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11)
로판 속 공무원 411화(412/451)
제국의 반은 위대한 황실이 직접 다스리며, 나머지 반은 황실의 은혜를 받은 귀족들이 다스린다. 그런 말이 떠돌 정도로 제국 내의 황실 직할령은 넓고도 넓다. 오죽하면 황실 직할령을 관리하는 지방관들로 군단을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겠는가.
나 역시 그 수많은 지방관 중 하나로 살아갔다. 겔베인이라는 성을 황실로부터 받고, 알프레드라는 이름을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일개 관료로 살아갔다.
관료. 그것이 내 정체성이었다. 작위와는 거리가 너무도 멀어 귀족이라 칭하기 민망한 존재, 그러나 귀족이 아닌 관료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존재. 그게 나 알프레드 겔베인이었다.
‘괜찮은 삶이었지.’
찬란한 귀족이 아닌 묵묵히 헌신하는 관료로 살았으나 한 점 후회 없는 삶이었다. 나 같은 걸 높게 평가해 주신 상황 폐하의 은덕으로 무려 한 지역의 수석 지방관까지 올랐다.
비록 내가 담당하던 위리디아 지역이 귀족에게 하사되어 수석 지방관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지만, 아쉬울지언정 원통하지는 않았다. 수석 지방관이 되었다면 정말 할 수 있는 만큼 했고, 오를 수 있는 만큼 오른 것이다. 이 분야의 정점에 올랐다가 명예롭게 물러나는 것이다.
물론 내 실책이 아닌 명예로운 퇴진이기에 대기하다 보면 새로운 직책을 받을 수도 있으나, 그 대기 기간이 얼마나 될지 장담할 수 없다. 수석 지방관 자리는 공석이 없으니까.그러니 이참에 완전히 물러나고자 했다. 누릴 만큼 누린 놈이 무보직 상태로 버티고 있으면 후배들에게 해가 된다.
그래, 물러나려고 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혼란스럽다. 지금 이 상황을─감찰성 장관인 위리디아 백작 앞에 무릎 꿇은 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알프레드 겔베인. 그대는 황실의 신뢰를 받아 위리디아 지역을 훌륭히 관리하였으니, 이는 상황 폐하께서도 흡족해하실 정도였다.”
내 머리 위로 검을 들이댄 위리디아 백작의 말에 멍하니 바닥을 바라봤다. 갑자기 호출하여 검을 뽑을 때는 기겁했지만 이제는 당혹감이 가슴을 채우고 있다.
“위리디아는 한때 적대 세력과 국경을 접한 변방이었다. 때문에 5년 전 대토벌 전쟁 당시에도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으나, 그대의 능력으로 그 상처를 회복할 수 있었다.”
낯 뜨거운 말이지만 부정은 하지 않았다. 위리디아 백작의 말처럼 위리디아는 북쪽 변두리로서 여러 수난을 겪었고, 5년 전 대토벌 전쟁 때는 절망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고난을 이겨내고 위리디아를 정상화시킨 것은 내 자부심이며, 인생의 업적이다.
“이에 본작은 위리디아에 군림하는 것을 허락받은 정당한 대영주로서 선언한다.”
그렇게 말한 위리디아 백작은 아까부터 내 머리 위에 있던 검으로 가볍게 내 머리와 어깨를 두드렸다.
“본작, 칼 크라시우스 오브 위리디아는 알프레드 겔베인을 키셀레 자작으로 삼겠다. 동시에 키셀레 자작을 집사장으로 임명하니, 경은 위리디아를 위해 그 능력을 다하라.”
덤덤하게 이어지는 선언에 당혹감은 점점 커져갔다.
자작? 집사장?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귀족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일개 관료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과한 명예다. 애초에 나와 위리디아 백작은 이번에 처음 만난 사이다.
“가, 각하. 너무 과분한 명령입니다. 제가 자작이라니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발이 떨리며 말까지 더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이상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지금은 위리디아 백작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대체 뭐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다. 설마 위리디아 백작이 은퇴만 바라보는 지방관을 놀리는 건 아닐 테고, 놀릴 이유조차 없다.
