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15)
로판 속 공무원 415화(416/451)
마르에 대한 기묘한 차별을 깨닫고 나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오죽하면 황제의 연설조차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정도였을까.
물론 의례적인 말로 가득했을 연설이니 듣지 않아도 문제 없겠지만.
“사위가 기껏 제도로 왔는데 정작 그 아이가 없군. 안타까운 일이야.”
“저도 아쉽습니다. 어서 방학이 돼야 같이 지낼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황제의 말을 듣지 못할 정도로 속내가 복잡했으나─ 겉으로는 최대한 덤덤한 모습을 보였다. 오랜만에 장인어른들이 한곳에 모여 인사를 나누는 시간인데, 사위가 홀로 심각한 얼굴이면 곤란한 일이다.
지금도 에르제베트의 아버지인 이오네스 후작이, 내 다섯 번째 장인어른께서 웃고 계시지 않나.
“그래도 연락은 자주 하는 것 같더군. 앞으로도 그렇게 해주게나.”
“물론입니다, 장인어른.”
내 손을 부여잡으며 부탁하는 다섯 번째 장인어른을 향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제베트는 연락이 오지 않으면 먼저 연락을 거는 당찬 아이니 걱정할 것 없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하여 장인어른을 민망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루이제는 학생이라 다행입니다. 제 옆에 없는 건 아쉽지만, 듬직한 사위 곁에 있으니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군요.”
“이거 참, 제가 그 아이를 너무 빨리 낳은 모양입니다.”
그 와중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여는 세 번째 장인어른의 말씀에 비학생 딸을 둔 다섯 번째 장인어른이 원통하다는 듯 반응했다.
신기한 일이다. 아무리 같은 사위를 둔 넓은 의미의 가족이라지만, 남작과 후작이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혹시 장인어른들끼리 연락이라도 하면서 지내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저 친밀감을 설명할 수가 없다.
‘친해지면 좋은 거지.’
웃음을 터뜨린 장인어른들을 보며 홀로 납득했다.
그래, 처가끼리 사이가 좋다면 사위로서 환영할 일이다. 괜히 처가끼리 대립을 한다면 처가의 영향을 짙게 받을 수밖에 없는 연인들도 난감해 할 테니까.
특히 ‘공, 후, 백작 사이에 낀 남작’이라는 기적의 입지를 가진 세 번째 장인어른에 대한 걱정이 컸으나, 지금 모습을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
‘원조 카피바라신 건가?’
생각해 보면 그 루이제의 부친이다. 핑크 카피바라 기질이 유전이라면 루이제를 능가하는 원본이자 원조라는 말.
갑자기 세 번째 장인어른이 다르게 보인다.
며칠 동안 이어진 연회는 무난하고 평온하게 마무리되었다. 황제는 귀족들의 충성 맹세 속에서 정상적인 황위 계승을 이룬 상태고, 귀족들도 새로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이 없다. 오히려 절정에 이른 황권에 썰리지 않기 위하여 허리를 숙였다.
다행히 나도 그 평온을 누릴 수 있었다. 이미 황제의 애착 장난감으로서 감찰성 창설 과정 확인, 위리디아 관리, 북방 파벌 결성 등. 여러 업무에 시달린 걸 고려했는지 다른 일로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아─ 우─ 아우─”
“오늘도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전하.”
“아우우─”
그나마 일이 생긴다면 옹알이가 더 유창해진 황태녀를 만나러 가는 것. 이건 황태녀의 대부로서 당연한 일이니 딱히 불만은 없었다.
대신 손가락을 몇십 분이나 붙잡고 있는 건 자제해 줬으면 좋겠다. 얼굴만 비치러 갔다가 그대로 붙잡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역시 전하께서 대부님을 알아보시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허리를 숙인 채 손가락을 바치고 있으니, 그 광경을 직관하던 시녀장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저를 말입니까?”
“예. 전하께서는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상황 폐하를 제외한 다른 사람의 손가락은 금방 놓아주십니다. 오직 대부님만 예외지요.”
“그렇군요.”
그 말에 무심코 미소를 짓고 말았다. 시녀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작은 아기가 대부를 알아보고 가족처럼 여기고 있다는 의미…
…
“상황 폐하께서도 오십니까?”
순간 자연스럽게 넘어갈 뻔한 말을 다시 언급했다. 상황도 황태녀에게 손가락을 바치는 제물이라고?
“자주 오십니다. 저번에는 전하를 직접 안아주시다가 수염을 붙잡히셨지요.”
1시간이나 놓아주지 않으셔서 계속 안고 계셨습니다, 라고 덧붙이는 시녀장의 대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제국을 이끌어 간 철인, 그 세월과 고난을 피할 수 없었기에 새하얗게 변한 수염.그 수염을 손녀에게 붙잡힌 채 1시간이나 멀뚱히 서있었을 상황을 생각하니 인지부조화가 올 것 같다.
‘상황의 수염을 잡은 손.’
경이롭다. 이 대륙에서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위업이 저 작은 손에 담겨있다. 제국의 천명을 위협한 카간도, 황제와 함께 대륙의 정점에 선 교황도 감히 이루지 못한 위업이.
그리고 내 손가락이 황태녀에게 붙잡혔으니, 나도 상황의 수염과 간접 터치를 한 것 아닐까?
“상황 폐하께서 전하를 많이 예뻐하시는군요.”
물론 너무 역적스러운 발상이라 애써 평범한 말을 꺼냈다.
“아우─”
그러자 황태녀가 대답을 하듯 옹알이를 했다.
그 대답이 마치 자신의 위업을 과시하는 영웅의 외침 같았다.
‘수염 없어서 다행이다.’
