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12)
로판 속 공무원 412화(413/451)
바란디가 후작, 바탈 구르트 오브 바란디가.
카이타나 백작, 다란 크잔 오브 카이타나.
키르기아 백작, 크추르 다리안 오브 키르기아.
비르스 백작, 네빌라 루툰 오브 비르스.
디게라 백작, 하랄 문게르테 오브 디게라.
이킬란 백작, 사르나 시크라티하 오브 이킬란.
고르밍 백작, 길케 코르코 오브 고르밍.
유드허 백작, 나차브 올란 오브 유드허.
라만디아 백작, 우간 고르타 오브 라만디아.
키탈 백작, 이라드 나틀란 오브 키탈.
라카르 백작, 호코르 비유 오브 라카르.
로로마나 백작, 엔지 아라하 오브 로로마나.
차라울 백작, 자야 타타키아 오브 차라울.
마지막으로 위리디아 백작, 칼 크라시우스 오브 위리디아.
이상 열넷의 대영주가 위리디아 백작령에 집결하였다. 단순한 귀족도 아닌, 작위 귀족도 아닌, 무려 하나의 대영지를 관리하는 대영주들이 집결한 것이다.
“제국과 북방은 오랜 시간 동안 대립하였으나, 이는 두 세력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벌어진 안타까운 역사였습니다. 또한 이 간극을 이용하여 두 세력의 불화를 일으킨 사특한 자들도 존재하였으니, 평화를 추구한 현자들은 그 사특한 자들에게 탄압되어 눈물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카이타나 백작을 시작으로 북방의 대영주들이 전부 집결한 연회장. 그 연회장에서 나는 테이블에 놓은 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제국과 북방의 안타까운 대립, 대립을 야기한 역적, 그 역적의 분탕질 속에서 죽어간 선량한 현자들. 제국과 북방은 마땅히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가 될 수 있었으나, 소수의 역적 때문에 대립하였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물론 그 역적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허나 피와 눈물이 흐르는 대립에 하늘도 안타까웠는지, 드디어 제국과 북방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차가운 대립이 아닌 따뜻한 공존이 우리에게 찾아왔습니다.”
그 말과 함께 한걸음 한걸음 대영주들에게 다가갔다. 나처럼 잔을 들고 있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대영주들에게 다가갔다.
“이는 실로 에넨의 가호와 대제의 보우하심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평화를 추구한 현자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제국은 길고 긴 대립의 역사를 끝내고 화합과 공존의 역사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높이 들었다. 마치 하늘에 바치는 것처럼, 온 세상에 과시하는 것처럼.
동시에 나를 보고 있던 열셋의 대영주─ 아니, 대립의 역사를 끝내고 제국의 품에 안긴 유목민들도 잔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열었습니다.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오직 우리만이 유일한 역사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과장이 아니다. 인류 역사상 정주민과 유목민이 진정으로 하나가 된 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이 북방 전역을 장악한, 유목민들이 황제에게 칸의 작위를 바친 현재만이 정주민과 유목민이 하나가 된 순간이다.
“그렇기에 이 위리디아 백작, 칼 크라시우스 오브 위리디아는 에넨과 대제 앞에서 맹세하겠습니다. 이 평화와 번영의 역사가 무너지지 않게 나아가겠다고. 비로소 이웃이 된 정주민과 유목민의 가교가 되겠다고.”
이 선언에 유목민 대영주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여명 교단의 신자로서 에넨 앞에, 제국의 귀족으로서 대제 앞에 맹세하였다. 이는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 입장에서 죽음도 방해할 수 없는 최고의 맹세. 아마 대영주들이 생각하기에는 내가 북방 파벌을 영원히 이끌고 지키겠다며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신앙심도 충성심도 없다. 그러나 내 평온한 삶을 위해서는 북방 파벌의 수장으로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 괜히 북방을 홀대하면 황제의 갈굼, 빈정이 상한 북방의 반항을 동시에 수습해야 하니까.
이유는 다소 이상하지만 아무튼 결과는 완벽한 기묘한 맹세. 그 맹세 아래 열넷의 대영주는 진심을 다해 외쳤다.
“본작, 칼 크라시우스 오브 위리디아는 이 자리에 모인 친우들의 우정과 대의를 잊지 않겠습니다! 천명의 수호와 대륙의 질서를 위하여!”
“””천명의 수호와 대륙의 질서를 위하여!”””
이윽고 잔에 든 술을 호쾌하게 들이마시는 대영주들을 보며 나도 술을 들이켰다.
딱히 북방 대영주들과 우정을 쌓지도 않았고, 이들의 대의도 알지 못하나─ 아무튼 북방 파벌이 출범하였다. 나는 북방의 수장이 되었고, 내가 의무를 다하는 한 북방은 내 명을 따르며 존중할 것이다.
…그래, 의무를 다하는 한은 말이다.
‘환장하겠네.’
헛웃음이 나왔다. 솔직히 나는 사교계에 자주 얼굴을 비추는 편이 아니나, 한 파벌의 파벌장이 된 순간부터 활발한 사교 활동을 보여야 한다. 내가 쥐 죽은 듯이 지내면 북방 대영주들이 다른 파벌장을 찾아 이탈할 확률이 높으니까.
중앙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본토 귀족들과의 교류를 위해 파벌을 결성한 것 아닌가. 그런데 정작 파벌장이 히키코모리면 파벌원들이 서운해 할 것이다.
‘파벌장의 무게…’
슬며시 눈을 감고 말았다. 가장의 무게도 아니고 파벌장의 무게라니, 내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백작. 이번에는 제가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멍하니 서있자니, 어느새 술병을 든 바란디가 후작이 다가왔다.
