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04)
로판 속 공무원 404화(405/451)
양위식이 끝나면 바로 퇴근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애석하게도 연륜 없는 애송이의 착각이었다. 오히려 양위식 이후 일정이 진짜였다.
수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제국을 이끌어 온 거물의 공백을 새로운 황제가 메꾸게 되었다. 당연히 새 황제로서 ‘내가 그 공백을 완전히 메울 수 있다.’ 는 것을 대륙 전체에 알려야 한다. 만일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국내는 동요하고 타국은 은근히 기회를 노릴 터.
그렇기에 퇴근은커녕 양위식 당일부터 지금까지 황제와 세트처럼 묶여 다니게 되었다. 가끔 얼굴 보는 것도 미치겠을 놈과 며칠 동안 붙어 다니고 있다.
‘시발.’
그나마 다행이라면 황제와 나, 단둘만 붙어 다니는 게 아니라 다섯 공작 전원도 동행 중이라는 것이다. 만약 단둘이었으면 공백이고 나발이고 탈주했지.
덕분에 옥좌에 앉은 황제, 그런 황제 앞에 엎드려 충성을 맹세하는 귀족들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 양반들은 충성 맹세를 끝내면 바로 집으로 돌아갈 텐데,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 걸까.
…사실 알고 있다. 황위 계승 서열 1위에 빛나는 황태녀의 대부이자, 검으로 하늘을 베는 기인이 새롭게 즉위한 황제의 곁에 있으면 황제의 권위에 도움이 된다. 반대로 내가 황제의 곁에 없으면 혹시 황제와 나 사이에 분란이 있는 거 아니냐는 불안감이 퍼질 것이다.
그 불안감을 수습할 바에는 귀찮아도 황제랑 붙어 있는 게 낫지. 역시 정치는 골치 아프고 개 같은 일이다.
“경들의 충정에는 상황께서도 흡족해하셨다. 짐 역시 경들이 먼저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 한 변치 않을 신뢰를 보일 터이니, 앞으로도 황실과 제국을 위해 봉사하라.”
“폐하의 신뢰에 기필코 부응하겠나이다.”
아무튼 귀족─ 정확히는 동부 대영주들의 충성 맹세에 황제는 의례적인 답변을 돌려주었다.
물론 지금 같은 공적인 행사에서 의례적인 답변만큼 마음이 놓이는 답변은 없다. 괜히 다른 답변을 돌려주면 귀족들의 머리가 바삐 돌아가며 과부하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즉위 초부터 귀족들이 머리 굴리게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만약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공적인 자리가 아닌, 사적인 자리를 마련하여 독대를 해도 충분하다.
“대영주들의 충성 맹세는 끝났습니다.”
동부 대영주들이 깊게 허리를 숙이며 물러난 뒤, 황제 좌측에 시립해있던 전승공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황제는 다소 편안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도에 위치한 행정부 고위직에 이어 제국백들, 그리고 제국 각지에 퍼진 대영주들까지. 급히 꺼야 할 불은 전부 껐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중소 영주들하고 군부 차례인가?’
어디까지나 급한 불이지만 말이다. 아직 끝난 인원보다 남아있는 인원이 훨씬 많다.
“급히 제도까지 올라온 충신들에게 쉴 시간은 주어야 할 터. 대면은 잠시 멈추도록 하지.”
“실로 영민하신 판단이옵니다, 폐하.”
황제도 한가득 남은 인원들에게 생각이 닿았는지, 짧게 침묵하다가 휴식을 선언했다.
솔직히 충성 맹세가 동네 마트 세일 행사도 아니니 당연한 결정이기는 하다. 너무 쉬지 않고 로테이션을 하면 충성을 맹세하는 입장에서도 미묘하지 않겠나. 자신의 충성이 떨이 상품으로 취급되는 것 같아 서운할 거다.
그렇게 황제의 휴식 선언에 옥좌 근처에서 분위기를 잡고 있던 공작들도 이리저리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어디 처박혀서 쉬고 올─
“감찰성 장관은 남게. 긴히 할 말이 있다.”
“…예, 폐하.”
개새끼.
내가 잠깐 쉬는 게 그렇게도 보기 싫더냐.
자연스레 술병을 입에 물거나 시가를 꺼내며 퇴장하는 모 공작들, 나를 힐끔거리며 쭈뼛쭈뼛 퇴장하는 베아트릭스의 뒷모습을 보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한 대만 팰까?’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 충성 맹세를 한 지 1주도 지나지 않았으니, 아무 페널티 없이 충성 청약 해지가 가능할 거다. 그러니 해지하고 한 대만 패도 되지 않을까? 그 뒤에 다시 충성 맹세하면 괜찮지 않을까?
미친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손이 꿈틀거린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 같다.
