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10)
로판 속 공무원 410화(411/451)
북방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위리디아까지 온 열세 통의 서신. 행운은커녕 절망을 담고 있는 끔찍한 서신이었지만, 무려 대영주가 보낸 서신을 무시할 수는 없기에 하나하나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 열세 통의 서신은 안부 인사, 미사여구, 의례적 문장을 빼면 한 통의 예외 없이 같은 제안─ 이라는 이름의 부탁을 담고 있었다.
자신들의 울프 펀치가 되어달라는 단도직입적인 부탁을.
‘거절하기는 힘들겠네.’
순간 실소를 흘릴 뻔했다. 북방 대영주들은 단순히 용건만 적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철저히 낮추는 절절함까지 서신에 담았다. 이 부탁을 거절하면 서로 머쓱해질 미래가 뻔히 보일 정도로.
심지어 내가 긍정적인 선택을 하기를 바라며 선입금을 하기도 했다. 적지 않은 숫자의 유목민들이 위리디아 영지로 흘러왔고, 위리디아의 시장은 열세 명의 대영주들과 교류하며 활성화되고 있다. 아무리 자발적 선입금이라지만 이렇게 받고 입을 닦으면 먹튀범이 된다.
‘어쩌지.’
고민된다. 사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썩 나쁜 제안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제안이라고 볼 수 있다.
북방과 붙어있는 영지의 대영주로서 북방 세력과 우호적 관계를 체결하고, 북방의 총의가 나를 지지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 없이 이득만 가득한 상황이다. 영지의 안정과 발전, 중앙에서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상승할 거다.
물론 휘하 파벌원이사고를 치면 파벌장으로서 책임을 지겠지만, 부하가 개판을 쳐서 징계를 먹는 건 익숙한 일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그래, 이득이다. 이득이기는 한데…
‘필요 없는데.’
이득이지만 필요 없다. 이미 황태녀의 대부니 감찰성 장관이니 온갖 타이틀을 달고 있는데 여기서 영향력을 더 높여봤자 뭐 하겠나. 내 위로 개 같은 상사가 버티고 있는 데다 부하라는 것들도 개성이 넘쳐서 문제지, 솔직히 내가 남의 도움이 필요한 약골은 아니다.
영지의 안정? 막말로 북방 대영주들이 미치지 않는 이상 내 영지는커녕 그 근처에서 소란을 일으킬 리는 없다. 그 양반들은 범인보다 뛰어난 지능과 눈치를 가진 사람들이니까.
그렇기에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거절하기에는 이웃인 북방 대영주들과 어색해질 테고, 수락하기에는 내가 원치 않는 보상과 책임이 늘어난다.
“그러고 보니 장관. 영지에 문제는 없지만 제법 흥미로운 일이 생겼다고 하더군.”
‘아.’
그러던 중 황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제는 유목민 출신 대영주들이 본토 귀족과 접촉하는 걸 가만히 구경만 할 새끼가 아니다. 정계에 새로운 파벌이 등장하게 생겼는데 관심이 없다면 지도자로서 불합격이지 않나. 걔는 인성이 문제인 거지 지능에 문제가 있는 놈은 아니다.
하지만 북방 대영주들의 행보를 뻔히 아는 놈이 그저 흥미로운 일이라고만 했다. 딱히 나와 북방의 연계를 견제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황제는 사실상 내가 북방 파벌의 수장이 되는 걸 원하는 것일 터.
…
‘받아야겠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의 뜻이 정해졌다면 최대한 그 뜻에 따르는 것이 편하다. 괜히 거절하면 괘씸 스택만 쌓이게 된다.
게다가 북방 파벌의 발족 자체는 막을 수 없는 미래다. 내가 북방 대영주들을 거부하더라도, 대영주들은 새로운 본토 귀족과 접촉하여 파벌을 구성할 것이다. 어차피 등장할 파벌이라면 누군지 모를 인물에게 맡기는 것보다 제국백(진급 예정)이자 황태녀의 대부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오래 기다리셨을 테니 빠르게 답장을 보내야겠군.”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슬쩍 입을 열자 대기하고 있던 수석 지방관이 빠르게 고개를 숙인 뒤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이제부터 난 북방을 관리하는 북부 대백작이다.
뭔가 유사품 같은 이름이지만 아무튼 그렇다.
나를 위리디아까지 배송해 준 마법사가 배달부 역할마저 수행한 덕분에답장은 빠르게 전달되었다. 아무래도 베아트릭스한테 친절한 마법사가 있다고 슬쩍 얘기라도 해줘야겠다.
그리고 마법사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통신구가 빛나기 시작했다.
–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백작.
북방의 유일한 후작인 바란디가 후작의 연락이었다.
“예, 양위식 때 뵙기는 했지만 그때는 인사도 나누지 못했지요.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 황실의 은혜 덕분에 더할 나위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의례적 안부 인사에 바란디가 후작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건 그렇고 조금 놀랐다. 답장에 ‘통신구를 통해 더욱 건설적인 미래를 논하자.’ 라는 내용을 담기는 했지만, 설마 받자마자 바로 연락할 줄은 몰랐는데.
…이거 혹시 열셋 전원과 연달아 대화해야 하는 건가?
– 백작께서도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이군요.
“하하, 저야 아직 튼튼할 나이 아닙니까. 벌써 허약하면 곤란하지요.”
– 이런, 그도 그렇군요.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불안감이 솟구쳤지만 일단은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바란디가 후작은 명목상 북방 대영주들의 수장이니 이 사람과의 대화만 잘 끝내도 절반은 해결한 셈이다.
