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16)
로판 속 공무원 416화(417/451)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는 마르를 보니 안도감이 들었다.
역시 구구절절 구차하게 변명하는 것보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정답이었다. 어떤 설득이나 사과보다 빠른 반말이 효과적이다.
‘애초에 사과를 하는 것도 모양이 이상하지.’
그래, 솔직히 사과를 할 일은 아니다. 내가 존대가 익숙한 것처럼 마르도 존대가 익숙할 거다. 지금까지 나와 상호 존대를 하는 것에 어떠한 불만도 표하지 않았으니까.
베아트릭스가 이 얘기를 꺼낸 것도 마르가 불만을 보여서가 아닌 ‘나도 편하게 대하면서 마르한테는 왜.’ 같은 의문에서 시작된 말이었다. 누군가 피해를 보거나 서운함을 느끼지 않은 평화로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터.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하지만 피해 유무와 별개로 반성할 일이기는 하다. 모든 연인들에게 존대를 쓴 게 아니라 오직 한 명만 존대로 대했다. 그나마 마르가 첫 번째 부인(예정자)라 망정이지, 만약 마지막 부인이었다? 자신에게만 벽을 세운다고 울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써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정신승리를 했지만 점차 죄책감이 차올랐다. 고작 말투를 바꾼 것으로도 어쩔 줄 몰라하며 좋아하는데, 그 고작인 일을 하지 못했다.
“미안해. 애칭보다 말을 놓는 게 먼저인데, 순서가 이상했어.”
그렇기에 결국 사과를 하고 말았다. 피해자는 없지만 가해자가 존재하는 사건. 모순적인 말이지만 그 모순을 해냈다. 여러 의미로 대단하네.
심지어 사과를 받은 사람은 말없이 몸을 떨기 시작했다. 전성기 시절 페넬리아가 생각날 정도의 진동이니, 연이은 반말에 정신을 놓아버린 모양이다.
“마르.”
“아, 네!”
그래도 이름을 부르자 이성을 되찾은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기껏 베아트릭스와 페넬리아가 스킨십에 익숙해졌는데, 갑자기 멀쩡하던 마르가 스킨십 최약체로 전락하는 거 아닌가 걱정했다.
“그동안 섭섭했던 걸 잊을 정도로 노력할게.”
“아, 아뇨, 딱히 섭섭하지는 않았어요.”
“내가 미안해서 그래. 연인끼리 너무 딱딱하게 지냈잖아.”
마르의 눈동자가 다시 이리저리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까지 나와 나눴던 스킨십을 하나하나 회상하는 것처럼.
확실히 이마 키스나 볼 뽀뽀, 무릎베개와 껴안기 같은 스킨십은 풋풋한 연인처럼 자주 했었다. 딱딱하게 지냈다는 말과는 거리가 있을 정도로 많이 했었지.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행동과 말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아무리 행동이 완벽했어도 말이 엉망이면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러니 달라져야 한다. 행동으로만 하지 말고, 속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입 밖으로 말해야 한다.
“앞으로 더 잘할게. 징그러우니까 떨어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물론 마르가 나를 밀어내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지만.
“그럼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겠네요?”
마르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죽을 때까지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없으니, 평생 자기 곁에서 애정을 보여달라는 말을 돌려줬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 말에 미소를 짓고 있던 마르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즉각적이고 강렬한 반응이라 쓴웃음을 지을 뻔했다. 내가 생각해도 이 짧고 간단한 단어를 너무 아끼고 있었으니까.
“사랑해, 마르.”
그러니 그동안 하지 못한 만큼 매일 이 말을 속삭이자.
헤카테가 떠난 이후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헤카테의 자리를 채워 나와 함께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
“이제야 말해서 미안해.”
그리고 마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전처럼 이마나 볼에서 놀지 않고,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갔다.
짧은 시간에 너무 과한 충격을 준 모양이다.
“제, 제가, 제가 그 말을 얼마나 기다렸는데에에…”
내 품에 안겨 펑펑 우는 마르를 보니 마음속 삼각형이 광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오열하는 여자라니, 이게 어딜 봐서 결혼을 코앞에 둔 연인의 모습이냐고.
“미─”
마르의 등을 토닥이며 다시 사과를 하려는 찰나, 이번에는 마르가 내 입술을 덮쳤다.
갑작스러운 행동이라 당황했지만 당연히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마르를 더욱 강하게 껴안으며 마르의 리드에 순응했다.
“이, 이것도, 칼이 해주기를, 기다렸는데에…!”
그렇게 한참이나 붙어있다가 겨우 떨어진 마르는 히끅이며 원망 아닌 원망을 보였다.
이 역시 변명의 여지가 없다. 연인이 입술이 아닌 이마와 볼만 노렸으니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을까. 그럼에도 레이디로서, 동시에 내 과거를 아는 입장으로서 차마 먼저 요구하지 못하고 인내했을 것이다.
‘개새끼네.’
결국 소름 끼치는 자기 객관화에 성공했다. 보통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관대한 법이지만 지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그야 이 상황에서도 자기에게 관대한 놈이 있다면 그게 사람 새끼겠냐, 감정 없는 사이코패스 새끼지.