문제는 놀리는 것조차 아니라면 정말 이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성격이 뒤틀린 귀족의 장난이었으면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경이 위리디아를 위해 헌신한 것을 생각하면 결코 과하지 않다. 이 제국에 경보다 위리디아의 사정에 능통한 자가 어디 있겠는가.”
바삐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위리디아 백작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과거 에이만카 대제께서 천명을 받들고 제국을 세우셨을 때, 출신과 친분이 아닌 철저히 능력과 공적으로 상대를 대하였다. 본작 역시 제국의 귀족으로서 대제의 아름다운 뜻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고는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손에 무언가를 직접 쥐여주었다.
‘인장?’
인장이다. 그것도 지방관으로서 쓰던 밋밋한 인장이 아닌 다소 화려한 인장.
“본작이 경에게 내리는 것은 결코 과하지 않다. 그동안 경이 황실과 위리디아를 위해 헌신한 대가를 받는 것이니, 이는 황제 폐하께서도 마땅하다 여기심이다.”
그 말에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오를 만큼 올랐다고 생각했다. 이제 명예롭게 은퇴하고 자식들이 출세하는 걸 볼 때라고 생각했다.
허나 눈앞의 귀족은 그것을 부정했다. 나에게는 아직 할 일이 있다고, 더 오를 곳이 있다고, 내가 달려온 삶은 여기서 멈출 것이 아니라고.
‘헌신한, 대가.’
무언가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내 삶이 처음 보는 이에게 인정받았다. 황제 폐하께서도 인정하셨다.
서서히 고개를 돌려 손에 쥔 인장을 바라봤다. 이 인장을 받아들이면 나는 작위 귀족이 된다. 내 자식들도 관료의 자식이 아닌 작위 귀족의 자식이 된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내 삶을 대가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각하를 보필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추구해야 할 삶은 묵묵히 헌신하는 관료가 아닌 생명을 불태우는 귀족이 되어야 할 것이다.
“흉흉한 말은 하지 말도록. 나이가 들면 은퇴하고 쉬어야 하지 않겠나.”
웃음기 섞인 백작 각하의 말씀에 더욱 고개를 숙였다.
이런 은혜를 받은 입장으로서 감히 쉴 수는 없다.
급한 일은 없으니 퇴근하라는 각하의 말씀에 집으로 돌아갔다. 일반 평민 가정이 거주하는 곳에 비하면 화려하지만, 귀족의 저택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장소로.
‘비싸게 지은 집이었는데.’
문득 실소가 나왔다. 지방관으로 지내며 쌓은 재산 대부분을 투자하여 지은 집이다. 내 안락한 노후를 위해 만든 집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루아침에 이 집보다 더한 것을 얻게 되었다. 자작위에 포함되어 있는 자작령, 자작령 중심지에 있는 성, 집사장으로서 원활한 업무를 위해 마련된 저택 등. 이 집이 수백, 수천 채가 있어도 얻을 수 없는 것들을 가지게 됐다.
‘이건 별장으로 삼아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유유히 집으로 들어갔다. 비록 내 재산 중에서는 가장 떨어지는 재산이 되었으나, 정만큼은 제일이었기에.
“응? 아버지, 벌써 오셨어요?”
그리고 저택에 들어가자마자 라나가 반겨주었다.
내 자식들 중 가장 영특한, 그렇기에 나처럼 지방관의 길을 걷기로 다짐한 자랑스러운 딸.
…
“라나.”
“네. 왜 그러세요?”
“제도로 가지 말고 위리디아에서 일하거라.”
“네?”
내 말에 라나는 멍하니 눈을 껌뻑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해한다. 라나가 나처럼 지방관의 길을 결정했을 때, 무조건 제도에 가서 시험을 보라고 했다. 우선 시작은 제도에서 해야 추후 발령에 유리한 것은 사실이니까. 겸사겸사 인맥이 넓어지기도 하고.
하지만 발령이니 인맥이니 철저하게 따지는 것은 결국 출세를 위함이다. 이왕 지방관이 되는 것, 최대한 높은 자리까지 오르는 게 보람차지 않겠나.
‘출세를 하려면 위리디아가 유리하다.’
