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14)
로판 속 공무원 414화(415/451)
예상대로 연회장에 입장하자마자 온갖 시선이 쏠렸다. 보통 작위를 가진 귀족을 일반 귀족보다 높게 쳐주고, 작위 귀족 중에서도 백작위 이상의 귀족을 고위 귀족이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백작마저 영지의 유무나 격에 따라 위세가 갈리니, 열넷의 대영주가 일제히 입장하는 건 귀족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그 열넷 중 신진 후작과 장관 내정자가 포함되어 있다. 이 파벌이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눈치챘을 터.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 알찬 구성이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는지, 그저 쳐다보기만 하고 다가오는 사람은 없─
“웬일로 네가 뭉쳐 다니느냐.”
있었다. 후작이고 장관 내정자고 대영주고 싸그리 무시하며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남들보다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남성, 철혈공이 귀족들 사이를 가르며 다가오자 내 뒤에 있던 대영주들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눈치와 줄타기로 작위를 얻은 양반들이지만 유목민은 유목민. 무인으로서 더욱 강한 무인을 보니 절로 위압이 된 모양이다.
“장인어른.”
일단 이쪽으로 다가오는 장인어른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장인어른의 표정이 희미하게 부드러워졌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각하라는 딱딱한 호칭이 아닌 장인어른이라 불러서 만족스러우신 모양이다. 가족의 정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니까.
“젊은 놈이 다 늙은 나보다도 늦으면 어쩌자는 거냐.”
“아직 정정하시면서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솔직히 장인어른께서 저희 아버지보다 건강하실 겁니다.”
“말은 잘 하는구나.”
구박 같은 인사를 덕담으로 받아치자 장인어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주 미세하지만 확실히 올라갔다.
장인어른이 노화에 은근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건 마르가 알려준 귀중한 정보다. 그런 만큼 이런 단순한 덕담이 무엇보다도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다.
“하긴. 남들과 다니려면 언변이 중요하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우들이 있다 보니 절로 늘더군요.”
그리고 자연스레 북방 대영주들을 가리켰다. 장인어른이 나와 함께 입장한 파벌원들을 언급했으니, 장인어른의 사위인 내가 파벌원들을 소개하는 것이 도리다.
감히 하급자가 중개자를 거치지 않고 초면인 상급자에게 공적 용무 없이 말을 걸어서는 안 되니까. 아무리 후작이나 백작이라도 공작 앞에서는 철저한 아랫사람이다.
“특히 바란디가 후작 덕에 친우와 함께 하는 즐거움을 배웠습니다.”
그러자 장인어른의 시선이 바란디가 후작에게 향했다.
“사위의 친우면 남이라고 할 수 없지. 앞으로도 좋은 관계로 봤으면 좋겠군.”
“물론입니다, 각하. 위리디아 백작과 변치 않을 우정을 이어나가겠습니다.”
이윽고 장인어른이 손을 내밀자 바란디가 후작은 그 손을 양손으로 잡으며 완벽한 각도로 허리를 숙였다. 공작이 이 제국 내에서 어떠한 존재인지를 파악하고 있어야 가능한 자세였다.
조금 경이로운 감정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바란디가 후작에게 미안하지만, 아마 카간 앞에서도 저런 각도를 보이지는 않았을 거다.
‘카간보다 장인어른이 더 무겁게 느껴지겠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바란디가 후작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당장 자신을 터치하지 않고 제국과 전쟁 중인 카간, 파벌장의 장인이자 자신을 말 한마디로 흔들 수 있는 공작. 이 기적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후자가 더 무서울 수밖에 없다.
나도 지금은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 상사인 황제가 더 개 같으니까. 죽은 카간과 도르곤보다는 산 황제가 개새끼지, 아무렴.
“이는 그대들에게도 하는 말이다. 부족한 사위지만 잘 부탁하지.”
그 와중에 바란디가 후작과 악수를 나눈 장인어른은 다른 대영주들에게도 시선을 돌려 인사를 건넸다.
이례적인 일이다. 아무리 백작이 고위 귀족에 속하지만 공작은 그러한 백작을 가신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 적당히 후작 정도와 말을 섞고 물러나는 것이 공작의 체면을 위함인데, 장인어른은 친히 백작 파벌원들에게 말을 걸었다.
“여, 영광입니다, 각하.”
제국의 예법을 배운 대영주들도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지, 프로 앞잡이 카이타나 백작만이 겨우 답을 할 수 있었다.
허나 이건 다른 대영주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카이타나 백작이 특이한 거다. 장인어른도 오직 한 명만 대답한 것에 대해 별 질책 없이 고개를 끄덕이실 정도니.
“사위.”
“예, 장인어른.”
도로 나를 쳐다보는 장인어른께 고개를 숙이자, 장인어른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하셨다.
“유목민의 용맹은 오직 제국만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그 용맹한 전사들이 사위의 친우가 되었으니, 사위가 제국을 위해 마땅히 우정을 이어가야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미약한 안도감이 들었다. 장인어른이 친히 백작들과 말을 섞는 친근감을 보여서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마지막에 직설적인 요구를 하시니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겉으로 보면 ‘긴 세월 동안 대립한 유목민과 친우가 되었으니 평화를 위해 노력하라.’ 라는 아름다운 덕담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달랐다.
‘말 필요하시구나.’
장인어른은 그냥 말이 필요하신 거였다. 유목민의 용맹이나 제국을 위하라는 말을 하시는 걸 보면 확실하다.
