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02)
로판 속 공무원 402화(403/451)
양위식 준비는 황제의 강한 의지와 궁내성의 처절한 눈물이 결합되어 빠르게 끝날 수 있었다. 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양위식을 하필 자기 대에 겪은 궁내성 공무원들에게 애도를 표할 뿐이다. 다음 생에는 양위 없는 세상에서 태어나기를.
그리고 그 처음 있는 양위식에서 황태손을 안고 있을 내 팔자도 조금은 유감스럽다. 당장 양위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릴 건 말할 것도 없고, 제국 역사에도 길이길이 남을 거 아닌가.
물론 어디까지나 부담스럽고 유감스러울 뿐,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어리고 어린 황태손도 무거운 짐을 짊어지려는 판국에 나름 대부라는 이름을 달고 엄살을 부릴 수는 없다.
“황태손 전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아─”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시녀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 황태손에게 고개를 숙였다. 짧은 옹알이는 여전하지만 실눈도 겨우 뜨던 황태손은 이제 완전히 눈을 뜨고 있었다.
아직 초점은 안 맞는 것 같지만.
“아─ 우─”
“전하께옵서도 대부님을 반기시는 것 같습니다.”
“영광이로군요.”
시녀장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보지도 못한 대부지만 나름 대부라고 반겨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혹시 황태자랑 황태자비가 없는 상황이라 낯선 사람을 보고 울면 어쩌나 했는데.
‘부모 없는 자리에 이러고 있어도 되나?’
뒤늦은 의문이 생겼다. 황태자가 황제로 즉위하면 황태자비는 자동으로 황후가 되기에, 둘 다 나름의 준비를 위해 자리를 비웠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일이니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 아기를─ 아무리 노련한 시녀들이 있다지만 외부인과 만나게 해도 괜찮나 싶다.대부니 외부인이 아니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뭔가 좀 그래.
“아─”
…뭐, 괜찮으니까 이러고 있는 거겠지. 신경 쓰지 말자.
“대부님. 전하의 손 쪽으로 손가락을 내밀어 보시겠습니까?”
한참이나 말없이 황태손을 응시하는 사이, 시녀장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손가락을요?”
난데없는 말에 절로 반문이 나왔지만 시녀장은 그저 온화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뭐지?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곁에 두는 사람이니 문제가 될 말을 하는 건 아닐 테지만, 너무 뜬금없는 말인데?
‘손에 손가락?’
무심코 황태손의 작은 손에 시선이 갔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내 손가락 하나보다도 작은 손.
그 손을 보다 보니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내밀었고─
“아.”
황태손의 손에 그대로 잡혀버렸다.
“전하께서는 무언가를 쥐고 계시는 걸 좋아하십니다. 간혹 옹알이를 하시다가도 시녀들이 손가락을 내밀면 조용해지실 정도지요.”
“그렇군요.”
확실히 내 손가락을 잡은 황태손은 옹알이를 멈추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어떻게 빼지?’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황태손이 내 손가락을 놓아주지 않았다는 것.힘을 주면 충분히 뺄 수 있지만, 잘못했다가 이 약한 손이 부러지면 어떡해.
덕분에 황태손이 놓아주기 전까지는 허리를 숙인 채 손가락을 바치고 있어야 했다.
***
제도의 활기는 황궁까지 닿았다. 수십 년 간 황제로서 군림한 부황의 퇴위, 새롭게 즉위할 황제. 제도의 시민들은 물론 제국 각지에서 몰려온 신민들로 제도가 북적거리기에 충분한 사유다.
아니, 굳이 제도까지 시선을 돌릴 필요도 없다. 당장 황궁만 해도 분주히 움직이는 신료들과 각국에서 모인 사절단들로 가득하니까.
“황제 폐하.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리고 제국에 방문한 사절단 중 가장 고귀한 인물의 인사에 부황께서도 친히 옥좌에서 일어나 반겨주었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성하. 이리 성하를 뵙게 되어 기쁠 따름입니다.”
“이 보잘것없는 늙은이가 폐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이 역시 주님의 은총이겠지요.”
여명 교단의 교황, 발트사크 37세. 당대 교황이 신성교국의 사절단장으로서 황궁에 방문했다.
제국의 황제여도 차마 아랫사람처럼 대할 수 없는 존재의 방문에 외무성이 뒤집히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보면 황실의 일에 교황이 친히 참석하여 축복을 내려주는 것이다. 위신에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될 일은 아니다.
심지어 다른 왕국과 공국의 군주들은 각국에 상주 중인 추기경의 축복 하에 즉위하지 않나. 그런 점을 생각하면 제국과 다른 국가들의 격차를 보여주는 방문이다.
‘꼭 제국이어서 온 것은 아닌가?’
덕담을 주고 받으며 우호 관계를 과시하는 부황과 교황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둘의 관계면 크펠로펜이 제국이 아닌 왕국이었어도 교황이 방문했을 거다.
부황이 방계 출신으로서 정통성이 부족한 것처럼, 현 교황도 즉위 당시에는 썩 기반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즉위 당시에도 늙은 편에 속했으며, 신성교국에서 활동하기보다는 대륙 각지를 전전한 추기경이었으니 당연한 일.
