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80)
로판 속 공무원 380화(381/451)
생존이 걸린 문제라 그런지 고민은 짧았다.
‘말하자.’
어쩔 수 없다. 이미 다 들킨 상황에서 뻗대는 건 목에 절취선을 긋고 뜯어달라 과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심증만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으면 거슬리는데, 물증까지 확보한 상태에서 부정한다? 아마 초근접거리에서 베아트릭스의 썬더볼트에 맞게 될 거다. 그건 도르곤하고 싸우는 것보다 심각한 위기지. 적어도 도르곤한테는 반격이라도 할 수 있잖아.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내 입으로 스스로 고백할 수 있는, 영혼까지 탈곡당하는 걸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아직 괜찮아.’
그래, 늦지 않았다. 비록 통신구로 연락했을 때는 참전이나 부상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직접 대면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요한 일이었으니 통신구가 아닌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하고 싶었다고 하면 어떻게든 살 수 있다. 논리적으로는 다소 허점이 있지만 납득은 할 수 있는 범위다.
“계속 이러고 있자. 동아리 시간이 되면 그때 동아리실로 가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머리와 달리 입은 자연스레 움직였다. 우회적 압박과 별개로 마르와 베아트릭스를 오랜만에 만나는 것은 사실이니까.
이따가 에르제베트랑 페넬리아도 회장실로 오라 해야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같이 왔을 텐데.
“저기, 칼, 오늘은 저도 동아리실에 가도 될까요?”
둘의 등을 토닥이자 마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은 모양이다.
생존 본능이 작동하는 와중에도 가슴 따뜻해지는 부탁이기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건 부탁이 아니라 통보를 해도 기쁜 마음으로 수락했을 거다.
“물론이죠. 오늘은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게 좋겠군요.”
“고마워요.”
배시시 미소를 짓는 마르를 보니 더욱 흐뭇했다. 역시 첫째 장인 어른이 바렌티의 보물이라고 자랑할만하다.
“저는 밤에도 괜찮으니, 문은 열어두겠습니다.”
그 미소를 보니 나도 모르게 사족을 덧붙이고 말았다. 그런데 저렇게 순수한 모습을 보고 이걸 어떻게 참아.
“네, 네?”
상상도 못한 공격이었는지 싱글벙글 웃던 마르는 그대로 넋이 나간 것처럼 말을 더듬었다. 거기다 얼굴은 머리카락처럼 붉게 변한 것이, 내 생각보다도 충격이 컸나 보다.
만족스럽다. 공격력이 딱히 강한 건 아니지만 수비력마저 약한 마르. 내가 아는 마르가 맞다.
“혹시 오는 게 불편하다면 제가 마르 방으로─”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부, 불편한 건 아니지만─ 그런 건, 나중에 해야죠!”
허둥거리며 기묘한 사양을 하는 마르의 모습에 베아트릭스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와중에 나중이라니, 마음 속에 작은 욕망 정도는 품고 있구나.
“아가. 그럼 내가 가도 괜찮겠니?”
“괜찮─”
“안 돼요!”
누구 들어도 농담인 말을 황급히 끊는 마르의 목소리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즐겁다. 이렇게 웃고 있으니 모든 게 끝났다는 것이 실감이 된다.
…즐겁기는 하지만, 진실을 고백하기 전 즐기는 마지막 행복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올 것 같다.
토라진 듯한 마르를 달래는 건 힘든 일이었다. 공녀인 마르가 어디서 놀림을 당했을 리 없으니 내성이 없는 건 당연한 일. 게다가 기껏 재회한 연인이 장난부터 친다고 생각하면 서러울만하지.
누군가를 놀리는 게 잘한 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후회하지도 않는다. 과거로 돌아가도 그때의 마르를 보면 장난을 쳤을 거라 확신한다.
“미안합니다, 마르. 너무 반가워서 마르랑 조금이라도 오래 말하고 싶었어요.”
“다른 주제도 많았잖아요…”
“하루 종일 마르랑 같이 있고 싶은 건 사실이니까요.”
그 말에 내 무릎에 앉아있던 마르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놀림당한 것과 별개로 자기와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은 썩 마음에 든 것처럼. 유감스럽게도 내가 마르에게 이리 구체적인 말을 한 적이 드물었으니까.
생각해 보니 과거의 나도 대단하다. 연인이라는 놈이 애정 표현이 너무 드물었다. 아무리 가슴 속에 응어리가 있었다고 해도 너무 과했을 정도로.
