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90)
로판 속 공무원 390화(391/451)
마르가 직접 타준 차를 마시며 속을 가라앉혔다. 내일 있을 황태손 임명식에 대한 긴장감이 조금은 사라지는 기분이다.
“축하해요, 칼. 내일이면 황손 전하의 대부가 되겠네요.”
정작 마르의 언급 덕분에 다시 긴장감이 솟구치는 건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과분한 명예입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칼을 높게 평가하신다는 의미기도 하죠.”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마르는 싱글벙글이라는 단어의 표본이나 다름없는 얼굴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저렇게 좋을까.’
착잡함과 별개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대부 발표는 황태손 임명식 때 한다고 하니 그때까지 함구하려고 했으나, 가족과 연인들에게는 살짝 귀띔을 해줬다. 다들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니 비밀이 새어 나갈 일도 없으니까.
실제로 다들 축하해 줬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황제의 공식적인 발표가 있기 전에 황족에 관한 이야기를 동네방네 떠든다? 그게 무례한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아는 사람들이다.
다만 마르는 조금 달랐다.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 건 아니지만 가장 극렬한 반응을 보였다.
‘가장 사교계에 민감한 사람이기도 하고.’
사교에는 큰 관심이 없는 가족들, 인간관계에 초탈한 베아트릭스, 아직 순박한 레이디라 모르는 게 많은 루이제와 이리나, 아무래도 좋은 에르제베트, 그저 축하하기 바쁜 페넬리아.
이 기적 같은 라인업 속에서 마르는 거의 유일하게 사교계에 능통하고, ‘차차기 황제가 유력한 황손의 대부’ 라는 타이틀이 사교계에 끼칠 영향을 빠르게 계산한 사람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기뻐할 수밖에.
사실 마르 같은 반응이 정상이기는 하다. 황손의 대부라는 타이틀이 가질 위상과 권한은 막강하니, 연인이 대부가 된다고 하면 어떠한 축하도 과하지 않다.
당사자인 내가 하기 싫다는 게 치명적인 문제일 뿐.
“에르제베트 언니가 태자비 전하와 친밀한 관계기는 하지만, 칼이 황손의 대부가 된다면 황실과 더욱 가까워지겠죠. 그건 우리 아이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럴 겁니다. 그분들이 대부의 가족을 홀대하실 일은 없겠지요.”
그러나 내 명예뿐만 아니라 자식들의 안위를 논하는 마르를 보면 차마 싫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내가 대부가 되면 훗날 태어날 자식들에게도 좋은 일이다. 황손의 대부가 황실과 반목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그 반대도 마찬가지니까. 정말 어지간한 대형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숙청과 의심의 칼날이 자식들에게 날아올 일은 없을 터.
솔직히 조금 걱정되기는 했다. 건드리기 애매한 공신이 늙어 죽은 이후, 그 자식들이 군주에게 두들겨 맞는 건 역사적으로 드문 일이 아니었지.
‘내가 생각해도 미친 조합이기는 해.’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니지만 혈연으로 얽힌 공작가만 셋에 후작가, 백작가, 남작가도 골고루 있다. 황실 입장에서는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신경 쓰일 조합 아닌가.
그렇기에 대부가 된 것은 좋은 일이다. 자식들의 안전을 황실이 보장한 것이니 실로 기쁜 일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될 대부인데 행복 회로라도 돌리면서 되자.
황태손 임명식 장소는 신년하례식 당시, 황제가 신년사를 행했던 곳으로 결정됐다. 어떻게든 황손에게 정통성과 권위를 주려는 황제의 정성이 느껴졌다.
심지어 영지에서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공작들도 전부 끌려 왔─ 아니, 참석한다고 한다. 비록 신년하례식처럼 모든 작위 귀족들이 모이는 건 아니나, 다섯 공작 전원이 모이는 거면 임명식에 무게감을 주기 충분하다. 막말로 백작 열, 스물보다 공작 하나가 귀한 것이 제국이니.