그 대화가 수장직 양도라는 게 문제지만.
“제가 각하를 더 자주 뵈었다면 건강한 걸 과시할 수 있었을 텐데, 나름 이웃끼리 교류를 나눌 기회가 적지 않았습니까? 실로 안타까울 일입니다.”
그 말에 바란디가 후작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건설적인 미래를 논하자는 답장에 이어 이웃인데 교류를 나누지 못해 안타깝다는 말. 누가 들어도 북방 대영주들의 부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백작께서는 행정부의 일로 바쁘시지 않습니까.
“행정부에서는 언제든지 물러날 수 있으나, 후작 각하와 이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실 거짓말이다. 행정부에서 물러나는 것보다 위리디아 백작령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게 빠를 수도 있다.
하지만 바란디가 후작은 아직 황실의 공무원 활용법을 모른다. 그 잔혹한 진실을 모르기에 하얀 거짓말을 듣고도 기꺼운 듯 웃을 뿐이었다.
넌 공무원 같은 거 하지 마라.
***
장관이 위리디아로 떠나고 5시간 정도가 흐른 후, 장관의 연락이 왔다.
– 황제 폐하 만세. 폐하의 미천한 종, 칼 크라시우스가 제국의 태양께 인사드립니다.
예상보다 이른 연락에 흡족해졌다. 내가 원하는 걸 눈치채고 빠르게 일을 추진한 모양이다.
“그래, 장관. 벌써 연락을 한 걸 보니 일은 마무리된 것 같군.”
– …예, 폐하. 무사히 처리했습니다.
역시 흡족하다. 애초에 장관이 유목민 출신 대영주들을 포용할 각오만 한다면 깔끔히 끝날 일이기는 하나, 그 각오를 신속하게 마친 것은 치하할 일이 맞다.
“수고했네. 짐이 말하지 않았나, 영지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라고.”
그 말에 장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지만 무시했다.
내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나. 영지에 문제가 없던 것은 사실이다. 그저 영주인 장관에게 흥미로운 일이 생긴 것이지.
‘이제 북방은 걱정할 것 없다.’
살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북방은 제도와 거리도 멀고 척박한 땅이기에 원활한 관리가 어려운 지역이나, 북부에 영지를 가진 장관이 그들의 수장이 된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장관은 두 차례의 전쟁에 참여하여 두 번이나 적의 수괴를 죽이는 결정적 활약을 했다. 무력을 중시하는 유목민들이 그런 장관을 존중하고 경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유목민이 아닌 귀족으로서도 황태녀의 대부이자 제국백인 장관을 따를 것이다.
장관 개인에게 너무 과도한 명예와 권한을 주는 것 같지만, 어차피 누군가가 북방과 결합할 바에는 장관이 장악하는 게 낫다.
‘나름 안전 장치도 있지.’
만일 장관이 폭주한다면 북부에 퍼진 장인어른의 파벌이 장관의 북방 파벌과 대립할 터. 수만의 유목민이 제도로 달려오는 기괴한 상황은 피할 수 있다.
물론 장관이 폭주해서 장인어른과 충돌하는 미래는 상상할 수가 없지만 말이다.
– 폐하.
그렇게 튼튼해진 북방 안보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장관이 입을 열었다.
– 송구하오나 폐하께 감히 여쭙고 싶은 것이 있나이다.
“짐에게?”
– 예, 폐하.
의외인 말이다. 장관이 나에게 무언가 묻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업무가 떨어질 거라 생각을 하는 건지, 장관은 최대한 말을 아끼는 편이니까.
이윽고 의아함 대신 흥미가 솟기 시작했다. 그런 장관이 직접 질문을 할 정도면 대체 무슨 일일지 기대가 될 정도다. 일단 표정을 보니 위급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말하라.”
– 폐하 만세,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짧은 수락에 장관은 고개를 꾸벅이며 말을 이었다.
– 위리디아 지역을 관리하던 지방관들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직할령이 많으니 일반 지방관들은 다른 지역으로 가겠지만, 수석 지방관은 잠시 대기 상태가 될 걸세. 수석 지방관 자리는 공석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 하오면 폐하. 신이 수석 지방관을 가신으로 삼아도 되겠습니까?
이미 솟구치던 흥미가 더욱 빠른 속도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수석 지방관을?”
– 예, 폐하. 위리디아 지역에 대해 수석 지방관만큼 능통한 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자작위를 주며 집사장으로 삼고자 합니다.
‘자작…’
볼이 씰룩거리는 게 느껴졌다. 단순히 전문가라는 이유로 일개 지방관을 자작에 임명하려는 패기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확실히 수석 지방관만큼 그 지역에 해박한 자는 없을 거다. 괜히 직책이 ‘수석’ 지방관이겠나.허나 그 능력을 쓰고 싶다면 단순히 고용으로도 충분한데, 가신─ 그것도 백작령의 2인자인 자작위를 주며 집사장으로 삼으려고 한다.
“영지 내의 작위 분배는 영주의 권리이다. 수석 지방관이 장관의 권유를 수락한다면 그의 직책을 거둘 터이니 뜻대로 하라.”
겨우 웃음을 억누르며 대답을 돌려줬다.
자작위는 수석 지방관이 받는다쳐도, 아직 위리디아 내에는 여러 남작위가 남아있다. 이번에 처음 본 수석 지방관에게 덜컥 자작위를 줬다는 소문이 퍼지면 야망 넘치는 인재들이 장관에게 향하겠지.
그들에게 시달릴 장관의 모습을 상상하니 참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