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86)
로판 속 공무원 386화(387/451)
두렵다. 이 포위망이,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이 너무 두렵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있던 연인들이 우르르 올 때는 집사장과 너무 오래 붙어있어서 그런 건가 싶었다. 기껏 시댁에 왔는데 예비 남편은 엄한 곳에서 놀고 있으니 잡아가려는 줄 알았지. 그래서 웃는 얼굴로 맞이해줬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잡아가기는커녕 순식간에 원형으로 포위하고 말로 팼다.
“저는 칼이 한 말을 전부 믿었는데, 변명이었군요.”
“아니, 마르, 그게─”
“아가를 마법사가 치료해서 다행이구나. 만약 사제였다면 영원히 묻혔겠지.”
“그, 저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마르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베아트릭스의 협공에 정신이 나갈 것 같다.
망했다. 집사장과 다른 얘기를 하는 사이 밝혀지면 안 되는 진실이 세상에 드러났다. 처음부터 부상을 밝히려던 게 아니라, 최대한 함구하려던 추한 진실을 들키고 말았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다치는 건 싫지만, 다친 것도 모르는 건 더 싫어요.”
“그래도 오빠는 사실대로 말했으니까, 저희가 착각한 거죠? 처음부터 말할 생각이었던 거 맞죠?”
게다가 루이제와 이리나까지 양심을 찔러대니 입조차 벙긋거릴 수 없었다. 차라리 격노를 하면 겸허히 수용할 텐데, 마지막까지 나에 대한 믿음과 애틋함을 유지해서 미칠 노릇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여섯이 아닌 넷에게 치이고 있다는 점이기는 한데.
‘망할.’
몇 걸음 물러난 상태로 구경 중인 둘을 보자마자 희망을 놓고 말았다. 에르제베트는 이 광경이 흥미롭다는 듯 히죽거리고 있었고, 페넬리아는 어쩔 줄 몰라하며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더 먼 곳을 쳐다보니 어머니에게 시달리는 아버지마저 보였다. 에리히와 세라는 논할 것도 없고, 옆에 있던 집사장은 복도 저 너머로 도망쳤다.
절망스럽다. 이 지옥에 내 편은 없다.
‘너무 허술했어.’
그리고 상황이 이 지경이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진실을 숨기기 위해서는 보다 치밀한 계획이 필요했다고.
만약 나 혼자 은폐를 시도했으면 신경 쓸 것이 적었겠지만, 이 은폐는 나와 아버지의 합동 작전이었다. 그랬으면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들켰다는 사실을 오늘 알 정도로 소통이 적었으니, 이런 참사가 터지는 건 당연한 일.
안일했다. 나나 아버지나 상대와 협동하며 일을 진행한 경험이 드물다. 그나마 있다고 해도 하급자가 맞춰주는 것에 익숙하지, 대등한 상대와의 협동 경험은 없는 것에 가깝다.이게 고위직의 부작용인가?
“…죄송합니다.”
결국 사방에서 몰아치는 공격에 허리를 숙이며 항복 선언을 했다.
나는 죄인입니다. 부인들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처절한 항복 선언에 즉석 청문회는 무난히 마무리되었다.
부상을 함구하려고 했다는 것이, 그런 주제에 뻔뻔히 ‘얼굴 보고 말하려고 미뤄둔 거예요.’ 같은 말로 블러핑을 친 것이 괘씸해서 추궁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사실대로 말하기는 했으니까. 과정에 문제가 많았던 거지 결과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기에 연인들도 한숨과 함께 다시 어머니 곁으로 물러났다.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가 들켰으면 칼/크/라/시/우/스가 될 일이었지만 살아남은 거다.
‘다행이다.’
진심으로 안도했다. 조금만 잘못된 선택을 했더라면 베아트릭스의 썬더볼트에 지져졌을 테니.
“미안하다.”
그리고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아버지가 착잡한 목소리로 입을 여셨다.
“괜찮습니다. 저도 잘한 건 없는데요.”
그 말에 슬쩍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잠깐이라도 원망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상황이 끝나고 나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연인들에게 일방적으로 털리는 것처럼 아버지도 어머니에게 약한 거겠지. 내 미래를 보고 탓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게다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들키는 건 나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다. 어머니, 생각보다 독자적 정보망이 엄청나시구나. 내가 다친 건 나름 군사 기밀인데 어떻게 아신 건지.
“…숨길 일이 생기지 않는 게 최선이지만, 앞으로는 무슨 일이든 그냥 말하는 게 좋겠구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슴 절절해지는 제안에 망설임 없이 수긍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어머니의 정보망과 공작이 포함된 여섯 연인들의 정보망.도저히 그 정보망을 뚫고 비밀을 유지할 자신이 없다. 그게 가능하면 내가 정보부장했지.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아버지는 품에서 통신구를 꺼내시더니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 통신구가 짧게 진동했다.
“너도 알아두거라.”
“예?”
무슨 말인가 싶어 통신구를 꺼내자 아버지가 문자를 보내셨다. 아니, 바로 코앞에 있는데 왜 굳이 문자를.
‘뭐야 이거.’
내용도 난해했다. 다른 글자 없이 텔레포트 좌표만 짧게 적혀있었다.
“제도 인근에 있는 호수다. 경치도 좋고 물도 맑아 낚시를 하기 딱이지. 의원들 정도만 들르는 곳이니 눈치 볼 필요도 없다.”
