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89)
로판 속 공무원 389화(390/451)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황태자가 농담을 하는 것이면 좋겠지만, 저 새끼는 나에게 농담을 하는 것보다 엿을 먹이는 것에 특화된 놈이다. 내가 저 말이 농담이기를 바란다는 건 그만큼 진담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 기가 막힌 일이다.
게다가 황태자비도 있는 자리에서 자기 딸의 대부를 장난삼아 언급할 리가 없다. 황태자의 인성은 믿지 못하지만 황태자비는 믿으니까.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황제가 황실의 뜻이라고 했잖아. 절대 농담일 수가 없다.
“전하. 소신의 충성을 높게 평가해 주시는 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오나, 대부는 너무나 과분한 영광입니다.”
그렇기에 빠르게 고개를 숙이며 온몸으로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그래, 너무 과분하다. 일개 백작이자 부장 나부랭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명예다.
심지어 나는 아직 아이를 보기는커녕 결혼도 하기 전이다. 신부보다 대녀를 먼저 보라고? 안 될 건 없지만 느낌이 너무 이상하잖아.
“그러니 부디 말씀을 거두어주소서. 고귀하신 황손께 소신 같은 부족한 대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머리가 바닥에 닿을 기세로 허리를 숙였다. 황제가 갈망하고 황태자가 기뻐하는 황실의 보물, 차차기 제국의 주인이 99% 확정된 정통성의 상징.
그런 존재의 대부가 되는 건 현직 공작이나 장관급 공무원 정도는 되어야 한다. 아직 20대 초반인 새파란 귀족이 욕심을 내서도,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되는 이름이다.
“실로 겸손하군.”
‘개새끼가.’
그러나 평온한 황태자의 목소리에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다. 짐승 새끼인 너는 모르겠지만 이건 겸손이 아니라 자기 객관화라고 하는 거다.
“고개를 들게, 감찰부장. 황실은 경의 생각보다도 경을 신뢰하고 있네.”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황태자는 아직도 허리를 숙이고 있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이대로 황태자의 턱에 주먹을 꽂으면 대부는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역적이라는 타이틀을 대신 받을 것 같아 참았다.
“경이 황실에 보인 충성은 제국이 제국으로 군림할 수 있게 했지. 300년에 이르는 크라시우스 가문의 공로도 황실의 기둥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황송하옵─”
“그러니 경일세. 경과 크라시우스 가문이 걸어온 길, 그동안 쌓아온 기둥. 그것이 경이 황손의 대부여야 하는 증거야.”
그 말에 슬쩍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상사와 조금이라도 투닥인 경험이 있다면 본능적으로 깨닫는 게 있다. 이 세상에는 강하게 거절하면 물릴 수 있는 명령과, 무슨 말로도 피할 수 없는 명령이 있다는 것.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후자다. 누가 들어도 후자다.
‘망할.’
황태자가 저렇게까지 말했는데 거절한다면 ‘네가 나랑 우리 가문 잘못 본 듯.’ 이라고 돌려 까는 수준이 된다. 더 나아가 그동안의 충성을 부정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솔직히 나 개인의 문제라면 마지막까지 발버둥 쳤겠지만, 가문까지 엮어서 저런다면 더 이상 발악할 수도 없다.
“…소신이 황실의 과분한 신뢰에 부응하지 못할 것 같아 두렵나이다.”
결국 항복 선언을 했다. 직접적으로 수락하는 말은 아니었으나 더 이상 물려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황태자라면 충분히 이 차이를 인식할 수 있을 터.
“걱정 말게. 경의 충성이 변하지 않는 한, 황실이 먼저 신뢰를 거두는 일은 없을 테니.”
“황송하옵나이다.”
근래 본 미소 중 가장 밝은 미소를 짓는 황태자를 보니 확실히 인식한 모양이다.
시발…
***
그 짧은 사이에 초췌한 얼굴로 변한 감찰부장을 보니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볼 때마다 새롭군.’
감찰부장을 볼 때마다 다른 세계에서 살다 온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어찌 고위 귀족이자 고위 관료인 자가 이렇게 욕심이 없고 권력을 피하려는지 모르겠다.
물론 사람의 성향이라는 것은 실로 다채롭기에 욕심 없고 청렴한 귀족도 간혹 눈에 보이나, 감찰부장은 그 범위를 벗어난 기묘한 존재.
‘정말 욕심이 없는 자들은 관직에 나오지도 않지.’
부, 명예, 권력, 혹은 긍지나 사명감. 그러한 것들에 대해 욕구를 가진 자들은 관직에 오르고, 욕심 없는 자들은 평온한 삶을 보낸다.
그러나 감찰부장은 관직에 올랐다. 비록 출사 자체에는 현 타일글레헨 백작의 영향이 있었고,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수시로 사직서를 내기도 했지만─ 아무튼 무언가에 욕심을 가지고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 아닌가.
그런 주제에 욕심을 채울 수 있는 가장 빠른 수단인 권력과 총애를 주면 기겁하며 피하기 바쁘다. 보는 입장에서는 유쾌할 따름이다.
‘그래서 믿을 수 있지만.’
감찰부장의 말처럼 황손, 그것도 내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를 계승자의 대부가 되는 건 고귀하고 명예로운 일이다. 일개 백작이나 부장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다.
허나 감찰부장은 평범한 백작, 부장이 아니다. 황실이 믿을 수 있는 제국백 가문의 후계자이며, 장관이 되는 것이 확실한 인재. 심지어 혈연으로 여러 공작가와 얽힌 거물이다. 그런 거물이 황손의 대부가 된다면 황손의 권위와 앞날이 평온해질 터.