그렇게 공작을 비롯한 고위 귀족들과 고위 공무원들이 하나둘 집결하는 사이, 나도 나름의 준비를 위해 황궁으로 향했다.
“황손께 인사드립니다. 영광스럽게도 전하의 대부가 될 칼 크라시우스 오브 위리디아라고 합니다.”
준비라고 해봤자 태어난 지 이제 1주가 될까 말까 한 아기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지만.
태자비의 품에 안겨 눈을 감고 있던 황손은 내 인사에 스르르 눈을 떴다. 떴다고 해봤자 눈동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실눈이지만 아무튼 떴다.
“황손도 대부가 반가운 모양입니다.”
“실로 영광입니다.”
물론 막 태어난 아기에게 대답을 원하고 한 인사는 아니니, 태자비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낯선 사람을 보고 울지는 않아서 다행이─
“아─”
?
‘뭐야.’
누가 낸 소리야.
난데없는 소음에 당황했지만 황손을 안고 있던 태자비는 더욱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품 안의 황손을 쳐다봤다.
…설마 쟤야?
“벌써 옹알이를 하시는 겁니까?”
“그, 그런 것 같군요.”
“아─”
태자비의 대답에 호응하듯 황손은 다시 작게 옹알이를 했다. 제대로 글자를 만들지 못하고 입안에서 맴돌던 바람이 빠져나오는 듯한 소리지만, 황손이 낸 소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생후 1주 만에 옹알이를 하기도 하나? 그냥 이 세계 사람들은 뭔가 다른 건가?
“대부를 반기려고 말도 하다니, 기특하기도 하지.”
어느새 애정 가득한 눈으로 조심스레 황손의 볼을 쓰다듬는 태자비를 보니 이게 이 세계 평균인 것 같다.하긴, 마나랑 신성력도 있는 세상인데 옹알이쯤이야 별거 아니겠지. 황손이 당장 기어다닌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그리고 뒤늦게 온 황태자는 황손이 옹알이를 했다는 말을 듣고 흥분했으나, 황손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는 황태자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
단상 위에서 귀족들을 내려다봤다. 익숙한 광경이지만 오늘은 평소와 다른 고양감에 휩싸였다.
‘마침내.’
마침내 이날이 왔다. 방계라는 족쇄를 평생 달고 살아야 했던 나와 달리, 서자라는 약점이 있는 태자와 달리─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황실에 태어났다.
실로 모든 걸 이루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어둠을 묵묵히 걸어나간 끝에 빛에 도달했다. 인간 코르부스의 모든 걸 버리고, 황제 에이만카 16세로서 황실과 제국의 부흥을 이루었다.
‘길었지.’
그래, 긴 세월이었다. 수백 년 같은 수십 년의 세월이었다. 우둔한 황제들이 망친 제국과 무너진 황실의 권위를 볼 때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으나 끝내 이겨냈다.
…이제 나의 역할도 끝났다. 이 자리에서 황태손을 임명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룬 것이다.
“경들은 들으라.”
그렇기에 당당히 입을 열었다. 이는 내가 황제로서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니.
“대제의 이름을 이어 번영하던 황실은어느 순간 길을 잃었고, 천명과 민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였으니 대제께서 통탄하실 일이었다.”
황실의 실책과 무능을 인정하는 발언에 귀족들이 동요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실책과 무능을 홀로 짊어지며 나아간 나에게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위대하신 선조들께서도 인정하실 거다.
“허나 뭇 귀족들과 신민들이 리브노만에 대한 공경을 거두지 아니하였으니, 황실은 다시금 일어나 오늘날의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
리브노만의 직계가 끊어지자 귀족들은 다른 황실을 세우는 것이 아닌 방계를 찾았다. 그 결과 다시금 리브노만의 제국이 부흥하였으니, 실로 천명이 리브노만에 미소 짓고 있음일 터.
“이에 대제께서 다시금 기뻐하시니, 리브노만에 큰 복을 내리셨다.”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뒤로 돌리자 황손을 품에 안은 태자비가 앞으로 나왔다.
