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03)
로판 속 공무원 403화(404/451)
태자가 황위에 오르고 1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제국의 모든 작위 귀족들이 제도로 올라와 새로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각국의 사절단도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연함이 무너졌던 시기가 있었다. 과거에는 기괴한 명분을 들먹이며 제도로 오지 않고 버티는 귀족들을 어르고 달래느라, 제국에 사절을 보내지 않는 왕국들과 신경전을 벌이느라 고생했었지.
허나 이제 제국의 황제는 늙은 에이만카 16세가 아닌 젊은 에이만카 17세다. 방계로서 지지 기반이 없던 무력한 황제가 아닌 공작가를 외척으로 둔 강력한 황제의 시대다. 심지어 외척도 황제를 조종하려고 하는 역적이 아닌, 충정과 사랑으로 섬기려는 충신이다.
‘질서가 바로 섰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양위식 때 있었던 일들이 떠오른다. 교황의 축복과 공작들의 충성 맹세 속에서 당당히 서있던 황제. 즉위와 동시에 황태손을 황태녀로 삼으며 황실의 안정성을 과시한 황제.
실로 꿈만 같은 일이다. 수십 년 전에는 없는 것보다 가진 것을 세는 게 더 빨랐거늘, 지금은 없는 걸 찾는 것이 힘들 지경이다.
‘이제야 바로 섰어.’
그래, 이것이 황제다. 이것이 제국이다.
에이만카 대제의 뜻을 받드는 황제는 마땅히 공경을 받아야 한다. 이 대륙 유일무이한 제국은 마땅히 경외를 받아야 한다.
그 마땅함은 황실과 제국의 위엄은 물론, 신민들의 평온을 이루는 기둥일 터.
“상황 폐하. 도착했습니다.”
만인의 환호와 박수 속에서 당당히 나아가던 황제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이, 마부석에 앉은 안트라흐 남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지에나 있을 것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기껏 궁내성 장관직에서 사임했으면 영지에서 편한 말년이나 보낼 것이지, 어찌 늙고 늙은 상황 따위의 시중을 들고 있는 것인가. 심지어 본인도 늙은 주제에 마부의 역할을 자청하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 내려보내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안트라흐 남작의 고집은 예전부터 알아주었기에 소용이 없다. 그러니 계속 곁에 두는 수밖에.
“이 앞은 안트라흐 남작과 갈 터이니, 경들은 대기하고 있으라.”
“상황 폐하, 부디 말씀을 거두어주소서. 소신들이 폐하를 뫼시겠나이다.”
국립묘지의 입구에서 황실 기사들에게 말하자 기사들은 동요하며 입을 열었다. 호위 대상이 호위를 물리고 움직이겠다고 하니 당연한 반응이다.
“이 제국에 이곳보다 안전한 곳은 없으니 염려하지 말라.”
그래도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그들의 충정을 밀어냈다. 지금 갈 곳은 제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기도 하나, 동시에 조용히 방문하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괜히 우르르 방문하여 소란스럽게 굴면 싫어할 수도 있다. 옛날부터 사람이 많은 걸 싫어했으니.
“본작도 신하로서 경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나, 상황 폐하께서 가볍게 움직이고 싶으시니 어찌 하겠는가. 경들이 따라주게.”
안트라흐 남작까지 나서서 대기할 것을 종용하자 기사들은 더욱 당황하며 어찌할 줄 몰랐다.
“혹, 제도의 치안을 믿지 못하는 것인가? 근위 군단에서 섭섭해하겠군.”
“아, 아닙니다, 각하!”
“농담일세. 내 짓궂은 말을 했어.”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안트라흐 남작의 모습에 기사들은 그제야 뜻을 굽혔다. 농담이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더 귀찮게 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는 의미의 말이라는 건 충분히 인지했을 터.
그 광경을 지켜 보다가 국립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다 늙은 신하가 은퇴해서도 내 곁에 있는 건 편치 않은 일이나, 안트라흐 남작만큼 내 마음을 잘 아는 사람도 없다. 확실히 곁에 있으면 편하다는 걸 부정하기 어렵다.
“늙으면 손주들 재롱이나 보며 지내야 하는데, 젊은 것들한테 원망이나 받게 생겼습니다.”
내 뒤로 따라붙은 안트라흐 남작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반응할 가치도 없는 엄살이다. 고작 원망이 두려웠으면 지금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면서 말은 잘한다.