그런 의문을 읽으신 듯 빠르게 설명을 덧붙이셨다. 제도 근처라 접근성이 좋다, 경치도 좋아서 한숨 돌리기도 좋다, 제국의회 의원들 정도만 방문하는 곳이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것 없다 등. 뭔가 그럴듯한 이점을 설명하셨지만 요약하면 간단하다.
도피처다. 아버지를 비롯한 의원들이 무슨 일이 생기면 도망가는 곳이다.
‘낚시.’
본능적으로 아버지의 신발에 시선이 갔다.
그러고 보니 올해 초였나. 아버지가 낚시에 가있느라 영지에 방문한 나와 연인들을 맞이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비록 업무 문제라 어쩔 수 없었다지만 어머니에게 구박을 받았던 사건, 심지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은 사건.
과연. 나름 역사와 전통이 깊은 도피처였나.
“일단 낚시부터 배워야겠군요.”
“내가 알려주면 되니 걱정은 하지 말거라. 시간이 맞을 때 같이 가면 되겠지.”
조금 무서운 말이다. 나와 아버지가 휴식 중이라 시간이 맞는 게 먼저일지, 둘 다 쫓겨나서 강제로 만나는 게 먼저일지 모르겠다.
후자면 눈물이 나올 것 같다.
***
빌리와 칼의 무사 귀환을 기념하는 연회는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다른 가문에 초대장만 보내지 않았을 뿐, 그 규모는 근래 크라시우스 가문에서 준비한 어떠한 연회보다 컸다.
정작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은 적었지만 괜찮다. 가족을 위한 연회니 가족들만 참석하면 충분하고, 크라시우스를 위해 헌신한 사용인들도 교대로 연회를 즐기라고 말해뒀으니까.
물론 아무리 참여자가 적은 연회라도 연회는 연회. 연회를 준비한 안주인으로서 얼마 안 되는 참석자들을 살피고 편의를 제공할 필요가 있었으나─한쪽에서 수군거리는 빌리와 칼을 보니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친해진 건 다행이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감정이 솟구쳤다. 거짓말로도 좋은 관계라고 할 수 없던 부자가 마침내 평범한 부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빌리가 더욱 살갑게 다가간 것인지, 칼이 못난 우리에게 마음을 열어준 것인지는 모르지만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둘의 사이가 친해지며, 둘의 관계가 평범한 부자가 되며 기묘한 단점도 부각되었다.
‘혈육은 혈육이구나.’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다소 무뚝뚝한 성격처럼 칼이 빌리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요소는 많았다.
그리고 이제는 이상한 곳에서 허술한 빌리의 단점도 칼에게서 보였다.
‘그런 건 닮지 않아도 되는데.’
빌리도 빌리지만 칼도 허술하다. 둘이 단합해서 무언가 숨기려고 했다면 제대로 숨겨야지, 서로 다른 얘기를 하면 어쩌란 말인가.
‘너무 닮았어.’
허나 쓴웃음은 어느새 자연스러운 미소로 변했다.이전까지는 칼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해서 몰랐던 칼의 성격. 이제 그 성격을 알게 되었다는 건 칼의 온전한 모습과 마주하고 있다는 거겠지.
역시 오늘은 기쁜 날이다. 도중에 아주 작은 소란이 있기는 했지만 이런 기분이라면 웃어 넘길 수 있다.
“니아.”
그렇게 빌리와 칼이 뭉쳐있는 것을 지켜보는 사이, 라우라가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혼자서 뭐해? 며느리들이랑 얘기 좀 하지.”
“아까 충분히 했으니 괜찮아. 너무 과하게 하면 부담스러워하겠지.”
그 말에 라우라는 무언가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자신이 막 결혼하던 때를 생각한 게 아닐까? 시어머니와 친해지고 싶으면서도, 아직은 어색한 것이 그 시기의 며느리들이니까.
“그러는 너도 세라는 오랜만에 보는 걸 텐데.”
그런 라우라에게 ‘너는 왜 딸을 두고 여기 있느냐.’ 고 역으로 질문을 하자 라우라는 픽 웃음을 흘리며 한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더욱 짙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저 사이에 끼면 원망 받을 게 뻔해.”
라우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디저트를 먹으며 웃고 있는 에리히와 세라. 만약 저 사이에 라우라가 낀다면 한동안 세라의 원망을 받을 거다.
“이제 에리히만 짝을 찾으면 좋을 텐데.”
“칼도 이제야 결혼하니 조급해하지 말자.”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려다 위화감이 들어 라우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세라가 에리히에게 마음이 있는 걸 아는 라우라가 저렇게 느긋한 반응을 보일 수는 없는데.
의아함을 담은 눈빛에 라우라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에리히는 모르는 것 같아.”
“아.”
서둘러도 방법이 없다는 말에 탄식이 나오고 말았다.
‘도대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도, 장남도, 차남도 어딘가 이상하다.분명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하지 않은 자랑스러운 가족이거늘, 이상하게 어딘가 결점이 있다.
‘아카데미에 있어서 다행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세라가 아카데미에 있어서 다행이라고.만약 에리히와 세라의 물리적 거리마저 멀었다면 가망이 없었을지도 모른다.설마 세라도 그걸 알고 무리해서 아카데미에 입학한 건가?
그럴듯한 가설이다. 처음 세라가 아카데미에 입학한다고 했을 때는 걱정이 컸는데, 미래를 위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하니 대견하다.
그와 반대로 에리히의 눈치에 대해서는 착잡함만 몰려왔다.
‘크라시우스는 대체.’
제발 이 결점이 후대로 이어지지는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