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83)
로판 속 공무원 383화(384/451)
아버지의 깜짝 고백 이후, 동아리실에는 짙은 숙연함과 정적이 내려앉았다.
사일런스 마법이라도 건 듯한 정적이라 감탄이 나올 뻔했다. 아버지는 순수 검사가 아니라 마검사였던 건가? 역시 제국백이라 그런지 뭐가 달라도 다르다.
그렇게 기묘한 현실도피를 끝내고 주변을 살피자, 대화를 듣게 된 주변인들의 표정도 오묘하기 그지없었다.
‘충격이 크구나.’
특히 에리히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안색이라 안쓰러울 정도였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아버지와 관계를 회복─ 아니, 내가 일방적으로 닫고 있던 마음을 열었지만, 아직 에리히는 아버지와 어색한 사이 아닌가. 게다가 연인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도 신년하례식 때나 영지에서 본 근엄한 모습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 쫓겨났어.’ 같은 말을 들으면 인지부조화가 올 수밖에 없다. 솔직히 나도 혼란스러워.
‘편견이 무섭기는 하네.’
그리고 내가 몇 년 동안 달고 있던 편견이 너무 두터웠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대체 이런 아버지의 뭘 보고 엄격하고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지? 그냥 말이 별로 없고 감정 표현이 서툰 거지, 엄격과 냉정이랑은 너무 거리가 먼 데?
“제 사람은 잘 챙기지 않습니까? 적어도 빌헬름의 동기나 후배 중, 빌헬름 그 친구를 싫어하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문득 작년, 정확히는 1학년 1학기 실기 시험 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교장과 대련장을 돌아다니다가 아버지에 대한 얘기도 나왔었지.
그때는 귀족으로서 자기 파벌을 잘 챙긴다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주변인을 잘 챙기는 순박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싶다.
편견… 무섭다…
– 음?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침묵을 지키는 사이, 아버지가 의아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 칼, 혹시 그 아이들도 같이 있느냐?
‘아.’
그 말에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자 여전히 내 무릎에 있는 분홍 머리와 금색 머리가 보였다. 얼굴이 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아버지의 통신구에 머리카락 정도는 잡힌 모양이다.
“예, 전부 같이 있습니다.”
– …민망한 모습을 보였구나.
진심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말이라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며느리들이 있는 자리에서 시아버지의 권위가 떡락했으니 민망하기에 충분한 일이기는 하지.
“아, 아버님,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그러나 민망함과는 별개로, 아버지의 눈에 들어왔으니 인사를 드리는 것이 며느리의 숙명. 먼저 이성을 되찾은 이리나가 얼굴을 내밀며 고개를 숙이자 아버지의 표정도 조금은 밝아졌다.
다행이다. 며느리를 본 기쁨으로 부끄러움을 억누른 것 같아서.
– 그래,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느냐?
“네, 걱정해주신 덕분에 잘 지냈어요. 아버님은 괜찮으신가요?”
역으로 묻는 안부에 아버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주 미세한 떨림이라 이리나는 보지 못한 것 같지만 나는 봤다.
아마 아버지의 귀에는 ‘집에서도 쫓겨났는데 잘 지내세요?’ 라는 안부로 들렸겠지. 원래 찔리는 게 있는 사람은 사소한 걸로도 움찔하는 법이다.
“아버님도 종군하셨다고 들었는데…”
– 나는 괜찮다. 원수가 다칠 일이 얼마나 있겠느냐.
원수임에도 직접 전선에서 싸운 분이 할 말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기행을 모르는 이리나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적으로 기사나 일반 병사가 아닌 원수가 싸우다 다치는 게 말이 되겠냐.
물론 아버지와 전대 호르펠트 백작은 그 상식을 산산조각냈다. 혹시 그거 때문에 쫓겨나신 건가? 확실히 전대 호르펠트 백작은 싸운 게 들켜서 쫓겨나기는 했는데.
– 그리고 시간이 되면 사돈께 보내주신 반지는 잘 받았다고 전해주거라. 내 직접 감사를 드려야 하지만, 지금은 바쁘신지 연락이 잘 닿지 않아서 말이다.