“형님이 아우를 위해 그 정도는 해야지.”
그 말에 안트라흐 남작이 놀란 듯 움찔하더니 곧바로 웃음을 흘렸다.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한 과거, 안트라흐 남작을 형처럼 대한 적이 있기는 하다. 안트라흐 남작의 부친과 내 부친은 영지가 맞붙은 친우였고, 그 관계는 자식인 우리에게도 이어졌다. 덕분에 나와 안트라흐 남작은 형제처럼 지냈다.
그 관계도 내가 황제가 되며 무너졌지만─ 이제 황제라는 이름에서 벗어났으니 오랜만에 그 시절을 입에 담았다.
“예, 맞습니다. 형이라면 마땅히 그래야지요.”
그렇게 말한 안트라흐 남작은 침묵을 지켰다. 남작도 나처럼 과거를 떠올린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과거라.’
늙을수록 젊을 때의 추억을 아름답게 여긴다는 말이 있다. 나 역시 다를 것은 없다.
즉위 초는 모든 것이 끝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나, 즉위 이전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나와 안트라흐 남작, 그리고 황─
“상황 폐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조금 놀라고 말았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지만 근처까지 다가왔는데 눈치채지 못하다니.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 올리는 국립묘지 관리인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리까지 흐르는 금발과 금안을 가진 여인이나,
‘벌써 황실 구역까지 왔나.’
그 정체는 에이만카 대제의 묘를 가까이서 관리하기 위해 정체를 숨긴 전대 드래곤 로드.
황실 구역에 진입하자마자 바람처럼 나타난 전대 로드의 모습에 경이로움마저 느껴졌다. 평소에는 찾으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존재가 황실 구역에 발을 들이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다. 드래곤이라 그런지 무언가 다르기는 다르다.
“이제 관리인과 함께 움직일 터이니, 남작은 대기하고 있으라.”
물론 관리인이 전대 드래곤 로드라는 건 황제만 아는 비밀이니, 안트라흐 남작에게 대기할 것을 명하고 전대 로드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전대 로드와 나눌 대화는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될 대화다.
“예, 폐하.”
그 지시에 안트라흐 남작은 언제나 그렇듯 수긍했다.
전대 로드는 나보다 앞장서 걸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대제의 반려인 존재에게 함부로 말을 걸 수 없어 침묵을 지켰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전대 로드였다. 안트라흐 남작이 있을 때 들려주었던 정중한 목소리 대신, 위압적이고 딱딱한─ 그러나 동시에 따뜻함을 담은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그 이의 제국이, 후손들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많았다. 그 이가 공경 받는 건국 시조가 아닌 역사 속의 존재로 격하될까 두려웠지.”
“무능한 후손들이 심려를 끼쳐 송구할 따름입니다.”
“너는 나에게 사과를 할 의무가 없다.”
걸음을 멈추고 나에게 시선을 돌린 전대 로드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너의 사과를 들을 자격이 없다. 에이만카의 뜻을 다시 세운 기특한 아이이니, 내가 감사를 표해도 과하지 않다.”
그러고는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국립묘지 관리인으로서 상황에게 보내는 인사가 아닌, 전대 드래곤 로드이자 대제의 반려로서 일개 후손에게 고개를 숙였다.
당황스럽다. 황실의 숨겨진 큰어른에게 이런 인사를 받으니 패륜아가 된 기분이다. 그럼에도 큰어른을 만류하지 못하는 건 예상치 못한 광경에 몸이 굳어서겠지.
“마법을 걸어두었으니 거기서 소리를 쳐도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마음 편히 있다가 돌아오거라.”
고개를 들며 다시 미소를 지은 전대 로드는 그 말과 함께 손바닥을 부딪쳤다.
‘허.’
그러자 내 몸은 어느새 한참을 걸어야 도달할 수 있는 구역에 서있었다.
황실 구역 내에서도 다소 변두리인 곳으로, 황실 인사의 묘치고는 밋밋한 묘가 있는 곳으로.
“…나 왔소, 황비.”
내 곁을 떠난, 내가 지키지 못한 황비의 묘 앞으로.
“걸어오면서 마음의 준비라도 하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소.”
당혹감에 변명하듯 입을 열고 말았다. 전대 로드 입장에서는 배려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칼에 찔린 기분이었다.
“그래도 빨리 보니 좋긴 좋구려.”