새삼스럽지만 인지부조화가 올 것 같다. 아무리 역사와 전통을 지닌 본토 귀족과 신진 귀족의 차이라지만, 후작이 백작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신분제의 질서를 부수고 있는 것 같아 민망할 지경이다.
“제가 후작 각하께 먼저 따라드리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습니까?”
“이런, 그렇습니까? 서로 작위가 바뀐 것 같아 민망하군요.”
누가 들어도 농담인 말이지만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백작이 파벌장, 후작이 파벌원인 파벌은 너무 이상하다.
황제가 ‘이건 이치에 맞지 않은 현상이다.’ 라며 위리디아 백작령을 후작령으로 올려버리지 않을까 공포스러울 정도로.
“…생각해 보니, 우정 사이에 작위의 높고 낮음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겠군요.”
품 속의 인장이 후작을 상징하는 백색 인장으로 진화하는 끔찍한 상상을 뒤로하며 겨우 입을 열었다.
현 후작들은 전부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는 거물들이다. 그나마 세력이 미약한 바란디가 후작마저 북방 유일의 후작이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강등될 우려는 없다시피 한 존재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자. 내 작위는 백작이 최종선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북방 파벌 결성을 기념하는 연회를 마친 후, 대영주들이 묵을 방을 안내해줬다.
다행히 이 위리디아가 과거에는 북방 토벌군 집결지였던 만큼 고위직이 묵을만한 방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이제는 북방 토벌군이 아닌 북방 유목민이 묵는다는 게 아이러니한 점이지만.
– 이제 분쟁이 아닌 화합의 시대가 찾아왔다는 의미겠지. 그 선두에 칼 군이 있다는 것이 기꺼울 따름일세.
“과찬이십니다, 각하.”
전승공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황제의 암묵적 명령으로 짬을 처맞은 입장에서 화합의 선두니 뭐니 하는 건 낯 뜨거운 극찬이다.
‘필두 노예면 모를까.’
씁쓸한 자기 객관화를 하게 됐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기껏 파벌 결성 축하 인사를 건네는 전승공 앞에서 우중충한 얼굴을 보일 수는 없으니.
‘소식이 빠르기는 하네.’
순간 경이로운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안 그래도 공작이자 북부 파벌의 수장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승공인데, 이제는 황제의 장인이 되어서 그런지 정보 습득 속도가 미친 듯이 빨라졌다. 황제와 파벌 당사자들밖에 모르던 북방 파벌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파벌 결성 당일에 축하 인사를 건네는 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물론 전승공이 먼저 접한 정보로 수작을 부릴 사람은 아니나, 앞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전승공도 알 것이라 생각하니 민망할 정도─
– 그건 그렇고, 이제 칼 군이 북부 대공이라 불리겠군.
…?
“예?”
나도 모르게 반문을 하고 말았다.
‘북부 대공?’
듣기만 해도 끔찍한 단어다. 이 제국에 대공이라는 작위는 오직 하나뿐이다. 황위 계승자에게 붙는 카바슐레이츠 대공, 오직 하나뿐.
허나 내 반응에도 전승공은 그저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아니, 남한테 폭탄 던지고 웃기만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 내 소싯적 별명이라네. 영지가 북부라 그런가, 어느새 북부 대공이라는 별명이 붙었었지.
“…귀족에게 대공이라는 별명이 붙어도 되는 겁니까?”
– 남들이 대공이라 불러봤자 내 작위는 공작 아닌가. 상황 폐하께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셨으니 걱정 말게.
전승공은 연신 웃었지만 절대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아무리 공작이라도 일개 귀족에게 대공이라는 별명이 붙은 건 너무 역적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걸 의심병 환자인 상황이 넘어갔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의심병 여부를 떠나서 방계 황제가 공작의 대두를 좌시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내 의문을 눈치챘는지, 전승공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 옛날에 유행한 로맨스 소설 중에 북부 대공이라는 인물이 있었다네. 뮤노 제국 시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이기도 하고, 결국 황실에 굴복한 인물이기도 했으니 별일 없었지.
‘아.’
그 말에 납득하고 말았다. 진지하게 전승공의 권력과 권위를 높게 평가하여 붙은 별명이 아니라, 귀족 영애들이 즐겨본 소설 때문에 붙은 별명이라는 거 아닌가. 그런 별명 때문에 황제가 과민 반응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북부 대공?’
잠시 통신구에 비친 전승공의 모습을 훑어봤다.
나이가 있어서인지 흰머리가 섞이긴 했으나 찬란한 은발, 뉘렌 공작가의 상징인 푸른색 의복. 결정적으로 제국군을 관장하는 제국군 부사령관이라는 직책.
정말 그림에 그린 듯한 북부 대공이기는 하다. 게다가 전승공이 젊었을 적에는 여러 영애들의 구애를 받은 미남이라고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이젠 내가 북부 대공이라고?’
전승대공을 향한 감탄은 어느덧 착잡함으로 변했다. 전승공의 말처럼 북부 대공이라는 별명은 나에게 계승될 판이다.
전승공보다 북부에 있는 영지, 정력적인 북방 유목민들을 통솔하는 파벌장, 두 차례에 걸친 종군 경험.
‘시발.’
애석하게도, 나 역시 그림에 그린 듯한 북부 대공이었다.그것도 아직 20대인 현역 북부 대공.
‘…그럼 황금공은 남부 대공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로맨스 소설에는 차갑고 무력이 강한 북부 대공 대신, 능글 맞고 돈이 많은 남부 대공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딱이다. 누가 봐도 황금공이 남부 대공이다. 심지어 황금공의 부인은 열둘이다.
‘로판 맞구나.’
새삼스레 이 세상의 정체를 다시금 깨달았다.
이상한 곳에서 이 세상이 로판이라는 걸 되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