‘미친.’
반지라는 말에 본능적으로 쌍욕이 나올 뻔했다.
넷째 장인 어른이 선물로 줄 반지면 반쪽 반지를 말하는 걸 텐데, 아버지도 그걸 받았다고? 그러면 이제 아버지와 어머니도 반쪽 반지를 낀 모습을 봐야 하는 건가?
“아, 네. 꼭 전달할게요.”
– 그래, 부탁하마.
타들어가는 내 속과 달리 의젓하게 답한 이리나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은 아버지는 이윽고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루이제도 오랜만에 보니 반갑구나.
“아, 네, 네! 오랜만에 봬요, 아버님!”
언제 인사를 건네야 하나 눈치를 보던 루이제는 아버지가 먼저 말을 걸자 황급히 고개를 꾸벅였다. 그 와중에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여러 번 꾸벅이는 것이 어지간히 긴장한 모양이다.
의외다. 아무리 친화력 넘치는 카피바라라도 시아버지 앞에서는 움츠러드는 건가?
– 이만 끊으마. 다른 아이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싶지만, 좋은 시간을 방해한 것 같으니.
“아뇨, 괜찮습니다. 더 말씀하셔도─”
– 됐다. 아내한테 쫓겨났는데 아들한테도 밉보일 수는 없지.
이미 권위가 떡락해서 막 나가기로 했는지, 자폭성 발언에 입술을 꾹 깨물고 말았다. 이거 방심했으면 면전에서 터졌다.
– 대신 주말에 전부 와줬으면 하는구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폭풍 같았던 대화가 끝났고, 슬쩍시선을 돌리자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짓는 에리히가 보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할 말이 있어서 빠진 영혼을 다시 불어넣었다.
“주말에 시간 많지? 너도 가자.”
“어?”
그 과정이 다소 강압적이기는 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나도?”
“너도.”
아무튼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깜빡이는 에리히에게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단호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에리히는 여전히 의문을 담은 눈빛으로 쳐다봤자. 아마 ‘형하고 형수들이 가는 자리에 나는 왜.’ 같은 심정을 담은 눈빛이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얘도 꼭 가야 한다.
“어머니한테 너도 간다고 말씀드렸거든.”
개선식이 있던 날 저녁, 어머니에게 무사 귀환 보고를 했었다. 연인들만큼 나를 걱정하고 계실 테니 바로 영지에 가는 건 무리더라도 연락 정도는 하는 게 도리지.
그리고 보고를 하면서 에리히와 함께 영지에 가겠다는 말도 꺼내고 말았다. 별 의도는 없고, 가주와 후계자가 전쟁에서 돌아왔으니 온 가족이 모이면 좋을 것 같아서 한 말이다. 그냥 평범한 가족 모임 같은 거.
물론 에리히의 동의를 구하기 전에 한 말이었다. 솔직히 아카데미에만 박혀있는 놈한테 동의를 구할 필요가 있을까? 형이 가자면 가는 거지.
“형, 나도 요즘 수련 때문에 바빠서─”
부질없는 변명을 하는 에리히의 말을 끊고 손짓을 하자 에리히는 뚱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마음이 아프다. 가족이 모이는 화합의 장소에 동생이 불참하는 건, 온 가족이 동생을 따돌리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형으로서 좌시할 수 없는 일.
“나도 이제 작위 귀족이라 타일글레헨 백작위는 없어도 되는데, 너 없는 자리에서 널 후계자로 추천해 볼까?”
“이번 주말이지? 바로 준비할게.”
다행히 진심을 담은 속삭임에 에리히는 빠르게 수긍했다.
그런데 조금 괘씸하네. 타일글레헨 백작위가 뭐 어때서. 남들은 제국백이 되고 싶어도 못 된다고.
***
딱히 영지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영지가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누가 봐도 형과 예비 형수 여섯이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는 자리지 않나. 괜히 그런 자리에 참석하면 여러 의미로 눈치만 보다 돌아올 미래가 뻔하다.
그러나 형의 흉악한 협박에 굴복하고 말았다.
‘후계자?’