황손을 안는 건 시녀들에게 맡겨도 되거늘 반드시 자신이 하겠다며 고집을 부렸지. 허나 이 역시 황손이 황실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외가인 뉘렌 공작가가 강력히 지지할 것을 보이는 것이기에 그리하라고 했다.
“대제께서 보우하심에 황손이 태어났다. 이는 황실의 번영을 증명하는 것이니, 짐은 황손의 이름을 초대 황후의 존함을 따 샤를로테라 지을 것이다.”
대제의 아내이자 황실의 안주인으로서 번영을 이끈 주역. 그 영광스러운 이름은 실로 황손에게 물려주기 마땅하다.
그리고 이 아이를 기점으로 황실은 대제 시절의 영광을 다시금 이룩하리라.
내가 이룬 영광보다 더욱 위대한 영광을.
더욱 찬란한 영광을.
***
황손의 이름을 발표한 후로는 아우스엔 대교구장인 리시우코 추기경의 세례가 있었다.
제국에 있는 여명 교단의 사제 중 가장 최고위 인사가 행하는 세례. 이로서 황손에게는 종교적 권위도 깃들게 되었다. 추기경의 세례를 받은 황손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추기경─ 더 나아가 추기경을 임명한 교황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 된다.
“─에넨의 가호와 대제의 보우 아래, 유일한 황손인 샤를로테 리브노만을 황태손으로 책봉한다.”
그리고 황제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다는 듯 빠르게 황태손 책봉까지 마쳤다.
“제국 만세! 리브노만 만세!”
“대제시여, 황태손 전하를 보우하소서!”
생후 1주 아기가 황태손이 되는 희대의 광경에 놀랄 법도 하나, 귀족들의 만세는 즉각적이었다.아마 황제가 다섯 공작 전원을 동원한 순간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했겠지.
아니, 사실 황제의 양위가 임박한 것을 생각하면 공작이 불참했어도 강행했을 거다. 그만큼 황태손-황태녀-황제 루트는 황손-황태녀-황제 루트보다 우월한 법이니.
“황태손 전하께 광명 있으라!”
그렇게 끝없이 울려 퍼지는 만세 소리 속에서 황태손은 조용히 꼼지락거렸다.
‘마법이 좋긴 좋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보는 성인들이 우렁차게 만세를 외친다? 어떤 아기라도 기겁하며 울음을 터뜨리기 충분하지만, 황태손 임명식에서 황태손이 우는 건 너무 난감한 일이다. 귀족들은 졸지에 황태손을 울린 역적이 되는 거고.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황태손에게 소음 차단 마법을 걸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차단을 하면 그건 그거대로 황태손을 울릴 수 있으니, 아무리 큰 소리라도 일상 소음 정도로 들리는 마법을.
‘자는 건가?’
다만 마법의 효과가 너무 좋아서 이 난리 속에서도 잠에 든 것 같았다.
“뭇 충성스럽고 유능한 신하들의 축복 속에서 황손은 황태손이 되었다. 이는 황태손의 복일지라.”
아무튼 만세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자 황제가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그렇기에 짐은 황태손의 세례를 지켜 본 경들 중 한 명을 뽑아 황태손의 대부로 삼고자 한다.”
그 말을 신호로 하여 황태자비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품에 안은 황태손을 조심스레 건넸다.
‘와.’
황태손을 안자마자 무수히 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에도 물리력이 있었다면 내 몸 따위야 갈기갈기 찢겼을 정도로.
“감찰부장, 칼 크라시우스 오브 위리디아를 황태손의 대부로 삼을 것이다.”
그 뒤로 나를 대부로 삼은 이유를 길게 설명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들리지 않는다. 아마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대부가 된 이유가 뭐가 중요해. 대부가 됐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아─”
그 와중에 황태손이 다시 옹알이를 시작했다.
저 옹알이가 잘 부탁한다는 인사로 들린다면 기분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