허나 백작 각하는 처음 본 나를 자작으로 임명하셨다. 다른 조건은 따지지 않았다. 그저 각하께서 생각하시기에 쓸만한 인물을 중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괜히 멀고 경쟁자도 많은 제도에 갈 필요는 없다. 백작 각하 곁에서 능력을 보이는 게 출세에 유리하다.
“그, 아버지? 저야 위리디아가 익숙하고 친구도 많아서 좋기는 한데, 갑자기 왜…?”
한참이나 눈만 깜빡이던 라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다행히 위리디아에 남으라는 말에 반감은 없는 듯하다.
“제도로 갈 이유가 사라졌다.”
“네?”
“이것부터 보거라.”
품 속에서 자작의 인장을 꺼내 라나에게 보여줬다.
그날, 라나는 물론 다른 가족들이 보인 반응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
집사장을 성공적으로 포획─ 아니, 등용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집사장이라는 존재는 명실상부한 영지의 2인자다. 영주가 영지에 있으면 영주의 제일가는 조언가이자 참모로, 영주가 부재중이면 업무를 대신하는 대리인으로 맹활약하는 귀중한 존재다.
그리고 나는 영지에 있는 날보다 제도에 있는 날이 압도적으로 길 것이 뻔한 놈이다. 그런 만큼 유능하고 성실한 집사장의 존재는 절실했다.
‘딱 좋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의미로 이번에 등용한 집사장은 나를 위해 하늘이 내린 인물이다. 위리디아에 대한 지식도 많고, 경험도 풍부하고, 작위를 던져준 나에게 그럭저럭 충성심도 가질 거다.
결정적으로 원래 업무가 위리디아 관리였으니, 내가 자리를 비워도 불평하지 않을 거다. 원래 하던 업무를 작위와 직책을 가지고 하는 거잖아. 오히려 감사를 표하지 않을까?
‘이제 다른 직책만 채우면 돼.’
슬며시 손에 든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집사장을 등용하기는 했으나 딱 거기까지다. 집사장 외에도 영지 운용에 필요한 직책은 많고도 많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시종장, 시녀장, 재무감, 서기관, 호위대장, 마사관 정도가 있으니까. 더 자세히 따지면 배는 늘어날 거다.
‘…많네.’
망할, 이걸 언제 다 채우냐.
그냥 다른 지역으로 갈 일반 지방관들도 죄다 등용할까? 물론 그딴 짓을 하면 황제가 ‘지랄은 거기까지다.’ 라면서 명치를 후릴 거다. 어차피 무보직이 될 수석 지방관 정도는 가져가도 되지만, 일반 지방관들은 당장 일해야 할 노동력이니까.
“각하.”
정 사람이 없으면 타일글레헨에 있는 가신들 가족이라도 납치할까 고민하는 사이, 문밖에서 집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카이타나 백작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카이타나 백작이 열셋 중 가장 먼저 왔다.
‘빨리도 왔네.’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제 카이타나 백작을 시작으로 북방에 있는 대영주 전원이 위리디아 백작령에 도착할 터.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아가는 꼴이다.
아니, 사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북방 파벌.’
머리가 지끈거린다.북방 대영주들이 위리디아까지 오는 이유는 파벌 결성을 위해서다. 파벌 구성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우정과 협력을 맹세하는 것보다 확실한 파벌 결성은 없지 않나.
그리고 위리디아에 집결한 대영주들은 파벌 결성이 끝나자마자 ‘잘 놀다 갑니다.’ 라며 돌아갈 예정도 아니다.곧 황제 즉위 기념 연회가 열리니, 어차피 영지로 돌아가 봤자 다시 제도로 가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즉, 연회가 열릴 때까지 위리디아는 열셋이나 되는 대영주들을 데리고 있어야 한다.
동시에 제국의 귀족들이 모일 즉위 기념 연회에서─ 나는 열셋의 대영주들을 이끌고 연회장에 입장해야 한다.
‘와.’
정신이 혼미해졌다. 연회장에 파벌을 이끌고 입장하다니,그거 누가 봐도 과시 아니냐.
다른 귀족들이 나를 무슨 시선으로 볼지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