대신 감찰부장도 황손의 후견자라는 권위를 내세울 수 있지만, 그런 권위를 내세워 소란을 부릴 자라면 진작 그랬을 것이다. 이제 와서 사욕을 부릴 리는 없지.
‘대부를 위해 태어난 사람.’
순간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대부라는 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하지 않을 중신, 혈연으로 얽힌 공작가가 셋이라 유사시 황손을 지지할 공작가도 셋.
이건 대제께서 황실을 위해 내린 인물이다. 중용하지 않으면 대제께 무례를 저지르는 것이 아닐까?
“어떻습니까, 감찰부장. 아주 예쁜 아이지요?”
“예, 비 전하. 실로 황태자 전하와 비 전하 사이에서 태어난 분답습니다.”
그 와중에 비의 손에 이끌려 황손의 침대로 간 감찰부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내 눈에만 예쁘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혈연이 아닌 감찰부장 눈에도 천사 같은 아이임이 분명하다.
‘혈연이라.’
감찰부장의 뒷모습을 보다가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지금은 황손과 감찰부장이 남남이지만, 언젠가는 혈연처럼 가까운 관계가 되리라. 은근히 정에 약한 감찰부장이니 대녀인 황손을 정성을 다해 보살필 것이고, 황손도 그런 대부를 신뢰하겠지.
그렇다면 남들이 보기에 황손과 감찰부장은 매우 돈독한 관계로 보일 것이다.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군신이 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감찰부장은 황손을 외면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할 정도로.
‘대부를 버리는 대녀는 있을 수 없다.’
당연히 그 반대도 마찬가지.
그렇기에 우리 부부가 불의의 사고로 요절하더라도, 사특한 마음을 품는 자가 나오더라도 감찰부장은 영원히 황손을 지키는 방패가 될 것이다. 감찰부장을 부추겨 소란을 일으키려는 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아비로서 소중한 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
졸지에 황손의 대부 내정자가 된 다음날, 황제는 이번 주말에 황태손 임명식이 있을 것이라 선포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황태손으로 임명하는 건 과한 행동 같으나, 황제의 양위가 임박한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행동이다. 이미 양위 준비가 끝난 상황에서 년 단위로 미루는 건 골치 아픈 일이겠지.
그렇기에 황태손 임명식과 함께 황손의 이름 발표, 세례, 대부 발표가 동시에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정말 알찬 행사가 아닐 수 없다.
‘…대부.’
아직도 씁쓸하다. 결혼도 하지 않은 솔로가 대녀를 먼저 두게 생겼네.
그리고 조용히 손에 든 통신구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에 황태자가 보낸 문자가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 황손의 이름은 샤를로테로 정했다네. 부황 폐하께서 직접 정하신 이름이지. 감찰부장도 대부로서 미리 알 자격은 충분하니 알려주는 것일세. ]문자에 담긴 내용은 짧지만 굵었다. 대부가 대녀의 이름을 몰라서는 안 된다며 미리 문자로 보내주더라.
아니, 그런데 나 아직 정식 대부는 아니잖아. 정식과 내정자는 다른 문제라고.
‘망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웠다. 이제 돌이킬 수 없으니 그냥 황태손 임명식까지 숙소에나 처박혀있자. 괜히 밖을 돌아다니면 속만 타들어갈 것 같─
“아.”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침대에 눕기 무섭게 통신구가 반짝였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황실을 상징하는 보랏빛이 아니라는 것. 만약 별거 아닌 연락이면 바로 끊어버려야지.
“감찰부장입니─”
– 칼 군. 나일세.
연락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전승공 연락이면 어쩔 수 없지.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각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 물론일세. 최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
진심 가득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확실히 전승공 입장에서는 최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거다.북방을 정복한 사령관이라는 명예, 하나뿐인 딸이 낳은 외손녀. 이런 이벤트를 연달아 겪으면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도 웃게 될 테니.
“경하드립니다. 각하의 노고에 에넨께서도 감동하셨는지 연이어 홍복을 내리시는군요.”
– 이 늙은이가 고생한 것이 뭐 그리 대수라고 그러는가. 오히려 태자 전하와 비 전하의 기도가 에넨께 닿은 것이겠지.
웃음을 터뜨리는 전승공에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줬다. 원래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는 법이라고 하지 않나.
그렇게 한참이나 말하던 전승공은 뒤늦게 일방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작게 헛기침을 했다.
– 이런, 너무 내가 할 말만 했군.
“아닙니다, 각하. 각하의 경사는 제 경사나 다름 없지 않습니까?”
– 하하, 말이라도 고맙네.
내 대답에 더 민망한 듯 웃음을 흘리던 전승공이었으나, 금방 표정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 사실 칼 군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연락했다네.
“저에게 말입니까?”
그 말에 잠깐 기억을 되짚었다. 전승공에게 감사를 받을 일이 있었나?
– 칼 군이 대부가 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맞나?
‘아.’
납득했다. 대부 발표는 황태손 임명식 때 할 예정이지만, 전승공은 황손의 외조부로서 미리 들은 모양이다.
– 그 소식을 들으니 너무 기쁘더군. 황손께 든든한 후견자가 생긴 것도 그렇지만, 나와 칼 군이 건너건너 가족이 된 셈이 아닌가.
“…예, 그도 그렇군요.”
전승공의 말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전승공이 가족이라고 말하니 감회가 새롭다.
– 외손녀의 대부니 나한테는 아들이나 다름 없지.
외손녀니 아들보다는 사위에 가깝지 않겠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한 말로 전승공의 기쁨을 깨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황태자 이 새끼.’
넌 진짜 장인 어른 잘 둔 줄 알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