보니 안도감이 싹을 틔웠다. 페넬리아가 지원군이면 조금이나마 희망이 있다.
아카데미와 페넬리아. 평소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조합이지만 마침 묵광대가 휴가기도 하고, 페넬리아를 제외한 다섯 명 전원이 아카데미에 상주 중인 상황이기도 해서 자연스레 데려왔다. 다른 사람들 다 있는 자리에 홀로 없으면 서운한 법이니.
‘아군은 많을수록 좋지.’
게다가 페넬리아의 합류로 혼자 다섯을 상대하는 것이 아닌 둘이서 다섯을 상대하는 형국이 조성됐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후자 아니겠나.
‘에르제베트도 포섭할 수 있어.’
심지어 페넬리아가 있다면 에르제베트가 이쪽에 합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둘이 친한 것도 있지만, 에르제베트도 나름 구르고 구른 감찰부 간부다. 내가 직접 싸우고 다친 것에 상대적으로 관대할 터. 내 진심 어린 설득과 페넬리아의 지지가 있다면 셋이서 넷을 상대하는 접전까지 이끌 수 있다.
…연인을 상대로 계략이 난무하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들지만 지금만큼은 어쩔 수 없다. 일이 꼬이면 다섯을 상대로 두들겨 맞을 텐데, 나도 살 길은 만들어야지.
그리고 이건 착한 거짓말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언급해서 연인들이 걱정할 바에는 최대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넘어가는 것이 맞다.
그렇게 믿는다.
제과 동아리실에 가니 아무도 없었다. 수업 시간이니 부원들이 없는 건 당연하지만, 베아트릭스도 없는걸 보니 강의 중인 모양이다.
그런데 에르제베트까지 없네. 얘 평소에는 동아리실이 아니라 그냥 숙소에 있나?
‘잘 됐네.’
이건 에넨이 도왔다. 다섯 명이 흩어져 있다면 그만큼 따로따로 접촉하기도 편하겠지. 만약 뭉쳐 있었다면 포섭이고 뭐고 시도도 못한 채 끝났을 테니까.
“페넬리아. 감찰관 숙소로 가있을래? 에르제베트도 거기 있을 테니 잠깐만 쉬고 있어.”
“저 혼자… 말입니까?”
“다른 애들은 수업 중이라 이따 봐야겠지만, 마르는 회장실에 있잖아. 얼굴 좀 보고 오려고.”
그 말에 페넬리아도 빠르게 수긍했다. 저 수긍이 첫 번째 부인을 향한 배려인지, 아니면 그동안 나를 독점한 것 같아 양보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어느 쪽이든 너무 순한 반응이기는 하다. 조금이라도 자기 욕심을 보였으면 하는데 그런 게 없다.
“그럼 다녀올게.”
잠시 고민하다가 페넬리아의 뺨에 입을 맞췄다. 본인의 욕망을 억누르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하지만, 페넬리아의 심성이 그런 걸 어쩌겠나. 억지로 교정하거나 지적하는 것보다는 시간에 맡기는 수밖에.
등을 돌리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 역시 시간에 맡길 문제다.
***
갑자기 진동이 울린 통신구를 확인하던 베아트릭스 언니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아가가 왔구나.”
짧고 단순한 말이었지만 절로 몸이 들썩였다. 마탑주인 언니의 말이니 확실하다. 칼이 아카데미에 온다면 마법사의 텔레포트가 필요하니, 언니 귀에 소식이 들어오는 건 당연하다.
‘드디어.’
히죽거리는 입꼬리를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칼이 돌아왔다. 전쟁을 끝내고 마침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어제 칼에게서 오늘이나 내일 돌아올 거라는 연락을 받아 마음의 준비를 하기는 했으나, 정말 왔다는 말을 들으니 심장이 요동치는 기분이었다. 역시 먼 길을 떠난 연인이 돌아오는 건 어떤 준비로도 담담할 수 없는 일이구나.
“페넬리아도 같이 왔다고 하는구나. 그래, 이때가 아니면 겨울 방학이 되어야 만나겠지.”
좋은 소식 뒤에 다시 좋은 소식이 찾아왔다. 칼과 함께 전장으로 가서 걱정이 많았는데, 아카데미까지 온 것을 보면 페넬리아 언니도 무사히 돌아온 것 같다.
“둘 다 멀쩡한가요?”
“다행히 둘 다 다친 곳은 없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자 원하던 대답이 돌아왔다. 칼도 페넬리아 언니도 무사하─
“치료했을 테니까.”
이어진 말에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 칼이 다쳤다는 말에 서운함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몰려왔으니까.
분명 칼은 자기는 감찰관이니 싸울 일이 없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며 떠났다. 그랬으면서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싸우기나 하고, 그걸 숨기기까지 했다.
‘이해는 되지만…’
사실 칼의 심정은 이해한다. 황제 폐하께서 친히 감찰관으로 임명하신 거니 전쟁에 가는 건 피할 수 없다. 어차피 가야 하는 입장이니 우리가 걱정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위로한 것이겠지. 당시에는 칼이 종군한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웠지만 이성을 되찾고 나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아버님은 무인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셨다. 다치지 않는 것이 최선이나 무인으로 살다 보면 최선의 상황만 겪을 수는 없다는 말씀과 함께.