만약 수염이 있었다면 상황처럼 이 작은 영웅의 위업 중 하나로 전락했겠지.
무시무시한 일이다.
드디어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대체 얼마 만에 돌아온 건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긴 외출이었다.
이제 아카데미 파견 업무 자체가 끝나기 전까지 장기 외출을 떠날 일은 없을 거다. 북방도 조용해졌고 황제도 새로 즉위했는데, 또 제도로 끌려갈 일이 생길 리가.
이건 복선이나 행복 회로 수준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다시 이런 규모의 일이 터지면 그건 신의 저주지.
‘…저주.’
저주라고 하니 생각나는 상처가 있었지만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털어냈다.
‘그딴 거 없다.’
난 저주가 아니라 신의 성흔을 가진 제사장이다. 다른 존재도 아닌 신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
그래, 나에게 신의 저주 따위는 없다. 신의 성흔만이 있으니 앞으로 평온하고 고요한 일상이 반겨줄 것이라 믿는다.분명 그럴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동아리실에는 아무도 없을 테고, 베아트릭스도 곧 수업이 있다며 빠르게 사라졌다. 그러니 자동적으로 갈 곳이 정해졌다.
‘회장실.’
본의 아니게 차별 대우를 했던 첫 번째 연인을 보러 가야 한다.
***
회장실 소파에 앉은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손님을 위해 준비한 소파에 주인이 앉아있는 건 이상한 일이지만, 요즘은 그런 당연한 것조차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공허한 기분이다.
이 공허감이 어째서 생겼는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원인은 알아도 해결은 불가능하다.
‘할 게 없어.’
내가 겪는 공허감은 할 일이 없을 때 생기는 감정이기에. 내가 직접 일을 만드는 것이 아닌 이상 해소할 수 없는 감정이기에.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카데미 학생회장으로서 시간에 여유가 생기는 정도면 모를까, 할 일이 없는 상황은 생길 수가 없다.
그러나 3학년 말이라는 입장, 관료로 나아갈 생각이 없다는 입장이 겹치니 이런 기묘한 상황이 펼쳐지고 말았다.
“회장님, 곧 졸업이신데 마지막은 편하게 지내셔야죠. 업무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예비 졸업자가 마지막까지 고생하는 건 슬픈 일이니, 자신에게 맡겨달라며 업무를 가져간 부회장.
“맞아. 어차피 이제 큰 행사도 없잖아? 한 명 정도는 빠져도 괜찮아.”
부회장의 주장을 말리기는커녕 적극 지지한 아멜리아.
틀린 말은 아니다. 이제 아카데미는 방학식까지 별다른 일정도 없고, 회장 하나가 빠진다고 문제가 생길 수준은 아니다.
그럼에도 역대 회장들이 마지막까지 업무를 본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관료 시험을 볼 때, 면접을 볼 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니까. 이제 졸업이라고 나태해진 사람을 좋게 볼 관료는 없으니까.
“고마워. 그럼 믿고 맡길게.”
그렇기에 나는 간부들의 은근한 압력 속에서 강제 은퇴 당하고 말았다.
솔직히 편하기는 했다. 매일 처리하던 업무에서 해방되니 홀가분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허나 그 해방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차라리 칼이 있는 상황에서 해방되었다면 마냥 행복했겠지만, 칼도 없고 업무도 없는 일상이 지속되니 점점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늘 오니까.’
멍하니 천장을 보던 시선을 서서히 정면으로 내렸다. 끔찍할 정도의 공허감이지만 베아트릭스 언니와 에르제베트 언니, 루이제와 이리나가 있어서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심지어 오늘은 칼이 오는 날이다. 아카데미를 떠났던 칼이 드디어 돌아오는 날이다.
다행이다. 만약 칼이 조금이라도 늦게 복귀했다면 우울증에 걸렸을지도 몰라.
– 똑똑
“마르. 있습니까?”
그리고 마치 하늘이 도운 듯, 칼을 생각하자마자 노크 소리와 함께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루하루 무기력해져가는 나를 에넨께서 가엽게 여기신 게 분명하다.
“네, 들어오세요.”
축 늘어져있던 몸을 서둘러 일으키며 답했다.
두근거린다. 아직 점심조차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고, 베아트릭스 언니도 막 수업을 시작했을 거다. 에르제베트 언니가 기습적으로 오기 전까지는 내가 칼을 독점할 수 있다.
공허했던 마음이 어느새 행복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칼과 함께할 수 있는 업무 없는 시간, 정말 최고다.
“저 왔습니─”
막 회장실에 들어온 칼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란 듯한 칼도 이윽고 마주 껴안아주며 등을 토닥여줬다.
“제가 너무 오랜만에 왔군요.”
그 말과 함께 칼이 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행복하다. 역시 행복은 단순히 몸이 편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거구나.
“미안합니다. 그래도 마르가 졸업하면 이런 행사에 같이 다닐 수 있으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이어지는 칼의 위로에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아무리 행복하다지만 조금 투정을 부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잖아.
“좋아요.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제가 참을게요.”
“이해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이마에 입술을 맞추는 칼.
본능적으로 칼을 껴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짧은 시간에 이런 고강도 스킨십을 연달아하다니, 방심하면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
“이렇게 마음씨 넓은 마르니, 제가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이어지는 말에 겨우 이성을 잡을 수 있었다.
“아니지. 말을 이상하게 했군요. 사실 부탁이 아니라 통보입니다.”
“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통보라니, 칼이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할 리가 없는데?
당혹스러운 마음에 칼을 바라보자 칼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곧 결혼할 사이인데 존대로 대하는 건 딱딱한 것 같아. 앞으로는 편하게 말할게.”
“…네?”
이어지는 세 번째 이마 키스.
“괜찮지?”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