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81)
로판 속 공무원 381화(382/451)
목숨을 건 변명─ 아니, 자백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원래 쫄리는 사람이 혓바닥도 길어지는 법이다.
다행인 것은 내 말이 길어져도 마르와 베아트릭스가 묵묵히 들어줬다는 것이다. 만약 내 자백이 추한 변명이라고 생각된다면 바로 끊었을 텐데, 들어준다는 것 자체가 믿어준다는 의미 아니겠나. 실로 고무적인 일이다.
“충분히 통신구를 통해 말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큰 문제일수록 직접 보며 말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자백 내용도 급히 생각한 것치고는 그럴 듯했다. 통신구의 성능이 좋다고 한들 결국 멀리 떨어져 있는 상대와 대화하는 것이다. 당장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연인이 전쟁에 나가서 팔이 잘렸다는 말을 들었는데 만질 수 없다. 그 팔을 쓰다듬으며 위로할 수도 없고, 반대로 자기가 눈물을 터뜨려도 쓰다듬받을 수 없다. 심지어 통신이 끝나면 정신이 나간 채로 홀로 지내야 한다.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미 생긴 상처, 완전히 회복한 상처 때문에 그런 끔찍한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그런 명분을 내세우니 둘도 납득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물론 내가 말하지 않아도 베아트릭스가 모를 리 없는데, 그 생각을 못했어. 괜히 더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정말 베아트릭스가 모를 거라 생각해서 입을 다문 것이기에 진심 가득한 사과를 하자, 베아트릭스도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전쟁의 광기는 이성을 멈추게 하지. 이해한단다.”
“고마워.”
뭔가 돌려 까는 것 같은 말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흔히 군대에 들어가면 지능이 이상해진다는 자조 섞인 농담이 있는데, 전쟁까지 다녀오면 오죽할까. 베아트릭스 말처럼 이성, 정확히는 지능이 잠시 멈췄던 것 같다.
그래, 분명 그런 거다. 그게 아니고서야 내가 마탑주의 정보망을 벗어나겠다는 미친 발상을 할 리가 없어.
‘살았다.’
그리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응을 보니 나를 구박하는 대신 믿어주는 걸로 완전히 방향을 잡은 것 같으니까.
살았다. 조금만 삐끗하면 영혼까지 털렸을 상황에서 벗어났다. 역시 사람은 말을 잘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도, 앞으로 이런 일은 없겠죠? 칼이 전장에 갈 일도, 저희한테 숨길 일도요.”
그 와중에 일말의 불안이 섞인 마르의 목소리가 들려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다.
“물론입니다. 이번이 워낙 특이한 상황이라 종군한 것이지, 저는 군부가 아니라 행정부 소속이지 않습니까.”
이미 행정부 소속으로서 두 번이나 종군한 놈이 할 말은 아니지만, 그건 카간과 도르곤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둘 다 죽었고, 북방은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더 이상 내가 종군해야 할 특수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전쟁만 아니라면 내가 연인들에게 함구하거나 거짓말을 할 일도 없고. 마르의 바람처럼 이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다. 확신한다.
막말로 날 전장에 보낼 거면 군부로 소속을 옮겨주든가. 황태자가 막았지만.
“후후, 그렇죠. 칼은 행정 관료였죠.”
그제야 안심한 듯 키득거리는 마르를 보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걱정하고 우울해하는 표정보다 웃는 얼굴이 더 예쁘─
“제가 태어나기도 전이지만, 아버님은 자주 전쟁에 나가셨다고 들었거든요. 혹시 칼도 그렇게 되면 어쩌나 고민했어요.”
‘아.’
그 말을 들으니 마르가 종군이라는 단어에 유독 불안감을 보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미 가족 중에 종군 경험이 잦은 사람이 있으니 당연한 일.
첫째 장인 어른이 현역에서 구를 때는 동부 국경에서 소란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과거부터 이어진 혼란이 선황 재위 말기에 터졌고, 현 황제 재위 초기까지 이어졌었지. 그 기간과 절묘하게 겹친 것이 장인 어른의 전성기라 당시 책임자는 장인 어른이셨고.
“그때 장인 어른께서 활약하신 덕분에 후대인 저희가 전쟁에 나설 일이 사라졌죠.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가요? 아버님은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사위를 위해 노력하셨네요.”
농담 섞인 대답을 하는 마르였지만, 당시 장인 어른에게 처맞은 동부 왕국들 입장에서는 농담 같지 않을 거다. 얼마나 영혼을 담아 패셨는지 동부 국경은 지금까지 잠잠할 정도니까.
특히 대륙 중부의 강국이라 불리던 레온 왕국은 제국의 진심 펀치에 맞은 이후로 중부의 환자로 전락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거 조만간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장인 어른 덕에 평화 속에서 마르와 결혼할 수 있었다고요.”
물론 가본 적도 없는 국가를 동정하는 것보다 마르에게 예쁘고 좋은 말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 금방 머리에서 지웠다. 레온이고 타이거고 알 게 뭔가.
그리고 내 말에 더욱 짙은 미소를 짓는 마르를 보니, 아무래도 오늘 밤에 장인 어른은 ‘아빠 사랑해요.’ 라는 말을 들을 것 같다.
아마 어떤 선물과 감사보다 그 한 마디에 더 기뻐하시겠지. 사위의 보이지 않는 노고를 알아주셨으면 좋겠는데.
“그러고 보니 슬슬 점─”
‘점심 시간이니 같이 식사라도 하자.’ 라는 말을 완성하기 직전, 갑작스레 회장실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뭐지?’
