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93)
로판 속 공무원 393화(394/451)
제국의 신분은 황족, 귀족, 평민으로 나뉜다. 평민보다 아래는 신분보다 재산에 가까운 느낌이니 넘어가자.
그리고 귀족 중에서도 작위 귀족과 일반 귀족의 차이는 제법 크다. 아무리 고위 귀족의 자제라도 작위를 소유한 자에게는 그만한 존중과 경의를 보내야 할 정도로. 물론 일개 남작보다 공작의 자제가 더 강하다는 건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알지만, 아무튼 명목상으로는 작위 귀족이 더 우위다.
즉 작위는 귀족 사회의 부, 명예, 권력을 상징하는 요소다. 작위가 없는 자라면 대부분 갈망하는 보물이다.
‘작위 계승…?’
하지만 나는 대부분이 아닌 소수에 속하는 놈이다. 작위 같은 건 원하지 않는다.
‘나한테?’
떨리는 눈으로 아버지의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애석하게도 확실히 ‘작위 계승식’이라고 적혀 있다.
납득할 수 없다. 아버지가 70대 정도면 모르겠지만, 아직 40대의 창창한 나이시다. 활력과 노련함을 동시에 갖추기 시작한 전성기의 연령대나 다름없다.아니, 애초에 황제가 작위 계승 같은 걸 허락할 리가 없는데?
그렇기에 황급히 아버지에게 연락을 보냈다. 이건 내 상식과 정보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야 한다.
‘제발.’
동시에 간절함을 담아 기도했다. 얼마 전에 백작위를 받았고, 지금은 장관 내정자가 된 상황이다. 이 상황에 제국백까지 얹어지면 심적 부담이 너무 늘어난다.
– 칼?
오늘 하루에만 스팸 수준으로 기도를 보낸 덕분인지, 아버지는 금방 연락을 받으셨다. 의회 업무 때문에 못 받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갑자기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혹시 제가 방해라도─”
– 아니, 괜찮다. 마침 쉬고 있었다.
살며시 고개를 젓는 아버지의 표정은 상당히 복잡미묘했다. 일이 끊긴 것에 대한 당혹감, 혹은 아들이 연락한 것에 대한 반가움. 어느 쪽도 아닌 기묘한 감정이 담긴 표정이었다.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작위 양도 조짐이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가 일방적인 계승 통보를 한 것도 그렇고, 황제가 고작 40대인 아버지의 은퇴를 허락한 것도 의아하다.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니 미칠 노릇이지.
– 묻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이구나.
그 심정이 얼굴에도 드러났는지 아버지가 먼저 운을 떼셨다.
“…예, 조금 당황스러워서 말입니다.”
– 이해한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
솔직한 대답에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공감해 주는 자세는 감사할 따름이지만, 저렇게 공감할 수 있는 분이 문제를 일으키─
– 어제 폐하께서 은퇴를 권하셨다.
?
– 나뿐만 아니라 기벨트 백작도 은퇴할 예정이고, 바르돈 백작도 의장 인수인계를 마치면 물러난다고 하더구나.
그 말을 듣자마자 눈치챘다.
‘망할.’
이거 가지치기다.
작년, 정정하기 그지없던 전대 호르펠트 백작이 갑자기 은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만약 정상적인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것이면 그러려니 할 텐데, 전대 호르펠트 백작은 이번 전쟁 때 종군했을 정도로 튼튼한 무인이다.
때문에 전대 호르펠트 백작의 은퇴는 의아함과 부러움 속에서 이루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양반이 은퇴할 이유는 없으나, 아무튼 안락한 은퇴 생활을 즐기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를 비롯해서 두 의원의 은퇴가 확정된 지금. 드디어 전대 호르펠트 백작의 은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공신 정리.’
방계부터 시작해서 수십 년을 정치판에서 구른 황제는 제국백들을 쉽게 다루었다. 애초에 황권이 나락으로 가면 황실과 운명 공동체인 제국백들도 곤란해서 열심히 협조하기도 했고.