아니, 사실 지금도 기회가 아니지만 나 스스로 자기합리화는 가능하다.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군. 쉬지 않고 사람을 만나니 조금은 답답했다네.”
그러거나 말거나 황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옥좌에 앉은 상태로 축 늘어졌다. 마치 업무를 끝내고 퇴근한 가장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본능적으로 욕이 나올 뻔했다. 네가 답답한 것만 답답한 거고, 내가 피곤한 건 검은 소가 감당해야 하는 패시브냐. 상사랑 단둘이 있어야 하는 내 입장도 좀 생각해 줘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폐하.”
허나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본심과 달랐다. 아무리 상사가 개 같아도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는 게 공무원의 숙명이니.
“어찌 나만 고생했겠나. 장관과 공작들도 자리를 지키느라 수고가 많았다.”
그걸 아는 새끼가 나만 붙잡아두고 있다는 게 더 나빠.
그 짙은 원망과 분노가 눈빛에 담겼는지, 황제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공작들은 나이가 제법 있지 않나. 그나마 젊은 현명공도 40대인데, 20대인 짐과 장관이 배려해야지.”
나이를 들먹이는 말에 순간 입을 다물고 말았다.
‘비겁하게 팩트를.’
확실히 공작들은 최연소가 40대에 최고령은 80이 넘지 않나. 황제여도 그런 어르신들을 계속 붙잡고 있기는 난감했을 거다.
그래, 시국이 시국이니 젊은 놈이 조금 더 고생해야지. 아직 내 피에는 장유유서의 본능이 남아있으니까.
“그리고 방금 말한 것처럼,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장관만 남게 했네.”
그 말과 함께 황제는 품 속에서 작은 술병을 꺼냈다. 그것도 두 병이나.
…?
‘뭐야 시발.’
술병이 왜 품 속에서 나와.
“받게. 딱 입가심만 할 정도니 취할 걱정은 하지 말고.”
“아, 예.”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금방 정신을 다잡고 술병을 받았다.
이미 현명공에게 단련된 나는 이 정도로 동요하지 않는다. 그냥 갑자기 예상치 못한 놈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술을 꺼내서 흠칫한 거지.
***
얼떨떨한 표정으로 술병을 받는 장관을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나도 설마 옥좌에 앉아 병째로 보드카를 마시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제법 독한 놈으로.
그런데 그 상상 외의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이 자리였다. 핑계 같지만 정말로 그러하다. 아니라고 하는 놈이 있다면 옥좌에 앉은 다음 말하라고 하고 싶다.
‘각오해도 이 정도라니.’
조용히 한 모금을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황제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 결코 평온하지는 않을 미래. 모든 걸 각오했다. 그럼에도 나아갈 것이라 다짐했다.
허나 막상 옥좌에 앉아─ 황관을 머리에 얹고 마주한 현실은 가혹했다. 고작 며칠 정도에 불과한 시간이었으나 그 짧은 시간 내에 느낀 심적 부담은 상당했다.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 귀족들을 부황처럼 조종하고 다루어야 한다. 단순한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도 의미를 담아야 한다. 치열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 속에서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고 이득과 명분을 확보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며칠 사이에 겪었다. 내 앞에 고개를 조아리는 귀족들, 입으로는 축하와 우호를 담으면서 눈은 바쁘게 돌아가는 사절단들을 보며 절절히 겪었다.
“저는 무엇도 버리지 않겠습니다.”
양위식 때 상황께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제의 무게를 짊어졌음에도, 황제라는 개체가 아닌 인간의 감정을 유지하며 나아가겠다던 일종의 반항.
아마 상황께 처음으로 보인 반항심이나 다름없는 발언을 떠올리자 다시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웅대한 꿈이군.’
비록 상황의 방식은 존경하지 않으나 업적은 경외한다. 내가 상황을 대신하여 과거에 즉위하였다면 이 제국을 다시 일으키는 게 가능할지 회의감이 들 정도니까.
그런 주제에 상황 앞에서 당당히 ‘당신처럼 되지 않겠다.’ 고 선언했다. 상황처럼 모든 걸 버리고 나아가도 상황이 이른 곳에 도달할지 장담할 수 없는 놈이 자랑스레 떠들었다.
“장관.”
“예, 폐하.”
“짐은 상황 폐하와 다른 놈일세.”
그래, 다르다. 너무나도 다르다.
“짐이 왜 아인테르를 받아들였는지 아나?”
“…아인테르 전하께서 2황자와 다르게 중립을 지킨 것도 있으나, 폐하께서 관용을─”
“감정에 휘둘렸기 때문일세.”
감정 때문이었다. 상황과 달리 오직 감정 때문에 황실의 일을 처리했다.
“태자로서의 입지가 단단해서? 더 이상 아인테르가 위협이 되지 않아서? 그런 정치적 이유가 아니라 감정적인 이유였어.”