그런 인물이 교황이 된 것은 전대 교황의 개혁 정책에 지친 추기경들의 임시 방편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현 교황은 즉위하자마자 에넨의 축복이라도 받은 것처럼 정력적인 행보를 보였다. 덕분에 추기경들이 입에 거품을 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정통성이 부족한 부황, 마찬가지로 지지 기반과 권위가 부족한 교황은 파트너를 찾던 중,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국경을 초월한 파트너가 되었다. 부황은 교황에게 제국의 지지를, 교황은 부황에게 종교적 권위를 주는 그런 파트너.
‘…부황보다 늙은 교황은 저리도 정정한데.’
씁쓸하다. 한 시대를 아우르던 두 거물 중 한 사람은 퇴위를 결정했으나, 다른 한 사람은 아직도 정정하다. 이것이 신성력을 지닌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인가.
어쩌면 내가 즉위한 후로도 한동안 지금의 교황과 파트너 관계를 이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찰성 장관이 활약해야 할 이유가 늘었군.’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제국과 우호적인 현 교황이 버티고 있어도 그 정치력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고, 막상 다른 교황이 즉위하면 제국에게 우호적일지 의문인 상황이다.
그러나 감찰성 장관은 차기 성자와 나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신성교국과의 외교에서 큰 도움이 될 거다.
잊을만하면 새로운 장점을 가지고 오다니, 실로 충신이다.
양위식은 제도에 있는 성 파로나스 대성당에서 이루어진다. 교황이 축복하는 양위식 장소로서 더할 나위 없는 곳.
그렇기에 황궁에서 대성당까지 황실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했다. 마차 안에서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신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부황의 헌신에 경의를 보내는 신민들의 박수를 들으며.
‘크군.’
조용히 눈을 감으며 신민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를 들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소리다. 행사에 참여하면 언제나 듣는 소리다. 얼마 전 개선식 때도 들었던 소리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너무나 크고 무겁게 느껴졌다. 개선식 때는 승리를 거둔 부황과 용맹한 장병들을 향한 환호였으나, 지금은 새롭게 즉위할 나를 위한 환호였으니.
“전하.”
그런 내 손을 비가 부드럽게 잡았다.
“심려치 마소서. 제가 언제나 전하와 함께 하겠습니다.”
그 말에 잠시 비의 눈을 바라보다가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비, 당연한 말을 너무 진지하게 하는 것 같소.”
“후후, 그렇습니까?”
비와 함께 웃고 있음에도 중압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 그 누구라도 내 자리에 앉는다면 나와 같은 심정일 거다. 이 대륙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과 가장 막중한 의무를 동시에 얻게 될 터이니.
그럼에도 웃을 수 있다. 이 길이 내 숙명이고, 비의 말처럼 나 홀로 나아갈 길이 아니기에.
“황태자 전하, 황태자비 전하. 도착했습니다.”
어느덧 마차가 멈추고 마차를 이끌던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의 문을 잡고 다시 비를 쳐다봤다. 비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쉽지는 않겠지. 지금까지 온 길보다 험난하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을 수도 있다.
허나 그러지 않겠다.
“그러니 태자는 짐의 뜻을 받들라. 짐의 뒤를 이어 새로운 제국의 주인이 되어 나아가라.”
이제 나는, 이 제국의 주인이니.
비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마차에서 내리고, 대성당의 문을 지나, 부황과 교황이 있는 단상을 향해 움직였다.
평소라면 신실한 신도들이 앉아있었을 자리에는 다섯 공작과 열셋의 후작을 필두로 여러 귀족들이 앉아있었다.또한 대륙 각국에서 온 명망 높은 자들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이 대륙 위에 군림하고, 이끌어나갈 존재를 눈에 담기 위하여.
그러다 단상 구석에 있는 아인테르와 감찰성 장관을 발견했다. 그리고 감찰성 장관의 품에 안겨있는 황태손이 보였다.
‘이런.’
잠에 들었는지 눈을 감고 있는 황태손의 모습에 미소를 지을 뻔했다. 이 웅장한 행사도 저 아기 천사에게는 피곤한 일이겠지. 실수 없이 빠르게 끝내자.
그렇게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단상에 올랐다. 더 이상 미룰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곳에 이르렀다.
“이 자리에 한 명의 인간이 섰습니다.”
나와 비가 단상에 오르자 교황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아주 작은 속삭임 정도는 들리던 대성당 내부가 아무런 소음도 없는 공간으로 변했다.
“우리의 주께서는 인간의 운명을 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미래는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며, 그 결과로 향하는 길에는 어떠한 강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교황은 부황이 쓰고 있던 황관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신의 대리자로서 부황이 가지고 있던 황제의 권리와 의무를 거둔다는 의미의 행동.
“허나 그런 주께서 예외를 둔 존재가 있으니, 그것이 사제와 귀족입니다.”
교황은 한 걸음 한 걸음 나에게 다가왔다.