끔찍한 말이다. 일개 동생 나부랭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두려운 짐이다.
나는 가주님과 형이 업무에 시달리는 걸 지켜보며 자랐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 길을 따라가고 싶을 리가 있나. 그냥 남작위 정도나 물려받으며 평온하게 지내고 싶지.
게다가 형이 건재한 상황에서 후계자가 되면 무슨 일을 하든 비교의 시선을 받게 된다. 형이 후계자인 상황에서도 수많은 시선을 받았는데, 내가 후계자? 차기 제국백?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거다.
‘망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작위를 동생에게 양보할 리가 없다. 작위는 귀족의 부, 명예, 권력을 상징하니까. 심지어 그냥 작위도 아닌 제국백 작위는 더더욱.
하지만 형은 상식과 많이 어긋난 존재라 방심할 수 없다. 가지 않겠다고 버티면 다음날에 ‘크라시우스 가문의 후계자 에리히’ 가 될 미래가 어렴풋이 보인다.
“혼자 가기 쓸쓸하면 세라랑 같이 가든가. 세라도 오랜만에 가족 얼굴 좀 봐야지.”
그 말에 무심코 세라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세라, 세라라. 확실히 세라가 같이 가주면 혼자 멀뚱히 앉아있는 것보다 좋기는 한데.
“세라가 피곤하지 않을─”
“괜찮아! 나도 갈게!”
활기찬 대답에 안심했다. 괜찮다면 다행이네.
“둘도 같이 간다면 크라시우스 가문이 전부 모이는 거겠네요?”
“큰일을 끝냈으니 가족이 모이는 건 당연한 일이죠.”
이제는 첫 번째 형수라는 호칭이 익숙해지는 공녀님의 말에 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저렇게 들으니 조금 찝찝하다. 크라시우스 가문의 일원, 혹은 곧 일원이 될 사람들만 모인 자리에 세라를 대동하는 건 내 욕심이 아닐까? 나 편하자고 세라를 부담스럽게 하는 건 아닐까?
‘…괜찮겠지?’
그래, 괜찮을 거다. 어머니도 유모의 딸인 세라는 자식처럼 여기지 않나. 가주님은─
음, 생각하지 말자. 내 머릿속 가주님의 이미지가 완전히 무너져버렸으니.
***
속이 터질 것 같다. 동생의 한심한 모습을 보는 건 어지간한 멘탈로는 불가능 한 일이다.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 세라를 데려오라는 말을 했고, 마르는 ‘에리히와 세라까지 오니 크라시우스 가문 전부가 모이는 것.’ 이라고 했다. 나뿐만 아니라 네 형수도 도움을 주는 건데 왜.
‘일부러 저러는 건가?’
슬슬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고의로 외면하는 게 아닌가, 라는 의심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내 동생이 인성 파탄자라면 너무 슬플 것 같다. 인성이 쓰레기인 것과 눈치가 없는 것 중에 고르라면 후자가 낫지.
‘어렵게 말한 것도 아닌데.’
솟아오르는 한숨을 겨우 참았다.
내가 복잡하게 암시를 줘서 이해하지 못하는 거라면 모를까, 에리히 옆에 붙어있는 세라는 한껏 상기된 얼굴로 눈을 반짝이고 있다. 쟤는 나와 마르가 한 말을 이해했다는 것.
‘안 되겠다.’
사실 세라를 밀어주는 건 호르펠트 백작에 비해 불리한 조건을 가진 세라에게 이점을 주기 위해서인데, 가만히 보니 세라와 호르펠트 백작 사이에는 이점이고 뭐고 없다. 그냥 사이좋게 불리하다.
아니, 오히려 에리히와 멀리 있는 호르펠트 백작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조만간 호르펠트 백작도 불러야지.’
에리히가 둘이 싫어서 밀어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허나 자신을 좋아하는 것도 모르고 밀어내는 건 너무 끔찍한 일이다.
‘크라시우스는 대체…’
어머니에게 구박받는 아버지, 연인만 여섯인 장남, 눈치가 멸종한 차남.
어떻게 이런 구성원만 있는지 경이로울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