그렇게 황제를 보필하며 국정을 이끌어 간 제국백들은 황제 입장에서 실로 든든한 지지기반이지만, 곧 양위 받을 황태자를 생각하면 가만히 두기 애매한 존재기도 하다. 선대의 공신이 후대의 걸림돌이 되는 건 흔한 일이니까.
그 결과가 이거다. 자신을 보필한 제국백들이 후대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으니, 그 가능성을 없애버린 거다.
대신 피가 흐르는 숙청이 아닌 서로에게 좋을 평화적이고 명예로운 방식으로.
‘작년부터 쌓은 빌드업이었네.’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 아버지, 은퇴 전 호르펠트 백작, 바르돈 백작은 제국백 중에서도 상위권에 위치한 존재였다. 나이도 40대라는 무게감 있는 중역들이었고.
그런 상위권 3인방이 2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전부 은퇴하게 생겼다. 늙은 제국백은 어차피 황태자가 즉위한 후에 저절로 사라질 테고, 젊은 제국백은 황태자의 역량으로도 커버가 가능할 테니 딱 40대이자 권력이 큰 셋을 타깃으로 잡은 거다.
최연장자인 기벨트 백작이 낀 건 뭐… 너무 중년만 은퇴시키면 노인이 서러워할 테니 예의상 넣은 거겠지.
‘…이건 못 막는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해탈하고 말았다. 이건─ 아니, 이것도 감찰성 장관 자리처럼 내 역량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황제가 후계를 위해 공신을 정리하는 것인데, 이 행보를 막아서는 건 황제의 의심병이 폭발할 수 있다.
사실 황제까지 갈 것도 없이 은퇴 당사자들한테 멱살이 잡힐 거다. 네가 뭔데 내 은퇴를 방해하냐고. 특히 기벨트 백작은 넌 애비애미도 없냐며 광분할 가능성이 높다. 그 양반은 지금 은퇴 못 하면 진짜 일하다가 죽을 수도 있어.
‘아는 만큼 보이는구나.’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아까와 다를 거 없는 아버지의 표정 속에서 희미한 기쁨이 보이는 것 같다.
기뻐할 일이기는 하다. 아버지가 무작정 아들에게 짬을 때린 것도 아니고, 본인은 평범하게 일을 하려다 황제의 권유로 명예롭게 물러나는 상황 아닌가. 그나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난데없이 작위를 받게 생긴 아들 걱정일 텐데─
“폐하께서 아버지의 헌신에 감동하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편히 쉬라는 배려시겠지요.”
– 과분한 배려라 민망할 정도구나.
그 아들이 깜짝 작위 계승을 수긍하는 듯한 발언을 내뱉었기에 아버지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래, 난 이미 글렀지만 아버지라도 행복하셔야지.
– 아, 의원직은 에리히가 졸업하기 전까지 내가 유지하도록 하마.
“예,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배려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백이 다른 부서의 고위직이면 혈육이 대리로 의원직을 맡아야 하는데, 에리히는 현재 아카데미 학생이다.
물론 아카데미를 자퇴하고 의원이 되는 방법이 있지만 에리히는 타국 왕족들과 절친이지 않나. 갑자기 친구가 사라진 왕족과 차기 성자가 실의에 빠질 것을 생각하면 그냥 아버지가 대리로 맡는 게 좋다. 황제도 ‘현직’ 제국백을 견제하는 거지, 제국의회 의원 ‘대리’는 너그럽게 볼 테니.
결정적으로 에리히만큼은 졸업장을 땄으면 좋겠다.
우리 가족 중에는 미취학자가 많잖아…
***
순간 귀를 의심했다.
“빌리,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
– 조만간 감찰성이 창설될 거요. 장관은 칼이 맡을 예정이고.
아까 들은 것과 변함없는 내용에 멍하니 통신구만 바라봤다.
장관, 이라고? 칼이? 아직 22살인 그 아이가?
