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00)
로판 속 공무원 400화(401/451)
황궁의 심처에는 태양전이라 불리는 건물이 하나 있다. 황제의 생활 공간이기에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장소라고 할 수 있는 곳이며, 그 상징성으로 인해 신년하례식 때도 절대 개방되지 않는 성스러운 곳.
그렇기에 평소에는 오직 황제의 부름을 받은 소수의 신하만이 발을 들일 수 있으나, 지금은 백에 가까운 인원이 태양전 앞에 모여 엎드려 있었다.
“폐하! 이 제국은 폐하의 영민하신 통치 없이 나아갈 수 없나이다! 부디 뜻을 거두어주소서!”
“””뜻을 거두어주소서!”””
전승공이 선두에서 외치자 장관, 부장이라는 직함을 단 고위직들이 일제히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며 따라 외쳤다.
물론 보여주기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부장급 이상 공무원 중에는 나이가 지긋한 양반도 제법 있어서, 진심으로 대가리를 박았다가는 누군가 실려나갈지도 모른다. 애초에 황제 앞에서 감히 피를 보일 수도 없고.
“폐하! 폐하의 신민들은 아직 폐하를 원하나이다! 양위의 뜻을 거두어주소서!”
“””거두어주소서!”””
전승공에 이어 이번에는 행정부 소속 공무원 중 1위에 빛나는 장관이 외쳤다. 원래라면 재무성 장관이 아닌 궁내성 장관이 해야 할 일인데, 누구와 달리 사임하지 못한 죄로 고생 중이다.
‘목 다 쉬겠네.’
애석하게도 고생 중인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태양전 앞에서 엎드린 지 1시간이 조금 넘은 지금, 도대체 몇 번째 통촉을 외치는 건지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전승공과 장관도 할 말이 없어서 같은 문장을 돌려쓰고 있을 정도.
허나 어쩔 수 없다. 양위 선언이 진심이라는 건 여러 번 말할 필요도 없는 공공연한 사실이다만, 오히려 황제가 진심이기에 우리도 진심을 담아 뜻을 물려달라고 해야 한다. 수십 년 동안 제국을 위해 처절히 구른 황제의 마지막이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모습이면 씁쓸하지 않나.
그래, 이건 늙은 황제를 위한 신하들의 마지막 배려와 경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버티자.
‘…그래도 이왕이면 빨리 끝났으면.’
한숨이 나올 것 같다. 동아리 시간에 맞춰서 복귀해야 하는 것도 있으나, 아까부터 뒤통수가 따끔거려 미칠 것 같다. 하필 전승공 바로 뒷줄에서 장관들과 같이 엎드리고 있으니 시선이 너무 쏠린다.
망할, 나도 이렇게 앞줄에 있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냥 부장들하고 같이 섞여 있으려고 했다고.
“넌 장관 내정자 아니냐. 어떻게 보면 폐하께서 마지막으로 임명한 장관이나 마찬가지인데, 너도 장관들 하고 같이 있어야지.”
하지만 묘하게 설득력 넘치는 장관의 말에 앞줄로 끌려오게 되었다.황제가 태양전에서 나오면 바로 시야에 들어올 위치에.
그리고 바로 시야에 들어오는 주제에 젊은 놈이 너무 말끔하면 황제가 서운해 할지도 모른다.덕분에 나이 지긋한 다른 양반들에 비하면 다소 강하게 대가리를 박고 있었다. 목만 쉬는 게 아니라 대가리도 깨지게 생겼다.
실로 서글픈 일이다.
눈물의 통촉쇼가 공연 2시간 째에 도달할 무렵, 마침내 태양전에서 황제와 황태자가 나왔다.
“경들은 어찌 의무를 뒤로하고 스스로 몸을 해하는가.”
짐짓 꾸짖는 황제의 말에 선두에 있던 전승공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신하로서 폐하를 보필하는 것만큼 중한 의무는 없나이다. 헌데 소신들이 일생을 바쳐 섬겨야 할 폐하께옵서 양위의 뜻을 밝히셨으니, 미천한 소신들은 그저 그 뜻을 거두어주시기를 간청할 따름입니다.”