하긴. 이제 북방이 제국의 품에 안겼으니 타국과 국경을 접한 건 동부가 유일하다. 그리고 장인어른은 동부를 책임지는 공작. 중요한 군사 전략 물자인 말 수급에 열의를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거 공개 입찰이잖아.’
그렇기에 장인어른은 모든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과시한 것이다. 북방 대영주들을 통솔하는 파벌장이 내 사위고, 파벌원 하나하나도 귀하게 여길 예정이니 명심하라고. 나보다 먼저 상회 입찰하는 놈이 있으면 아작을 내주겠다고.
너무 화끈한 선포였지만 뭐, 사리사욕도 아닌 국경 방위를 위한 선포인데 아무렴 어떤가 싶다. 심지어 싸게 팔라는 것도 아니고 물량을 우선적으로 구입하겠다는 거잖아.
‘오히려 좋아.’
게다가 장인어른의 영지는 군수업의 중심지다. 이는 대장간의 역할을 조금만 틀면 군수품뿐만 아니라 평범한 공산품을 대량 생산할 수 있다는 의미.
여차하면 북방의 말을 돈이 아니라 공산품과 교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유목민 입장에서도 썩 나쁘지 않은 거래겠지.
“명심하겠습니다.”
사실상 먼저 팔겠다는 확답에 장인어른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 역시북방을 달리던 말들이 동부 왕국들을 쥐어팰 걸 생각하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망할 놈들, 우리가 온몸으로 유목민 탱킹 할 때는 편했겠지.
이제 너희가 구를 차례다.
장인어른과 인사를 나눈 이후로는 다시 시선만 받게 되었다. 혹여나 다가오고 싶은 사람이 있더라도, 이미 장인어른이 ‘내 말에 상회 입찰 거는 새끼는 죽여버리겠다.’ 라고 선언한 상태다. 괜히 우리한테 접근했다가 공작의 따뜻한 시선을 받기는 무섭겠지.
물론 어느 혼혈 엘프 공작은 아무리 장인어른이라도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기에 거침없이 다가왔다. 애초에 마탑주라 말 같은 거에 관심도 없고.
“이제 연회만 끝나면 아카데미로 복귀하겠구나.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단다.”
아무튼 장인어른 때와 달리 잠시 파벌원들과 떨어져 구석으로 향하자, 베아트릭스는 작게 영창을 읊은 후 속삭였다. 아마 우리가 나누는 대화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마법을 쓴 모양.
“나도 보고 싶었어. 텔레포트만 쓸 수 있었으면 매일 아카데미에 갔을걸?”
그렇기에 베아트릭스를 껴안으며 답하자 흡족한지 귀를 파닥였다.
이 파닥임, 내가 아는 베아트릭스가 맞다. 너무 안정적이야.
“흐으읏─!”
“아, 미안.”
너무 안정적이라 무심코 만지작거리고 말았다. 민감한 부위라는 걸 알면서 나도 모르게 그만.
민망함에 손을 떼려고 하자 베아트릭스의 손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힘으로 쉽게 털어낼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너무 다급한 손짓이었기에 멈칫하고 말았다.
“계, 계속해도 된단다.”
이윽고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에 말없이 귀를 매만졌다.뭔가 모양새가 이상하지만 선공을 날린 건 나니까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이것도 스킨십의 일종이지. 상대가 원하는 스킨십만큼 애정을 나누는 방법이 어디 있겠나.
“저기, 아가?”
잠시 기묘한 자기합리화를 시작할 무렵, 베아트릭스의 목소리 덕분에 상념을 끊을 수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니?”
“응. 얼마든지.”
의외인 말이었지만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베아트릭스가 나에게 물어볼 것이 있나 싶다가도, 나랑 같이 우르르 입장한 북방 파벌을 생각하면 질문거리는 많─
“마르는 언제 편히 대할 생각이니?”
“응?”
너무 의외인 말이 튀어나왔다.
‘편하게?’
머리가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언제 편하게 대할 거냐니, 이미 그러고 있지 않나?
마르를 애칭으로도 부르고, 툭하면 무릎에 앉힌 채로 껴안고, 내가 마르의 무릎에 눕기도 하고, 이마나 볼에 입맞춤을 하기도 하는 중이다. 이만큼 편하게 대하는 것도 드물 텐데?
그런 심정을 담아 멀뚱히 눈만 깜빡이자 베아트릭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쯤 마르에게 말을 놓을 건지, 그걸 묻는 거란다.”
“…….”
…
아.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다. 그 당연한 걸 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한 거지?
‘마르한테만 존대를 쓰고 있었잖아.’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연인들 전부에게 존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연상인 연인에게 존대를 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 애초에 연상에게 존대를 한다고 쳐도 마르는 나보다 연하다. 오히려 베아트릭스에게 존대를 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너무 익숙해졌나?’
내가 마르를 처음 만난 건 약 2년 전, 공작인 장인어른의 소개로 만난 것이다. 그렇기에 철저히 상호 존대를 하며 대화를 나눴고, 그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이 존대를 너무 당연한 걸로 생각해서 차마 바꾸지도 못한 것이다.
‘하.’
자괴감에 한숨이 나올 뻔했다. 부부끼리 서로를 존중하며 존대를 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럴 거면 여섯 명 전원에게 그래야 했다. 마르에게만 그러는 건 차별이나 다름없는 일.
연회가 끝나면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해야겠다.
“아, 아가…!”
“아.”
그 전에 눈앞의 베아트릭스에게 먼저 사과해야 할 것 같지만.
어느새 파르르 떨리는 몸과 붉게 물든 얼굴, 눈물이 맺히기 직전인 눈.
마르 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 진심 쓰다듬기로 귀를 만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