잠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내가 황비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으니까.
허나 이미 내뱉은 말이니 어쩌겠는가. 그리고 지금만큼은 자격이 있든 없든,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쏟아내고 싶다.
“길버트, 그 아이가 황제가 됐소. 나 때와 달리 만세 소리가 우렁찼으니 당신에게도 소리가 들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조심스레 손을 뻗어 황비의 묘를 매만졌다.
“이제 나는 황제가 아닌 상황이오. 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말았다. 예전에도 생각한 것이지만 제국에서 최초라는 이름은 내가 전부 가져가는 것 같다.
“황제가 아니니, 이제 노력할 필요도 없고 말이오.”
그렇게 말하고 나니 헛웃음이 나왔다. 노력할 필요가 없다. 더 이상 나에게는 의무도 사명도 없으니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도 된다.
허나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든 걸 버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좆같은 일이지.”
그렇기에 절로 거친 말이 나오고 말았다. 황비 앞이니 자제하려고 했지만 참을 수 없었다.
“억울한 일이오. 나에게 황족의 피가 흘러봤자 얼마나 흐르고, 선황과 닮아봤자 얼마나 닮았겠소. 당신도 알다시피 내 부친께서는 일개 백작이나 다름 없지 않았소.”
황족의 정체성도 잃은 지 오래고, 황족의 권리나 의무와도 멀어진 지 오래다. 나는 황족 코르부스가 아닌 귀족 코르부스였다. 그게 내 운명이라 생각했다.
“헌데 막 백작으로 등극한 젊은 놈에게 갑자기 황제가 되라고 하지를 않나, 후작가라는 것들은 그 틈에 황후를 배출하려고 하지를 않나. 아주 기가 막혔지.”
그러나 얄궂게도 내 운명은 내 생각보다 드높고도 험난했다. 멀고 먼 방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나마’ 가까운 방계였다.
딱히 알고 싶지는 않았다.
“미치는 줄 알았소. 백작령도 버거운 내가 이 제국을, 당신과의 결혼을 약속한 내가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을 하게 생겼으니까. 그때만큼 에넨이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을 정도요.”
심지어 억지로 물려받은 제국은 망국 직전에, 결혼 상대는 사랑도 의무도 없는 탐욕과 교만의 결정체였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벌을 내리는지 분통이 터졌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처해야 하는가. 이 제국을 망친 것은 빌어먹을 직계고 선황인데, 진작에 갈라져 나온 내가 왜 그 업보를 감당해야 하는가.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억울함과 분노를 접어두고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리브노만이니까.’
내가 고작 대제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귀족의 삶을 누렸으니, 고작 방계라는 이유로 책임을 짊어져야 하지 않겠나.
‘나는 피해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아무리 억울한들, 끔찍한 암군들을 만나 비탄에 빠진 신민들보다 억울할 리는 없다.
대제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한, 천명을 제대로 수호하지 못한, 이 세상을 평온케하고 만민의 육을 배불리 할 사명을 이루지 못한─ 그 혐오스럽고 증오스러운 암군들을 만난 신민들. 고작 나 따위가 아닌 그 신민들이 가장 큰 피해자다.
그렇기에 모든 걸 받아들였다. 동시에 모든 걸 버렸다.
“…그게 내 사명이라 생각했으니.”
황위가 방계까지 온 것, 이는 에넨과 대제께서 리브노만에게 주신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다. 내가 이 기회를 놓치면 그 다음은 황실의 몰락이오, 제국의 붕괴다.
그런 내가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건 사치라 생각했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건 죄악이라 생각했다. 현재에 안주하는 건 무능이라 생각했다.내가 감정에 따라 움직이면 신민들이 고통 받는다. 내가 행복을 추구하면 제국이 찢어진다. 현재에 안주하면 천명을 수호할 수 없다.
나는 일개 인간이 아닌 리브노만의 위업과 업보를 짊어진 디딤돌이다. 대제의 화려한 영광을 후대로 이어지게 만들어야 할 중간지점에 불과하다.
그리 생각하며 달려왔다. 감정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는지 당신을 황비로 들이기도 했으나, 길버트가 황제가 된 걸 생각하면 옳은 선택이었다.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옳은 선택이 아니라면 내가 당신을 죽게 만든 것이니.
“아, 그 아이가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아무것도 버리지 않겠다고 하더이다.”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모든 걸 버려온 날들을 부정하는 발언이 아들에게, 후임 황제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오히려 기꺼웠다.