“경들의 충정은 알겠으나 짐의 뜻은 확고하다. 허니 이만 고개를 들라.”
“더 이상 폐하를 섬기지 못할 무능한 자들이 어찌 폐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겠나이까.”
의례적으로 이어지는 말싸움, 이윽고 동시에 고개를 숙이는 신하들의 모습에 황제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황제의 한숨에도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감정 표현을 극히 자제하는 황제가 신하들 앞에서 한숨을 보일 리 없다. 이 모든 것이 연기나 마찬가지라는 의미.
“경들은 인간 코르부스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대제의 뜻을 받든 황제 에이만카 16세를 섬기는 것이며, 이제 대제의 뜻은 태자가 받들 것이다.”
슬슬 연기를 끝내자는 발언에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황제가 끝내자는데도 귀찮게 굴면 그건 그거대로 불충이니까.
그렇게 고개를 든 신하들을 훑어본 황제는 조용히 시립해있던 태자의 머리에 자신이 쓰고 있던 황관을 씌웠다.
‘미친.’
이건 좀 당황스럽다. 아무리 양위 선언을 했어도 황태자가 공식적인 즉위를 한 것도 아닌데, 일개 후계자에게 황관을 씌우는 건 너무 과한 행동이다.
황태자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황관을 벗을 생각도 못 하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금만큼은 황태자에게 동정심을 느낄 정도다.
“대제께서 품으신 고귀한 뜻은 열네 분의 선제들을 거쳐 짐에게 닿았다. 이제 태자는 에이만카 17세로서 대제의 뜻을 받들고, 경들은 정당한 후계자인 태자를 충성으로 보필하라.”
허나 황제는 굳어버린 황태자, 동요하는 신하들 앞에 다시금 선언했다.
이제 대제의 뜻을 받들 정당한 황제는 자신이 아닌 태자라고.
“허니 경들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 다시금 모일 때는 새로운 태양을 경배하라.”
“””폐하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양위가 확정됐다.
***
무겁다. 머리에 얹힌 황관이 너무도 무겁다.
비록 즉위식 때 사용하는 정식 황관이 아닌 평소에 사용하는 약식 월계수관이지만, 끔찍할 정도로 무거운 중압감이 온몸을 누르고 있다.
‘앞으로 견뎌야 할 무게인가.’
무심코 황관에 손을 뻗을 뻔했으나 참았다. 양위가 확정된 지금, 부황과 관료들이 지켜보는 지금─ 나 스스로 황관을 벗을 수는 없다. 황제라는 이름의 무게를 버거워하고 피하려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부황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앞으로 대제의 뜻은 내가 이어야 한다. 이 제국의 정당한 주인은 내가 되어야 한다.
황실과 제국을 위해 이 무게를 견디고 나아가야 한다. 내 뒤를 이을 황태손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태자.”
“예, 부황 폐하.”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하는 관료들을 보던 부황께서 나지막하게 입을 여셨다.
“어떠한가.”
듣기에 따라 뜬금없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질문이다. 아니, 과연 질문이 맞는지조차 의문이 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 짧은 말에서 부황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무겁고 두렵지만, 피하지 않겠나이다.”
그 대답에 부황께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셨다. 무겁고 두렵다는 나약한 말에 언짢음을 표하지도, 피하지 않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시지도 않았다. 그저 여전히 관료들이 물러나는 것을 지켜보며 침묵하실 뿐이었다.
“그거면 되었다.”
한참을 침묵하신 부황께서는 그 말과 함께 다시 태양전으로 들어가셨다.
혼란스럽다. 그거면 되었다는 말은 어떤 의미로 하신 것일까. 황관의 무게를 경계하라는 의미로? 아니면 그럼에도 도망치지 말라는 의미로?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그거면 된 거겠지.’