그러니 칼이 전투에 참전한 것도, 다친 것도 이해하고 넘어갔다. 안전한 곳에서 기다린 내가, 전장에서 싸운 당사자인 칼에게 ‘왜 다쳤어요.’ 같은 말을 하는 건 너무한 일이니.
하지만 칼은 침묵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뭐라고 하지도 않을 텐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칼의 심정을 헤아려보자면 우리가 걱정할까 봐 입을 다물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부상도 완벽히 치료했으니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고.
…그런데 전쟁에서 일어난 일을 베아트릭스 언니가 모를 수가 있나? 모든 마법사의 위에 언니가 있는데, 칼의 상처를 치료한 마법사가 언니에게 보고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하고 숨기는 걸까.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아가를 보면 웃으며 반겨주자꾸나. 오랜만에 보는 연인이 구박을 한다면 얼마나 서운하겠니.”
먼저 서운하게 한 건 아가지만─ 이라고 덧붙이는 언니의 말은 애써 못 들은 척했다.
– 똑똑
그렇게 언니와 다시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마르, 접니다.”
이윽고 들려오는 익숙하고 그리웠던 목소리에 입술을 꾹 깨물고 말았다. 아까는 심장이 요동쳤는데, 이번에는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나도 내 감정을 다스릴 수가 없다.
그건 언니도 마찬가지였는지 눈가에 작은 물방울이 보였다. 지금만큼은 나도 언니도, 칼을 향한 서운함이 전부 사라진 것이다.
“드, 들어, 오세요, 칼.”
겨우 감정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자 문이 열렸다. 익숙한 검은 머리, 익숙한 검은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미소를 머금은 채 들어왔던 칼은 나와 함께 있는 언니를 보자마자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
망했다. 시작부터 대차게 꼬였다.
분명 각개격파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만나려고 했는데, 가장 두려운 존재 둘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통신구로 보기는 했지만 역시 직접 보는 것이 더 좋군요.”
잠깐 작동이 멈췄던 머리를 다시 가동시키며 입을 열었다. 계획이 틀어지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니 나는 원래 계획대로 된 적보다 망한 적이 더 많다. 딱히 절망할 일은 아니다.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내 살 길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릴 때가 아니라 연인과의 재회를 기뻐할 때다. 착한 거짓말을 하는 것과 연인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하는 건 다른 문제다.
그렇게 말하며 막 소파에서 일어난 둘을 끌어안았다. 다행히 사람의 팔은 두 개기에 둘 다 동시에 안아줄 수 있었다. 네 개만 더 있으면 완벽할 텐데 아쉽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어제 오고 싶었는데, 일이 조금 있었어요.”
“괘, 괜찮아요. 전 칼이 이렇게 무사히 온 걸로도 기뻐요.”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에 마르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저 무사히라는 말에 양심이 찔리지 않는다면 짐승 새끼리라.
“나도, 나도 괜찮단다. 조금 늦으면 어떠니. 이렇게 아가한테 안길 수 있는데.”
안긴다는 말에 팔에 시선이 가지 않으면 짐승 새끼─
…
‘아.’
양심이 찔리는 말을 연달아 듣고 나서야 뒤늦게 진실을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외면했던 진실을 이제야 직시한 걸 수도 있다.
‘들켰다.’
각개격파고 설득이고 나발이고, 이미 전부 들켰다는 진실을.
세상에 완전 범죄 같은 건 없으니 어느 정도 들키는 건 각오하고 있었다. 내가 사레이 전선에 달려가거나, 마지막 전투에서 선봉에 선 걸 본 사람만 몇인데. 당연히 전투에 참가했다는 사실 자체는 숨기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저 연인들의 추궁을 전투 참가 여부에만 맞춰서, 부상까지는 주제가 흘러가지 않게 한다. 그게 최종 목표였다. 살을 내주고 뼈를 지키는 전략이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망했지만.
‘베아트릭스가 모를 리 없잖아.’
아무래도 하늘 베기를 쓰면서 마나뿐만 아니라 지능도 같이 쓴 모양이다. 상식적으로 마탑주인 베아트릭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이 대륙에 있을 리 없다.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은 베아트릭스의 눈이자 귀나 마찬가지다.
물론 지능이 퇴화했던 시기에도 최소한의 지능은 남았었는지, 나름의 대비를 하기는 했다. 북부 방면군 사령관과 함께 온 마법사에게 상처에 대해 함구해 줄 것을 부탁했었지. 베아트릭스의 후광 덕분인지 마법사들도 내 말은 제법 들어주니까.
그런데 마법사 입장에서 마탑주와 마탑주 반려의 명령이 서로 충돌하면, 과연 누구의 말을 따를까.
‘망할.’
둘을 껴안은 팔이 떨렸다.
“이렇게, 이렇게 돌아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칼.”
어느새 훌쩍거리는 마르의 목소리에 더욱 떨리기 시작했다.
“아가, 아직 동아리 시간은 멀었으니… 잠깐만 이렇게 있어줄 수 있겠니?”
이상하다. 분명 애정과 물기가 섞인 말인데 ‘옆에 두고 털어주마.’ 라는 말처럼 들렸다.
지금이라도 대가리 박으면 용서해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