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05)
로판 속 공무원 405화(406/451)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과거의 내 목을 비틀어버리리라.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황제가 건넨 술병으로 황제의 대가리를 내려치리라.둘 다 후폭풍이 어마어마한 행동이지만, 어느 쪽이든 지금 겪고 있는 고통보다는 양호할 테니까.
방심하면 추하게 흐를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조용히 시선을 내리 깔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신분이 황실의 노예라고 생각했으나, 바닥 밑에는 지하실이 있다는 걸 간과한 교만이었다.
“이제 모든 걸 버린 황제가 아닌, 모든 걸 지킬 인간이 이 제국을 다스려도 된다 판단하신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본 상황께서는 제국에 해가 되면 불멸자가 되어서도 버틸 분이셨습니다.”
그 교만을 깨트린 흑역사가 떠오르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난 그 사실을 몰랐어.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감히 신하의 입장으로 상황의 판단이니, 황제의 자격이니 운운한 것은 선을 넘어도 너무 넘은 광기였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황제의 즉위 초를 처형식으로 장식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어.
그러나 더 공포스러운 건 황제의 반응이었다. 그 미친 발언을 듣고도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거나 분노가 극에 이르러 도리어 웃음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웃었다.
“그래, 장관의 말이 맞다. 상황께서 그리 판단하셨으니 짐에게 양위를 하신 거겠지. 그 말이 옳다!”
그 모습을 보니 조커가 계단에서 춤을 추는 걸 정면에서 마주친 시민이 된 기분이었다.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그날부터 진정한 공포와 절망이 나를 덮치기 시작했다.
“오늘 일정은 이 정도로 마치도록 하지. 아, 장관은 나를 따라오게.”
“한 잔 하지. 며칠은 더 고생할 테니 이 정도는 마셔도 돼.”
“아침이 되면 집무실로 먼저 오게. 젊은 놈들이 조금이라도 일해야 하지 않겠나.”
원래는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만 부르거나 연락을 걸던 놈이 ‘그’ 발언 이후로 나를 옆에 끼고 다니기 시작했다. 좋게 말하면 총애고 솔직하게 말하면,
‘장난감.’
그래, 장난감이다. 마음에 들어서 하루 종일 들고 다니는 장난감. 아끼기는 하지만 너무 마음에 들어서 망가질 정도로 굴리고, 설령 망가지더라도 애정 때문에 가지고 다니는 장난감.
끔찍한 발상이지만 본능은 그리 외치고 있다. 난 일 잘 하는 노예에서 애착 장난감으로 퇴화했다고. 아무래도 알코올에 굴복한 내 광기 때문에 황제의 심정에 변화가 온 것이 분명하다고.
그것이 또라이를 보는 유쾌함인지, 아니면 괘씸한 새끼를 옆에 두고 조지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장관, 왜 그러는가? 혹 식사가 입에 맞지 않는가?”
“아닙니다, 폐하. 너무도 훌륭하여 맛을 느끼며 먹고 있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어느 쪽이든 황제에게 시달려야 한다는 건 변치 않는다.
‘시발.’
내 대답에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황제를 보며 다시 시선을 내렸다.
놀랍게도 벌써 며칠째 황제의 저녁 식사에 초대되어 겸상을 하고 있다. 짐승 새끼와 겸상을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거늘, 끔찍할 따름이다.
“훌륭한 식사에는 훌륭한 술이 빠질 수 없지. 얼마 전 루센 왕국의 보드카를─”
“폐하. 루센 사람들은 혹독한 추위에서 살아가야 하니 매일 보드카라도 마셔야 하지만, 폐하께서도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짐승 조련사인 황후가 같이 있다는 것이겠지.
지금도 황후의 덕을 봤다. 내 입장에서는 흑역사의 상징을 꺼내려는 황제를 황후가 부드럽게 말리지 않았나. 시종을 부르려던 황제도 황후의 만류에 조용히 손을 내렸고.
“장관과 좋은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실수를 했군. 미안하오, 황후.”
그런데 말로는 황후에게 미안하다면서 왜 나를 쳐다보는 건지 모르겠다.