아인테르를 황실의 일원으로 복귀시킨 이유는 간단했다. 황후가 황태녀를 회임했기에, 훗날 태어날 황태녀가 할 말이 걱정되어 복귀시켰다.
언젠가 황태녀가 아인테르를 보고 ‘아바마마는 왜 숙부님과 사이가 안 좋으신 건가요?’ 라고 물어봤을 때, 차마 입을 열 자신이 없어서.
“너무 감정적인 결정이었지. 아인테르가 욕심이 없고 무해한 동생이라 망정이지, 야심이 넘치는 동생을 두고 이런 결정을 했다면 황실과 제국의 우환을 내 손으로 키웠을 거야.”
눈을 감았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다.
내가 상황 앞에서 무엇도 버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상황의 방식을 존경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이미 나 스스로가 철저한 이성으로 움직일 수 없는 놈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기에 애써 상황의 방식을 부정하며 나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황제에, 지도자에 어울리지 않는 놈이라 인정하는 꼴이니까. 내가 이 제국을 이끌어갈 수 없다 인정하는 꼴이니까.
‘그나마 장관이 있어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다. 이런 마음을 황후에게 털어놓으면 걱정할 것이 뻔하고, 장인어른에게 하면 결국 황후의 귀에 들어갈 거다.
다른 가족? 내가 죽이기 직전까지 간 아인테르와 옹알이를 하는 황태녀에게 말할까?
친우?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이름뿐인 1황자 시절에 아카데미를 다녀서 그런 거 없다.
그렇기에 장관이다. 입이 무겁고 믿을 수 있는 파트너인 장관에게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런 주제에 상황 폐하께 말했지. 나는 내 방식으로 황제의 길을 걷겠다고. 당신과 다른 방식으로 황제가 되겠다고.”
다시 눈을 뜨며 장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경이 보기에 짐은 황제가 될 수 있겠는가? 상황처럼 제국과 신민을 평온케하는, 그런 황제가.”
장관은 입을 열지 못했다.그야 막 즉위한 황제가 신하에게 할 말로는 적합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어쩌면 내 말이 충성심을 확인하는 말로 들렸을지도 모른다.
미안할 따름이다. 내가 편해진 대신 신하인 장관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었다.
민망함에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래도 털어놓으니 확실히 마음이 편─
“아마 상황 폐하 같은 황제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
예상치 못한 대답에 도로 장관을 쳐다봤다.아니,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상황께서는 군주가 되기 위하여 태어난 분 같았죠. 오직 이성과 합리를 생각하며 움직이는 분이셨습니다. 솔직히 폐하께서 그분 같은 황제가 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내 시선에도 장관은 아랑곳 않고 말했다. 기이할 정도로 평소보다 혓바닥이 화려하게 움직인다.
“헌데 상황 폐하 같은 황제가 될 필요가 있습니까?”
“뭐?”
무심코 반문을 하고 말았다. 그런 황제가 될 필요가 있느냐고?
당연히 있지 않나. 그분처럼 유능한 황제는 이전에도 드물고, 앞으로도 드물 것이다. 그 뒤를 이은 황제로서 당연히 그분처럼 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일평생 제국을 위해 움직이신 상황께서 폐하께 양위를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는 양도가 아닌 스스로 판단하신 겁니다.”
허나 장관의 생각은 다른 듯, 병에 남아있던 술을 단숨에 마시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이제 모든 걸 버린 황제가 아닌, 모든 걸 지킬 인간이 이 제국을 다스려도 된다 판단하신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본 상황께서는 제국에 해가 되면 불멸자가 되어서도 버틸 분이셨습니다.”
그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장관을 봤다.
‘인간이 다스려도 되는 제국.’
그저 속으로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황제와 인간을 나누지 않고, 황제 역시 인간으로 본 발언. 상황께서는 택하지 않고, 택할 수도 없었던 방식.
…황제의 길이 아닌, 인간의 길을 택한 자가 다스리는 제국.
“그것이 네가 이끌어 갈 제국이다.”
내가 상황에게 했던 말이 아닌, 상황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
갑자기 웃기 시작하는 황제를 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너무 막 나갔나?’
뒤늦게 이성이 돌아왔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까고 싶었으면 최대한 포장해서 말하지,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망할, 입가심이나 하라며 건네준 술이 식도와 정신을 불태웠다. 빙의 전에 우연히 마셨던 보드카도 이 정도는 아닐 거다. 술에다가 불이라도 끼얹었나?
아무튼 상상도 못 한 알코올에 정신이 먹혀, 황제의 푸념을 다큐로 반격하고 말았다. 지금만큼은 황제와 단둘이 있어서 다행이라 느꼈다.
‘…다행 맞나?’
여전히 웃고만 있는 황제를 보니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취한 걸 어필하면 심신미약으로 징계는 피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