“그 아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오. 내가 그렇게 만들었소.”
내가 제대로 달려왔다는 의미 아닌가. 지금의 황제는 나처럼 모든 걸 버릴 필요 없이, 모든 걸 안고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 아닌가.
“정말, 정말 그렇게 만들었소. 내 인생을 바쳐… 당신과 그 아이 앞에서 가장임을 포기하며, 그렇게 만든 제국이오.”
이것만큼은 자신할 수 있다. 다행히 나 하나의 인생으로 제국의 명운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그러나 그 자신감으로도 뒤이어 할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쏟아내겠다 다짐했음에도 도저히 입을 열 수 없었다.
덕분에 한참이나 침묵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오늘이 아니면 영원히 말할 수 없을 테니.
“그러니, 에넨께서 우리에게 다음 생을 허락하신다면─ 그때는 황족도 귀족도 아닌 평민으로 태어나지 않겠소?”
그래, 황족의 보랏빛 제관도 귀족의 푸른 피도 필요 없다. 다음 생이 있다면 평민으로서 살고 싶다.
평민인 내가 마찬가지로 평민인 당신을 만나면, 정치적 개입 없이 당신과 결혼할 수 있겠지. 순수한 축하를 받으며 부부가 될 수 있겠지.
그리고 도시가 아닌 마을 변두리의 작은 집에서 살며, 아침이 되면 나는 근처 밭에 나가 일을 하는 거요. 드넓은 지평선의 밭일 필요는 없고, 우리 부부와 자식들이 먹고 살 크기면 충분하오.
닭이나 돼지를 키우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오. 열심히 길러서 달걀도 먹고, 아이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보채면 가끔 잡아서 먹으면 딱이지 않겠소?
물론 평민으로 사니 평온하고 굴곡 없는 삶일 수는 없을 거요. 아니, 신분을 떠나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니 가끔은 싸울지도 모르오.
그래도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지는 것처럼, 우리도 잠시 싸우고 나면 금방 화해를 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살아가겠지.
그래,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겠지. 평범한 인간처럼,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이, 그렇게.
…만약 그런 삶을 산다면, 매일 말할 수 있소.
“사랑하오, 셀레덴.”
황제 에이만카 16세는 감히 말하지 못했던 그 말을.
“30년 만에 말하는구려.”
황제라는 이름을 벗은 지금, 내 곁을 떠난 당신에게 영원히 닿지 않을 이 말을.
그 말까지 하고 나자 묘에 올린 손등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비?’
혹시 하늘에 있는 황비가 답을 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으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다시 고개를 숙이자 여전히 손등에는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상한 일이다.
***
관리인과 함께 사라진 상황 폐하께서는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야 돌아오셨다.
물론 폐하께서 상황으로 물러나며 완전히 업무에서 손을 떼신 지금, 한 곳에서 시간을 오래 보내는 것 따위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황실 구역에서 누구의 묘를 보고 왔을지 뻔하기에 오래 머무를수록 기꺼울 수준이다.
“피곤하군. 황궁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그리고 마차에 오르시며 남겼던 말에 살짝 미소를 짓고 말았다.
수십 년 동안 감정 표현을 철저히 억누른 폐하께서 당당히 피곤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제 황제로서 연기하던 강인함을 내려놓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때문에 다소 서둘러 이동했다. 그럼에도 마차 안에 계신 폐하께서 불편하지 않게 조절하는 것이 고역이었으나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상황 폐하.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폐하께서도 내 조절이 만족스러웠는지, 아무런 지적 없이 황궁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폐하?”
헌데 이상하다. 바로 반응을 보이실 폐하께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후여러 번 더 폐하를 불렀지만 마찬가지였다.
…
“폐하, 실례하겠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차의 문을 열어 폐하를 확인했다.
그러자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폐하를 볼 수 있었다.
“…코르부스.”
나도 모르게 폐하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아까 국립묘지에서 형, 아우 얘기를 해서 그런지 정말 무심코 나온 이름이었다.
허나 어쩔 수 없었다. 지금 폐하의 모습은 그 시절이 떠오르는 모습이었으니까.
폐하께서 황제가 되신 이후, 처음으로 보는 홀가분한 표정이었으니까.
‘고생했다.’
그렇기에 나도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갔다.
아우를 격려하는 형이었던 시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