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13)
로판 속 공무원 413화(414/451)
근래 들어 영지로 돌아간 날보다 제도의 저택에서 지낸 날이 더욱 많았다. 영지와 의회를 오고 가는 시간마저 아까운 상황이니 부득이한 선택이다.
그래, 실로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온 관료들이 즉위 기념 연회를 준비 중인 만큼 제국백으로서 그 준비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 어떠한 신하보다 황실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것이 제국백이니까.
게다가 나는 제국백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확정되었고, 에리히가 졸업하면 의원직에서도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 즉, 이 연회가 내가 관료인 상태에서 준비하는 마지막 즉위 기념 연회. 그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40대에 은퇴라.’
잠시 펜을 내려놓고 창문 밖을 바라봤다. 처음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을 때는 죽을 때까지 의원으로 지낼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40대 은퇴라는 선물을 받게 되었다.
남들보다 이른 은퇴에 당혹스럽지 않았다면 당연히 거짓말이겠지만, 내 은퇴는 황실과 제국을 위한 상황 폐하의 뜻이니 기꺼이 따랐다.
‘부자가 나란히 고위직에 있는 건 곤란하지.’
그리고 아들을 위한 길이기에 물러났다.
칼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여 빠르게 출세하고 있다. 비록 종군이라는 위험한 방법으로 증명하였으나,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좋게 끝났다.
그런데 그런 칼의 아비인 내가 현직 제국백이자 의원으로 버티고 있다? 부자가 나란히 고위직에 있는 것을 우려하는 발언이 나올 수도 있고, 시기하는 자들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니 아비인 내가 물러나 칼의 앞길을 여는 것이 옳은 길이다.
‘…이 정도로 열릴 줄은 몰랐지만.’
슬쩍 입꼬리가 올라갔다. 방금 전 칼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기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 요즘 새로운 이웃들과 친분을 나누느라 이제야 연락을 드립니다.
갑자기 빛을 내뿜은 통신구, 통신구를 들자 나타나는 칼의 얼굴.
다소 피로에 찌든 얼굴로 의례적인 안부 인사를 건넨 칼은 이윽고 하소연을 하듯 말을 이었다.
– 아무래도 새로 귀족이 된 분들이니 제도 환경을 낯설어 하지 않겠습니까. 이웃인 제가 그분들을 직접 안내하기로 했습니다.
이웃이나 안내라는 말로 평범하게 포장했으나, 실상은 파벌을 의미한다는 건 나도 알고 칼도 아는 사실이었다.
놀라운 일이다. 자식의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 기꺼이 상황 폐하의 뜻을 따랐으나, 1년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 질주할 줄은 몰랐다. 아니, 어쩌면 진작 이렇게 될 것을 내가 막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정작 칼은 난데없는 파벌 결성에 귀찮아하는 것 같지만─ 아비로서는 흐뭇하기 그지 없다.
“한때는 적이었으나 이제는 누구보다 친밀한 이웃이 될 수 있겠구나. 그들이 너의 인품을 알아보고 다가온 것이니, 신의와 우정으로 대해주거라.”
– …예, 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서 칼이 원치 않았을 대답을 돌려줬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아비에게 연락을 했을 칼에게는 미안한 일이나,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옳다.
그들을 신의와 우정으로 대한다면 그들도 칼의 가장 막강한 친우이자 방패가 될 것이다. 혹은 검이 될 수도 있다.
당장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칼도 언젠가는 그들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기꺼이 활용할 것이다.
‘언젠가는, 이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칼이 자신 손에 놓인 파벌을 작정하고 휘두른다면, 위리디아 백작이라는 작위는 후작이 될 수도 있겠다고.
‘크라시우스 가문에서 후작.’
웃음이 나올 것 같다. 제국백 가문인 크라시우스에서 후작이 나오다니, 불과 몇 년 전의 내가 들었다면 헛소리를 한다며 무시했을 말이다.
‘부인에게도 말해줘야겠어.’
책상 한 쪽에 놓인 통신구로 손을 뻗었다. 나에게도 겨우 연락을 한 칼이니 부인에게 연락을 했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지금쯤 북방 대영주들과의 우호를 다지느라 바쁠 테지.
그러니 부인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자. 부인도 귀족가의 안주인으로서 파벌의 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
분명 부인도 굉장히 기뻐할 거다. 부인이 걱정하는 건 칼이 전쟁에서 다치는 것이지, 인맥을 얻는 것이 아니다.
***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황제 즉위 기념 연회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망할.’
정신이 아찔하다. 이제 대영주 열셋을 이끌고 위풍당당히 연회장에 입장해야 한다. 제국 전역에서 모였을 귀족들 앞에서 ‘얘네가 내 부하들이다. 멋지지?’ 라고 온몸으로 보여야 하는 것이다.
– 우리 애들이 멋지기는 하지.
‘제발 조용히 하십쇼.’
그 와중에 자기 새끼인 유목민 자랑을 하는 어느 신 때문에 더욱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니, 애초에 제사장도 신앙심이 없는데 우리 애들은 무슨 우리 애들이야. 자비심이 너무 넘치는 거 아니냐고.
– 그냥 네가 내 제사장이라 생각하려고. 그러니까 마음이 편하더라.
‘그게 뭔─’
“각하.”
행복회로를 돌리다 못해 불타버린 영원한 푸른 하늘의 발언에 반박을 하려다, 황실 기사단장의 목소리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검문이 끝났으니 들어가셔도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길을 열어주는 단장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혼자 왔다면 프리패스에 가까운 약식 검문만 받고 통과했겠으나, 아무래도 일행이 열셋이나 있다 보니 검문에 시간이 좀 걸렸다.물론 그마저도 인원에 비하면 빠른 속도였지만.
“아, 그런데 각하.”