“폐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마음이 통하는 신하와 함께 하는 건 즐거운 일이겠지요. 그저 건강에 조금만 신경을 써주셨으면 하여 드린 말씀입니다.”
심지어 황후마저 그런 황제의 시선을 따라 은근히 나를 쳐다봤다.
미칠 것 같다. 황제의 애착 장난감이 아니라 황실 공용 장난감이었나?
– 높은 사람한테 관심 받으면 좋은 거 아니야?
그 와중에 한동안 조용하던 영원한 푸른 하늘까지 난입하며 머릿속은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겨울 방학 때 신물 들고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로는 잠잠했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엘프랑 요정한테 보살핌 받으면 좋은 거 아닙니까?’
– 아.
그래도 영원한 푸른 하늘과는 비슷한 고통을 공유 중이라 빠르게 격퇴할 수 있었다. 관심이 과하면 받는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그 고통을.
…그것보다 내 유일한 동지가 인간이 아닌 신이라니,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제도에서 떠나지 못하는 가녀린 공무원은 밤이 돼서야 연인들과 연락을 할 수 있다.
“오늘도 폐하와 식사를 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미안합니다, 마르.”
– 아뇨, 괜찮아요. 오히려 폐하께서 칼을 신뢰하신다는 의미니 기쁜 일이죠.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밝은 미소를 짓는 마르를 보니 쓴웃음이 나왔다. 당사자로서는 제발 거두어주었으면 하는 신뢰지만, 제3자의 시선으로는 영광이나 다름없는 일이겠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어디까지나 ‘붙잡혀서 연락이 늦었다.’ 같은 객관적 사실만 말할 뿐, 황제한테 시달려서 죽을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다. 그런 말을 해봤자 걱정만 할 테니까.
“아무튼 어서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할 텐데, 언제 일이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 후후, 걱정 말아요. 칼 대신 에리 언니가 있잖아요?
‘그게 걱정되는 건데.’
목 끝까지 치솟은 말을 삼키며 겨우 미소를 지었다.
양위식 당일에는 아카데미도 휴교를 했으나 양위식 이후로는 다시 정상 수업 중이다. 즉 새롭게 즉위한 황제와 그 측근이 구르든 말든, 세상은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 것이다.
그렇기에 일상에 복귀하지 못하는 나 대신 에르제베트가 다시 대타로 아카데미에 가게 되었다. 왜 이럴 때만 일 처리가 빠르고 정확한지 황제한테 항의하고 싶을 정도더라. 아주 개새끼가 따로 없어.
–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다 같이 제도로 가고 싶은데, 가봤자 칼한테 부담만 주는 거겠죠.
씁쓸한 듯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웠으나, 유감스럽게도 마르의 말이 맞다.
아침 일찍 황궁에 갔다가 저녁을 먹고 퇴근하는 상황이니 연인들이 제도에 와도 제대로 반겨줄 수 없다. 오히려 기껏 제도까지 온 연인들을 방치한다는 죄책감에 정신적 피로만 커지겠지.
– …오늘만큼은 아버님과 베아트릭스 언니가 부럽네요.
“부러워하는 이유가 너무 소소한 거 아닙니까?”
허나 이어지는 말에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장인어른과 베아트릭스, 둘 다 공작이라는 고귀한 자리에 선 자들이니 부러워하는 건 당연하나─ 마르가 그 둘을 부러워하는 건 단순히 나랑 같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작들도 나와 같이 실시간으로 고생 중이니까.
덕분에 터진 웃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 얼마나 소박하고 귀여운 질투인지.
“내일 장인어른께 마르가 공작위를 바란다고─”
– 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이윽고 마르도 나와 함께 웃기 시작했다.
내가 이 시간이 있어서 하루를 버틴다.
***
드디어─
‘드디어 끝났다.’
옥좌가 아닌 집무실에 있는 평범한 의자에 앉으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만큼은 공작들은 물론, 장관마저 물러나게 했다.
제국의 모든 작위 귀족과 관료, 지휘관, 재판관 등의 충성 맹세를 받았고, 각국에서 온 사절단과의 외교도 무난히 마치며 돌려보냈다. 이제 새로운 황제로서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은 전부 해결한 것이다.
‘…이제 연회만 남았나.’