“그리고 몇 달 후면 정식으로 부부가 될 테니, 같은 방에서 지내는 연습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잠깐 고민하다가 마르의 귀에 속삭였다.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애정은 앞으로 배로 나타내면 된다. 남들이 보기에 닭살이 돋더라도 연인들이 좋으면 그만이다.
“그, 그건 굳이 연습하지 않아도 돼요.”
순간 파르르 어깨를 떤 마르게 작게 대답했다. 그래도 아까보다 목소리가 밝은 것이, 결혼이라는 말에 서운함이 풀어진 것 같았다.
‘앞으로 자주 말해야지.’
아까 말한 것처럼 결혼이 몇 달 남지 않았으니 말할 기회는 많다.
마르가 졸업하면 바로 결혼할 생각이니 결혼식 준비는 학생인 마르보다 내가 주도해야겠지만, 신부의 의견이 꼭 필요한 부분도 있으니까. 필연적으로 자주 말할 수밖에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기에 소소한 다짐을 담아 마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내 연인 중 누구보다 마음고생이 심했을 마르니 최고의 결혼식을 준비하자고. 장인 어른도 기립박수를 할 정도로 정성을 다하자고.
뭐, 여차하면 어머니나 유모한테 조언이라도 구해야지. 결혼 경험자니 신부가 지닌 결혼식 환상을 잘 알지 않겠나. 내가 놓치는 부분을 세세하게 짚어줄 거다.
“칼, 잠깐만요.”
“예?”
하늘이 무너져도 외숙모에게 조언을 구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는 찰나, 내 뺨에 마르의 입술이 닿았다.
“지금까지 제가 받기만 했잖아요. 저도 돌려주고 싶었어요.”
부끄러움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감동적이기 그지없다. 페넬리아는 입술만 닿아도 기절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에 돌입하는데, 마르는 이렇게 반격도 할 줄 아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이게 첫 번째 부인의 품격?
아니, 그냥 페넬리아가 유독 약한 건가.
“나는 잠깐 나가 있어야겠구나.”
‘아.’
그리고 셋이 있는 장소에서 너무 둘만 애정 표현을 하자 베아트릭스가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건 너무하기는 했다. 아무리 마르를 달래기 위해서라지만 편애로 오해할 수 있는 광경을 보였다.
“그럴 리가. 오늘은 계속 붙어있어야지.”
미소를 지으며 옆자리를 툭툭 치자 베아트릭스가 빠르게 다가와 앉았다.
내 빈 무릎에.
“저기, 베아트릭스?”
“왜 그러니?”
살짝 붉어진 얼굴로 새침하게 반문하는 베아트릭스를 보니 도로 입이 닫히고 말았다. 이건 나름 큰 용기를 내서 한 애정표현일 터.
“그냥. 좋은 향기가 나서.”
그래서 적당히 하려던 말을 바꿨다. 용기를 낸 사람에게 야박하게 대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게다가 좋은 향기가 나는 건 사실이니까.
“그, 그래? 다행이구나.”
뭐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은 순발력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기뻐하면 그만이지.
‘지금이다.’
그렇게 양 무릎에 마르와 베아트릭스를 앉히고 나서야 확신이 설 수 있었다. 어쩌다 보니 조성된 이 핑크빛 분위기, 이 타이밍에 자백하면 열 번 혼날 거 세 번 정도로 줄일 수 있다.
“이러고 있으니까 돌아온 게 실감이 되네. 상처 없이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내가 먼저 운을 떼자 두 쌍의 시선이 꽂혔다. 마치 ‘네가 먼저 그 주제를 꺼낼 줄은 몰랐다.’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순간 지금이라도 물릴까 하는 욕구가 생겼지만 참았다.
지금이 아니면 다음은 없다.
***
일이 꼬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분노와 눈물 가득한 호통이 귀를 관통했다. 부인 뒤에 시립한 시녀장도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일 정도로 부인의 분노는 거셌다.
일이 꼬여도 너무 꼬였다. 평생 숨길 수는 없는 일이니 언젠가는 기회를 봐서 말하려고 했지만, 부인의 정보망을 통해 칼이 전투에 참여한 것을 들키고 말았다. 크라시우스 가문의 안주인이자 현명공의 아가씨이기도 한 부인의 인맥을 간과했다.
“분명, 분명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알고 보내줬다고요!”
“부, 부인. 그건─”
급히 입을 열자 부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봤다. 마치 ‘네가 감히 내 앞에서 변명을 해?’ 라고 꾸짖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한동안 파르르 떨리는 눈초리로 보던 부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아까보다 작은, 그러나 더욱 짙은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칼이, 그 아이가 전투에 참여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요. 빌리, 당신을 구하기 위해 간 것이니 당연히 이해하죠. 칼 덕분에 당신이 살아돌아올 수 있었으니 오히려 기뻐요.”