그래, 그거면 된 거다.황관의 무게를 경계하되 피하지 않겠다 다짐한 나 자신이면, 지금의 자신이면 되는 거다.
부황께서 말씀하셨듯 앞으로 제국의 주인은 나이지 않나. 부황의 진의가 아닌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나아가야 할 때다. 이제는 그래야만 한다.
그리 다짐하며 황태자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궁내성에서 양위 준비를 할 터이니 나도 바빠지겠지.
…황관을 부황께 돌려드리기 위해 도로 태양전으로 향한 것은 다소 시간이 흐른 뒤였다.
***
교장과 함께 아카데미로 복귀한 후, 잠깐 교장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졌다.
“조만간 다시 임시 휴교를 하겠군요.”
“올해는 경사가 많은 것 같습니다.”
휴교를 언급하는 교장의 말에 적당한 말로 대답했다.
기존 황제가 물러나는 것은 슬픈 일이나,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경사다. 제국 아카데미가 그날을 기념하며 휴교를 해야 할 정도로.
“장관의 말이 맞습니다. 올해는 실로 기쁜 해로군요.”
내 대답에 교장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저 미소가 진심으로 기뻐하는 미소인지, 연달아 대형 사건이 터지는 것에 대한 해탈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높은 확률로 후자일 것 같기는 하지만.
“생전에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다시 보다니, 확실히 제가 오래 살기는 한 모양입니다.”
웃음을 터뜨리는 교장의 말에 문득 베아트릭스가 떠올랐지만 황급히 상념을 털어냈다.
베아트릭스는 혼혈이니까 나이의 20%만 취급하는 게 마땅하다. 아무튼 그렇다.
“그만큼 황실과 제국을 위해 헌신하셨다는 거지요. 자랑스러워 할 일입니다.”
그렇기에 교장에게 덕담을 건네는 척, 나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베아트릭스는 황실과 제국을 위해 헌신한 (인간 나이)20대의 아름다운 레이디라고.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황제가 바뀌는 건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적으로도 큰 사건이다.
“교황 성하께서 직접 새로운 황제 폐하께 축복을 내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교단과 제국은 수백 년 전부터 우호 관계였으니 당연한 일이지만요.”
“…그렇군.”
그렇기에 양위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은 제국의 외교 채널을 거쳐 빠르게 대륙으로 퍼졌고, 신성교국의 주요 인사인 타니안마저 양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보다 놀라운 건 교황이 직접 참가해서 축복을 내린다는 것이다. 타니안의 말처럼 제국과 교단의 우호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나, 양위 선언은 오늘 있었던 일이다. 오늘 있던 일을 당일에 접하고, 당일에 교황의 타국행을 결정했다고?
‘너무 빠른 거 아닌가.’
미친 속도의 업무 처리다.처음에는 타니안이 너무 덤덤히 얘기하길래 추기경이 온다는 줄 알았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 아인테르는 황자가 아닌 황제(皇弟)가 되는 건가? 대단한데!”
“그러면 이제 함부로 말도 못 걸겠군.”
그 와중에 아인테르의 등을 두드리며 낄낄거리는 류티스나, 은근슬쩍 농담을 건네는 라테르가 보였다.
잠깐 잊고 있었다. 황태자가 즉위하면 아인테르는 황제의 아들이 아닌 황제의 동생이 되는구나.
‘황자와 황제라.’
확실히 아들과 동생은 느낌이 다르지. 뭔가 후자가 더 권위 있어 보여.
“괜찮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더욱 고귀해지시는 거지, 저는 그대로니까요.”
그런 두 왕자를 향해 아인테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 텐데.’
근질거리는 입을 겨우 참으며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유감이지만 황제의 동생이면 작위와 영지를 받을 테니 그대로는 아닐 거다. 어쩌면 황제의 수족으로 구를 수도 있고.
그래도 형제의 의심을 받으며 숙청 위기에 처한 것보다는 좋은 미래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