가장 귀찮은 일이 떠오르자 한숨이 나올 뻔했다. 사실 양위식부터 오늘까지 고생한 걸 생각하면 연회 따위는 별거 아니다만, 신년하례식을 능가하는 규모의 연회를 개최한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로가 몰려온다. 애초에 연회에는 딱히 좋은 기억도 없고, 즐기는 성격도 아니다.
그래도 어쩌겠나. 새로 즉위한 군주가 당장 처리할 일을 마치고 즉위 기념 연회를 여는 건 제국을 넘어 대륙의 전통이거늘. 정상적인 즉위를 하지 못했던 상황마저 즉위 연회는 개최했었다. 규모가 다소 작았던 것이 문제지.
그렇기에 나는 제대로 연회를 열어야 한다. 황제가 새롭게 즉위한 것은 무엇보다 축하하고 경배해야 할 일이라는 걸 과시해야 한다.
‘당장 하는 건 아니라 다행이군.’
일단 황제의 위엄에 걸맞은 규모와 화려함을 과시해야 하는 연회이니, 당연하게도 준비에 제법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나마 상황께서 이전부터 양위를 준비하셨으니 개월 단위의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터이나, 적어도 최소한의 시간 벌이는 할 수 있다. 충성 맹세를 하고 돌아간 귀족들이 잠시 숨을 돌릴 정도의 시간, 동시에 나도 잠시 휴식을 취할 시간 정도.
“폐하.”
그리 생각하며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는 사이, 문 밖에서 헨드릭 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실부장이 폐하를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황실부장?’
난데없는 방문객이지만 황실부장이라면 언제 방문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 시기만큼 궁내성이 바쁘게 움직이는 시기는 드물지 않나.
그러고 보니 슬슬 궁내성 장관을 새로 임명해야 하는데, 조만간 황실 기사단장이 물러난다고 하니 그때까지는 황실부장의 대행 체제를 유지하는 게 좋겠다. 주요 보직을 띄엄띄엄 임명하는 것보다 동시에 임명하는 게 좋을 테니.
“들라하라.”
생각을 정리하고 대면을 허락하자 조심스레 황실부장이 들어왔다.
‘저런.’
빈말로라도 좋은 안색이라고 할 수 없는 황실부장의 모습에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다. 단순히 황실부장의 업무도 많을 터인데 궁내성 장관 대행까지 겸하고 있다. 실로 노고가 많다.
“황제 폐하 만세. 미천한 신하가 존귀하신 태양을 뵙나이다.”
“고개를 들라.”
“예, 폐하.”
다시 봐도 안색이 좋지 않다.
아무래도 연회까지 끝나면 황실부장에게 휴가는 확실히 챙겨줘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유능한 관료가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 황실부장. 어인 일로 찾아왔는가?”
골골거리는 황실부장을 위해서라도 빠르게 용건을 마쳐야 할 것 같아 직설적으로 물으니, 황실부장은 들고 있던 서류를 공손히 내밀었다.
“상황 폐하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상황 폐하의?”
의외의 말이라 반문하고 말았다. 양위식 이후로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라며 모든 업무에서 손을 떼셨고, 어머니의 묘에 다녀오신 이후로는 바깥 활동조차 삼가고 계신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 폐하의 말씀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지?
‘…뭐지?’
그 의문은 황실부장이 건넨 서류를 보자 더욱 짙어졌다. 서류를 보고도 정신이 멍해지는 건 장관의 세계수 사태 이후로 처음이다.
허나 어쩔 수 없다. 그만큼 서류에 적힌 내용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밭?’
상황께서 황궁 내부에 작은 밭을 만들겠다 하신다.
‘가축?’
거기다 몇몇 가축도 함께 기른다고 하신다.
…
‘뭐지?’
진짜 뭐지?
“상황 폐하께서, 훗날 만날 사람을 위해 미리 배워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내 표정을 본 황실부장의 부연 설명에 더욱 머리가 복잡해졌다.
대체 상황께서 누굴 만나시길래 이런 걸 배운단 말인가.아니, 애초에 그분께서 만날 사람이 있기는 한가?
‘…모르겠군.’
황제가 아닌 상황이 되어서도 속내를 알기 어려운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