“부인…”
“조용.”
내가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에 감동해서 입을 열어버렸지만, 순식간에 다물고 말았다. 눈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더욱 따가운 눈으로 보던 부인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들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싸우는 건 당연해요. 그런데 왜 그 아이가 선봉에 선 거죠? 왜 적의 수괴와 직접 싸우고, 다치기까지 한 거죠?”
한참이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던 부인은 결국 감정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차마 할 말이 없다. 어제 칼에게서 무사히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좋아했던 부인이다. 조만간 에리히와 함께 영지에 오겠다는 말에 행복해했던 부인이다.
그랬던 부인이 아들이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다쳤다는 슬픔에, 그 사실을 남편이 숨겼다는 배신감에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 죄다. 칼이 부인에게 부상을 숨긴 건 ‘어머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아들의 마음.’ 이라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입을 다문 건 ‘남편이 자식의 일을 숨긴 것.’ 이 된다.
아들의 다소 일그러진 효심과 남편의 침묵. 당연히 후자가 더 충격적이겠지. 그렇기에 도저히 부인에게 변명도 사과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하오, 부인. 내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당신이 충격을 받을 것 같아 말하지 못했소.”
그래도 입을 열었다. 침묵으로 일어난 사건을 침묵으로 대처하는 건 끔찍한 일이다.
“부인의 걱정과 슬픔은 나도 아오. 나 역시 그 아이의 아비인데 당연한 일이지.”
나도 칼의 부모라는 공감대 덕분인지, 부인의 얼굴에 깃든 원망이 조금 희미해졌다.
다행이다. 내 말을 들을 생각은 있는 것 같다.
“나도 칼이 안전한 곳에 있었으면 했소. 하지만 그 아이가 3년 전에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을 스스로 끝내고 싶다며, 그 한을 풀고 싶다며 직접 나서길 원하는데 어떻게 막겠소.”
“마무리, 요…?”
흐끅이던 부인이 겨우 목소리를 냈다. 칼의 종군이 결정되었을 때, 울다 쓰러진 부인을 설득하기 위하여 칼은 부인에게 북방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줬다. 북방에서 겪었던 슬픔, 친구와 연인을 두고 온 고통을.
부인은 그저 그 슬픔과 고통을 푸는 방법이 전투인 걸 몰랐을 뿐이다. 칼이 부인을 설득할 때 역천자나 도르곤에 대한 설명은 되도록 피했으니까.
“그 아이에게는 원수, 숙적이나 다름없는 자가 있었소. 직접 쓰러뜨리고 싶었던 존재였지.”
거기까지 말하자 부인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지혜로운 부인이라면 방금 한 말로도 충분히 상황을 파악했을 거다.
고개를 숙였기에 부인의 손등에는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지만, 그래도 울음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칼이 처했던 상황을 이해했기에 원망과 슬픔이 줄어든 것이다.
그런 부인을 향해 조심스레 덧붙여 말했다. 너무 부정적인 소식만 들려주는 건 부인에게 가혹한 일이니.
“그래도 칼은 훌륭히 승리했소. 수괴를 쓰러뜨리고 제국에 승리를 안겼지. 비록 팔이 잘리는 부상이 있었지만 완벽히 치료─”
“뭐가 잘렸다고요?”
…
어?
“팔이… 잘렸다고요?”
다시 부인의 기세가 흉포해졌다. 부인의 뒤에 있던 시녀장도 경악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막았다.
설마, 설마 부상을 입었다는 것만 알고 어디가 다친지는 몰랐던 건가?
“그런 부상을, 숨겼던 건가요?”
‘망할.’
실수다. 참전과 부상에 대해 알기에 당연히 전부 아는 줄 알았는데.
다시 입을 다물자 부인은 한참이나 나를 노려보더니 나지막히 선고했다.
“빌리. 당분간 빌리가 미울 것 같아요. 정확히는 칼이 영지에 돌아올 때까지요.”
그 선고에 침통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추방령을 받고 제도에 있는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영지에서 얼쩡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부인이 다른 곳으로 가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택에 들어가자마자 어제부터 신세를 지고 있던 게오르크가 반겨줬다.
“내가 말했지? 자네도 조만간 올 것 같다고 했잖나.”
“닥치게.”
낄낄거리는 게오르크를 보니 내보내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