그렇게 단장과 가벼운 목례를 나누며 들어가려는 찰나, 단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상단에는 어느 분의 이름을 적으면 되겠습니까?”
‘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확실히 그 문제가 있었지.
슬쩍 황실 기사가 들고 있는 방문자 명단을 바라봤다. 검문을 정상적으로 마치고 입장한 귀족 및 관료들의 이름은 황실 기사단이 관리하는 명단에 적으며, 개인이 아닌 단체로 입장하면 대체로 가장 작위가 높은 자, 혹은 파벌장의 이름을 먼저 적는 것이 관례다.
관례가 둘로 나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보통 파벌장의 작위가 그 파벌 중 가장 높은 편이니까.
‘우리는 아니네.’
허나 유감스럽게도 북방 파벌은 작위가 높은 사람 따로, 파벌장 따로다. 이런 근본 없는 파벌이 있다는 것에 가슴이 옹졸해질 정도다.
“바란디가 후작 각하를 상단에 적어주시면 됩니다. 우리 중 유일한 후작이시니 그게 마땅하지요.”
잠깐 고민한 끝에 전자를 택했다. 어차피 내가 파벌장이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니, 이럴 때 틈틈이 바란디가 후작의 권위를 챙겨주는 게 맞─
“아니요. 위리디아 백작을 적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바란디가 후작의 말에 빠르게 명단이 작성되었다.
후작보다 위에 적히는 백작을 보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
황금공 각하를 중심으로 뭉친 파벌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이제 북쪽으로 보낼 물자를 마음껏 해상으로 옮길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동안 육로로 옮기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파벌원이 둘만 모여도 돈을 주제로 대화하는 경우가 잦다는 것이다. 다들 상단을 굴리는 입장이다 보니 필연적인 일.
물론 싫다는 건 아니다. 돈과 시장에 대해 논하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만이 황금공 각하와 함께 나아갈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다들 들으셨습니까? 북부에서 조금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북부요? 아, 그 일 말이군요.”
북방이 안정돼서 유일하게 바다와 접한 황실 직할령이 안전해졌다느니, 덕분에 북쪽으로 향하는 해운이 활발해졌다느니, 그동안 정박료를 후려쳐 받던 것들이 손가락을 빨게 돼서 즐겁다느니, 대충 그런 얘기를 하던 파벌원들의 시선이 은근히 나에게 향했다.
그 시선에 그저 미소만 지었다. 저들이 말하는 북부의 이변은 예비 사위와 관련된 일이니까.
‘사위를 거치지 않으면 북방과 거래하기 힘들겠지.’
보통 유목민들은 북부에 위치한 영지와 거래를 하였다. 허나 최근 들어 사위의 영지인 위리디아에 몰리기 시작했고, 다른 시장은 하나둘 활기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크게 눈 여겨 볼 사태가 아니다. 애초에 유목민과 거래를 하는 건 북부 담당이었고, 우리는 해운을 통해 제국 남부와 서부, 혹은 제국 동쪽의 국가들과 거래하는 편이다. 유목민들이 위리디아와 독점 거래를 한다고 해도 당장은 타격이 없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치명적인 일이다. 이제 저 드넓은 북방은 개발될 터이고, 유목민들은 제국의 물자를 빨아들일 것이다. 누구도 개척하지 않은 거대한 시장이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유목민과 우호 관계를 맺은 예비 사위의 허락─ 혹은 묵인이 있어야 한다.
“장관이 종군 중에 북방 대영주들과 친분을 제법 쌓은 모양 같군.”
나에게 쏠리던 시선은 황금공 각하의 발언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본작이 듣기로는 장관이 직접 설득하여 북방 대영주들이 투항했다 들었네. 그러니 그들이 장관에게 은혜를 느끼는 것도 당연하겠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거 참, 워낙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 소식을 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말과 함께 북부의 이변을 논하던 주제는 자연스레 사그라들었다.
방금 황금공 각하의 말씀은 ‘위리디아 백작의 북방 영향권을 인정’ 한다는 의미였으니까. 더 이상 우리가 논할 것이 아니다.
“이런, 본인 얘기를 했다고 바로 오는군.”
그렇게 파벌원들에게 입장을 표명한 황금공 각하는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픽 웃음을 흘리셨다.
나 역시 각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움찔하고 말았다.
‘…단순 친분 수준이 아니었나.’
우르르 들어오는 열이 넘는 숫자의 남녀.그 선두에는 예비 사위가 있었다.
그래, 선두다. 양위식 때 스치듯이 본 바란디가 후작마저 사위의 뒤에서 걷고 있었다. 아무리 신진 귀족이라도 후작이 백작에게 앞을 양보한 것이다.
어느새 나뿐만 아니라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사위에게 쏠렸다. 개인으로도 막강한 권한을 쥐고 있던 사위에게 파벌이라는 단체의 힘까지 붙어버렸다.
심지어 그저 그런 파벌이 아니다. 기병 전력을 완벽히 회복하지 못한 제국군은 사위가 장악한 유목민 전력을 갈망할 것이고, 상인이라면 드넓은 개척지와 시장 인구를 탐낼 것이다. 하나만 휘둘러도 정계를 휘저을 수 있는 검을 양손에 쥔 것이다.
‘조만간 후작이 되겠어.’
마치 과시하듯 걸음을 옮기는 사위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북방 전체를 등에 업은 위세, 감찰성 장관이라는 권한.
이건 어지간한 후작가를 제치고 후작에 등극할 수 있는 수준이다. 저런 인물이 후작이 아니면 후작의 최소 자격이 너무 높아진다.
‘사위가 후작이라.’
새삼스럽지만 이리나는 내 딸이 확실하다.
그게 아니라면 사위가 최고점을 찍기 전에 낚아챈 솜씨를 설명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