“그,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새로운 성을 만드는 게, 아니, 그보다 칼이 장관이 되는 게…”
– 파격적인 일이지. 아마 대륙 역사를 뒤져야 겨우 비슷한 전례를 찾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빌리의 장담에 다시 머리가 멍해졌다. 제국에서도 특이한 일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드문 일이라는 말이었으니까.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라우라를 쳐다봤다. 라우라도 이 믿기지 않는 소식에 놀란 듯 멍한 눈빛이었다.
‘이게 대체.’
정말 믿을 수 없다. 황태손의 대부가 되었다는 소식에 놀란 것이 며칠 전 일인데, 이제는 제국의 장관이 된다고 한다.
무수히 많은 관료들이 노리는 정점의 자리,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자리에 오른다고 한다.
‘…괜찮은 건가?’
불안감이 스멀스멀 가슴속에 똬리를 틀었다.
자식이 남들에게 인정받고 성공하는 것은 어미로서 기쁜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이렇게 과한 속도로 성공하면 남들의 질투를 받을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속도로 승진해도 뒷얘기가 나오는 것이 사람인데, 반드시 그럴 것이다.
만약 추악한 마음을 품은 자들이 칼을 공격하면 어쩌지? 칼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나 음해를 하면?
– 부인.
점점 번져나가는 불안을 끊은 것은 빌리의 목소리였다.
– 무얼 걱정하는지는 알겠으나, 걱정할 필요 없소. 그 아이는 부인의 생각보다 강인한 아이니.
“그래도…”
– 애초에 문제가 생길 거라면 부장이 되었을 때 생겼을 거요. 20대 장관이나 10대 부장이나 뭐 그리 다르다고.
미약한 미소를 머금은 위로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빌리가 저렇게 말한다면 맞겠지. 그저 부인들끼리의 정보 교환이 고작인 나와 달리, 빌리는 제국의회에서 행정부를 살필 수 있으니까. 정계와 관료 사회에 속한 만큼 더 많은 걸 알 테니까.
– 그러니 그 아이를 걱정하지 말고 축하해주시오.
“…알았어요, 빌리. 그렇게 할게요.”
– 이해해줘서 고맙소.
그 말에 나도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어미로서 아들의 승진에 축하─
– 아, 그리고 칼에게 작위를 물려줄 예정이오. 의원직은 당분간 내가 맡겠지만.
너무 평온하고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추고 말았다.
귀족에게 가장 중요한 작위 문제를 이리 가볍게 얘기하는 경우가 어디 있을까.
‘괜찮은 거 맞겠지?’
다시 불안해졌다. 칼이 괜찮다는 말도, 그냥 가볍게 한 말이 아닐까?
제발 그건 아니기를 바란다.
***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일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다.
“축하드립니다, 고문 선생!”
동아리실에 들어온 류티스가 그 증거다. 공무원도, 하다못해 제국인도 아닌 류티스가 축하를 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소문이 퍼진 건지.
“너도 들었냐?”
“뭐, 고문 선생에 대한 소식이면 빠르게 귀에 들어오더군요.”
언제나처럼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 류티스의 시선이 루이제에게 향했다.
납득했다. 루이제가 2차 전파자였구나. 1차 전파자는 당연히 에르제베트일 테고.
“아무튼 다시 축하드립니다. 이거 참, 역사에 남을 전례가 제 눈 앞에 있군요.”
“고맙다…”
하루 동안 수도 없이 들은 축하에 힘없이 중얼거렸다.역사에 남을 전례라는 말이 왜 이리 아프게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그 뒤로 의욕에 불타는 루이제가 축하 케이크를 만든다거나, 다른 부원들도 고막에 피가 날 정도로 축하를 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냥 웃어 넘겼다.
그래도 케이크에 촛불 22개를 꽂는 건 조금 아닌 것 같다.
오늘 내 생일 아니야. 오히려 관에 들어간 날이지.
‘망할.’
이 장관이라는 관에서 탈출하려면 과연 몇 년이나 걸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