“주께서는 올바른 가르침을 이 대륙에 퍼뜨릴 존재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사제입니다. 사제들은 만민의 영을 풍요롭게 하여 언젠가 그들이 주의 곁에 도달하도록 노력하는 자들이며, 그중 으뜸은 교황입니다.”
교황이 나에게 걸음을 옮긴 순간부터 나와 비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감히 신을 대리하여 황제의 권리와 의무를 하사하는 자 앞에서 고개를 들 수는 없으니.
“또한 이 세상을 평온케하고 만민의 육을 배불리 할 존재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귀족입니다. 귀족들은사제들이 올바른 가르침을, 만민이 풍요로운 영을 얻을 수 있게 돕는 자들이며, 그중 으뜸은 황제입니다.”
대성당에 울려 퍼지던 발걸음 소리가 멈추었다.
“이 늙은이는 과분하게도 천상의 주를 대리하며, 이 대륙 만민의 종이자, 가장 마지막으로 천상에 이를 존재. 그러한 존재로서 제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명의 인간에게 묻겠습니다.”
“주 앞에 사실대로 답하겠나이다.”
“주께서 이 대륙의 평온과 만민의 육을 배불리 할 자로서 당신을 안배했습니다. 인간 길버트 리브노만, 당신은 그 뜻을 따르겠습니까?”
“그것이 주께서 안배하심이라면.”
“좋습니다.”
이윽고 내 머리에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인간 길버트 리브노만은 지금 이 순간, 주께서 안배하신 고귀하고 위대한 존재─ 길버트 에이만카 리브노만 오브 크펠로펜이 되었습니다. 이는 천상의 주께서 안배하심이며, 황제의 권위를 부정함은 주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이제 나는 신의 대리자에게 황관을 받는 계승자가 아닌, 교황과 동등한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자마자 움찔하고 말았다. 어느새 부황─ 아니, 상황께서 내 앞에 오셨다.
“상황 폐하. 당신의 사명은 새로운 황제가 이었으며, 새로운 황제가 나아갈 길은 당신이 겪은 길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교황도 예정에 없던 상황의 움직임에 다소 놀란 듯하지만, 바로 평온한 안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 황제를 위해 앞서나갔던 자로서 조언을 주시는 건 어떠할는지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성하.”
아까와는 다른 중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철저한 계획을 중시하는 상황께서 돌발 행동을 하시다니,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심지어 상황께서는 교황에게 감사를 표한 뒤 침묵을 지키셨다. 그리 긴 침묵은 아니나 시선을 받는 당사자로서 긴장할 수밖에 없다.
“나는.”
슬슬 식은땀이 흐를 지경에 이르고 나서야 상황께서 입을 여셨다.
“나는 모든 걸 버렸다.”
너무 인상적인 서두와 함께.
“나의 사명을 위해 나를 버렸다. 황실과 제국, 신민들을 위해 나를 포기했다. 그렇게 나아간 길이고, 그렇게 쌓아 올린 성이다.”
덤덤한 목소리가 대성당에 울려 퍼졌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리고 대성당에 울려 퍼진 목소리는 이제 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했다. 상황은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표현하였다.
‘버렸다라.’
그래, 상황은 스스로 말한 것처럼 모든 걸 버렸다.
…아마 그 모든 것에는 감정과 가족도 포함되어 있겠지.
“저는.”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무엇도 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당신처럼 살지 않겠다고. 황제인 당신을 존경할지언정, 그 방식을 따르지는 않겠다고.
“…….”
그 대답과 함께 다시금 침묵이 감돌았다.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은 황제가 자신의 인생과 반대인 삶을 살겠다고 선언했다. 상황으로서 과연 어떠한 기분일까.
한참을 침묵하던 상황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던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것이 네가 이끌어 갈 제국이다.”
그리고 희미하지만, 확실한 미소가 상황의 얼굴에 보였다.
***
황태자가 정식으로 황관을 받은 후로는 황태자비와 황태손이 나란히 황후, 황태녀가 되었다.
“새로운 태양을 경배하라! 에이만카 17세 폐하 만세!”
“에넨이시여, 대제시여, 새로운 황제를 보우하소서!”
양위식이 끝나자 당연하게도 우렁찬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는 역사적 순간에 성대를 아끼는 건 역적 새끼나 할 일이다.
“폐하, 감축드리옵나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들이 단상으로 올라왔다. 제국 귀족들을 대표하여 새로운 황제를 경배하기 위해.
당연히 공작 중에서도 대표는 전승공이었다. 이제 황태자의 장인에서 황제의 장인으로 진화했다. 대단하네.
“부족한 것이 많은 짐이나 경들을 보니 마음이 놓이오. 앞으로도 잘 부탁하오.”
“예, 폐하.”
전승공이 고개를 숙이자 다른 공작들도 고개를 숙였다. 실로 아름다운 군신의 모습이다.
…그건 그렇고 분위기가 분위기라 말은 못 꺼내고 있는데, 공작들의 충성 맹세 자리에 왜 나도 휘말려 있는 거냐?
아무리 황태녀의 대부라도 일개 백작이라고.
황제 이 새끼야. 황제면 속으로 욕 못 할 줄 알았냐?
‘시발.’
누가 나 좀 꺼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