진짜 뭐지. 아카데미 학생이나 교직원 중 학생회실에 오는 사람 자체가 적은 편이지만, 공녀가 버티고 있는 회장실까지 올 사람은 더 적은데?
다른 의미로 문화 충격을 겪으며 시선을 돌리니, 익숙한 하얀 머리가 보였다.
“마르! 부장님 여기에 왔지!?”
아, 쟤구나.
납득했다. 쟤라면 충분히 그럴만하다.
“어서 오렴, 에리.”
“어? 언니?”
아무튼 마르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열어젖혔던 에르제베트는 베아트릭스까지 있는 걸 보더니 눈을 깜빡였다.
놀랐지? 나도 놀랐어. 설마 둘이 같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
“치사하게 둘이서만 부장님 무릎에 앉으면 어떡해!”
그 와중에 이상한 곳에서 성을 내는 에르제베트를 보니 내가 아는 에르제베트가 맞아 가슴이 따뜻해졌다. 언제 어디서 보든 한결같은 아이다.
설마 전장에서 돌아온 연인에게 인사하는 것보다 그 연인의 무릎이 뺏긴 것에 먼저 반응할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부장님, 세 번째 다리 같은 거 없어요? 숨기지 말고 꺼내봐요!”
“야 이 미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리고 자연스레 미친 말을 하는 에르제베트의 모습에 기겁했다.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하는 말이겠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소름 돋는다.
…의식의 흐름 맞지?
후발 주자의 극렬 항의로 인해 무릎의 주인이 교체됐다. 에르제베트와 황급히 따라들어온 페넬리아가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분명 내 무릎이지만 지금만큼은 내 무릎이 아니다. 아무튼 그렇다.
“히히, 이러고 있으니까 좋네요.”
“그럼 다행이고.”
히죽거리는 에르제베트의 머리를 쓰다듬자 더욱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녀석이 아까는 세 번째 다리니 뭐니 그런 말이나 하고.
“부장님이 멀쩡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만약 다쳤으면 이런 것도 못 하잖아요!”
“내 다리가 의자 역할밖에 안 되는 거냐.”
픽 웃음을 흘리며 거칠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얘기했나 보네.’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보자마자 나를 쪼는 대신 무릎을 차지하고 만족한 걸 보니 페넬리아가 잘 설득한 모양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부상에 대해 관대한 걸 수도 있고.
물론 어느 쪽이든 나에겐 이로운 일이다. 만약 에르제베트를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도저히 말로 이길 자신이 없다. 얘하고 말싸움을 하는 건 나는 바둑, 상대는 알까기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지라.
“이따 동아리 시간에는 루이제랑 이리나한테 해주세요.”
이상하다. 무릎을 제공하는 건 나인데 본인이 선심 쓰는 것처럼 말한다.
“우리 에르제베트 착하네. 다른 사람들도 배려도 해주고.”
“그쵸? 제가 아무한테나 이러는 건 아닌데, 같은 가족이잖아요!”
그래서 농담 섞인 칭찬을 했지만 농담을 쳐내고 칭찬만 받아들였다.경이로운 멘탈이다. 이렇게 살면 스트레스라는 게 없겠다 싶을 정도로.
그런 에르제베트를 보다가 페넬리아에게 시선을 돌리니 경이로움 대신 짠함을 느꼈다. 친구는 꺼리는 게 너무 없어서 탈인데, 너는 대체 왜.
“…페넬리아, 더 편하게 앉아도 돼.”
“괜찮습니다. 지금도 편합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안 편해 보여서 하는 말인데 당사자만 그걸 모른다.
당당히 앉아있는 에르제베트와 달리 페넬리아는 투명 의자에 앉은 것처럼 안전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미 포옹도 하고 이마와 볼에 입도 맞췄으면서 이건 왜.
‘깔고 앉을 수 없다는 건가?’
그러면 내가 페넬리아의 무릎에 앉는 건 괜찮은 건가…?
착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페넬리아의 어깨를 눌렀다. 그제서야 내 무릎에 앉았지만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도로 투명 의자 상태에 돌입할 거라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
왁자지껄 떠드는 셋, 정확히는 둘을 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무릎을 양보한 것은 조금, 아주 조금 아쉽지만 동생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양보할 수 있다. 심지어 에리와 페넬리아는 곧 제도로 돌아가야 하는 입장이니 더더욱.
‘축하는 이따가 해야겠구나.’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아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에리, 아가가 강제로 무릎에 앉히자 빨개진 얼굴로 굳은 페넬리아.
이 행복을 방해할 수는 없다. 아가를 위한 축하지만, 지금 축하를 하는 건 분위기를 끊는 것이나 다름없다.
‘리브노만 백작이라.’
어제 있었던 일이지만 순식간에 제국 전체로 퍼진 사건을 떠올렸다. 아가의 친우가, 옛 연인이 마침내 공로를 인정받고 최고의 명예를 받은 그 사건.
그 영광스러운 사건은 널리 퍼졌다. 제도를 넘어, 수도권을 넘어, 제국 전체에 퍼졌다. 곧 있으면 대륙 전체로도 퍼질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마법사들에게 널리 널리 퍼뜨리라고 지시했으니까.
‘그럴수록 아가가 기뻐할 테니.’
당연히 아가에게 과시할 생각은 없다. 혹시 아가가 빚을 졌다고 생각하면 곤란한 일이니.
나는 그저 아가에게 박수를 쳐주고, 그동안 고생했다고 안아주면 된다. 내가 아가에게 보일 축하는 그거면 충분하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보이지만.’
그것이 축하를 삼갈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행복은 나눌수록 늘어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