“미안해. 너무 기다리게 했지?”
“당연, 하죠!”
빼액 소리치는 마르의 기세에 움찔하고 말았다.
하긴, 당연한 말이기는 하지. 내가 괜한 걸 물었네.
“…그래도.”
도저히 죄책감을 이기고 입을 열 자신이 없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조금은 진정한 듯한 마르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이제라도 해줘서 고마워요…”
자비와 애정이 넘치는 발언에 다시 마르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말았다.
이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으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는 기계일 거다.
***
행복하다. 이 감정을 고작 행복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가까운 표현이 행복일 거다.
고장 난 것처럼 흐르는 눈물을 차마 닦지도 못한 채 칼을 받아들였다. 칼의 애정을, 칼의 손짓을, 모든 걸 받아들였다.
“사랑해, 마르.”
이윽고 칼이 했던 말이 떠오르자 정신이 몽롱해졌다.
하지만 흐느적거리는 몸에 애써 힘을 주며 버텼다. 지금 쓰러지면 분위기가 깨지잖아. 그리고 실수로 혀라도 깨물면 어떡해.
‘안 돼.’
이 최고의 순간을 끝낼 수는 없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꿈에서만 이룰 수 있었던 이 순간을 놓칠 수 없어.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칼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쓰러지지 않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칼에게 보내는 작은 항의기도 하다.그동안 나를 애태웠으니 오늘은 계속 이렇게 있어달라는 항의.
레이디로서 조금 부끄럽지만, 그래도 어떡해.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은 걸.
‘아.’
다행히 내 항의가 칼에게도 전해졌는지, 칼은 나를 껴안은 상태로 소파에 앉았다.
두근거린다. 이거, 이거 더 강하게 나가겠다는 신호 맞지? 서있는 것보다 앉아있는 게 편하니, 더 애정 표현이 힘쓸 수 있다는 거 맞지?
그, 그런데 키스, 보다 더 강한 건 뭐가 있지? 아니, 생각나는 건 있지만 그걸 여기서 할 수 있─
“저기.”
갑자기 상념을 끊는 목소리가 들렸다.
“눈치 없이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보고만 있으니 너무 부러워서.”
황급히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뾰로통한 표정의 에르제베트 언니가 보였다.
몰랐다. 다른 사람이 회장실까지 들어왔는데 이제서야 눈치챘다.
“저, 언니?”
“응.”
“언제… 오셨어요?”
간절함이 가득한 질문에 히죽 웃은 언니는 양손을 격렬하게 비비기 시작했다.
기묘한 행동이지만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말았다.거의 처음부터 보셨구나… 그냥 내가 눈치채지 못한 거구나…
“마르도 마르지만 부장님도 너무해요. 제가 들어온 거 봤으면서 계속 하고.”
그 말에 온몸이 파르르 떨리고 말았다.
칼은 언니가 들어온 걸 알면서도 계속 그런 거야? 멈추지 않고 계속?
“가족끼리 뭐 어때.”
결정타나 다름없는 칼의 대답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아무리 가족이어도 노골적인 애정 행각을 보이는 건 별개의 문제다.
***
뜨겁게 타오르던 분위기가 식어버린 반작용인지, 마르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는 소소한 시위일 터.
‘타이밍도 참.’
그런 마르의 등을 토닥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에르제베트에게 오늘 복귀할 거라는 연락을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조금 늦게 연락했을 거다. 마르에게 여러 의미로 잊지 못할 추억을 주고 말았으니까.
물론 왜 이 타이밍에 왔냐고 구박할 생각은 없다. 자기가 불러놓고 뭐라고 하는 건 진상 상사 같잖아.
‘너무 자극적이었나.’
그리고 남의 스킨십을 직관하게 된 에르제베트의 상태도 영 좋지 못했다. 얼굴이 은근히 상기된 채로 슬쩍 자기 입술을 매만지는 것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일 정도다.
‘그럴만하지.’
유감스럽게도 에르제베트는 살아온 인생과 연인 없이 지낸 인생이 동일하다. 광기 넘치는 행동과 별개로 연애에 대해서는 머리색만큼 새하얗고 티없는 존재라는 의미다.
거짓말 같지만 진짜다. 애초에 무릎에 앉혀서 머리를 쓰다듬는 걸로도 만족하는 애잖아.
‘이렇게 보면 수줍음 많은 레이디인데.’
정신 세계가 연애관의 1할만큼이라도 순수했다면─
“저기, 부장님.”
“응?”
한참이나 입술을 매만지던 에르제베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 차례는 언제예요?”
그 말에 마르를 토닥이던 손이 멈추고 말았다. 품 속에 있던 마르도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맥락없는 질문이지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는 건 간단했다. 이 타이밍에 차례 운운하는 이유는 뻔하다.
‘이것도 차례를 지켜야 하나.’
연인들과 더욱 진한 애정 표현을 하게 되었으니, 다섯 번째인 자신은 언제쯤 할 수 있겠냐는 질문.
“이왕이면 오늘 안에 해줘요!”
히히 웃는 에르제베트를 보니 아까와는 다른 느낌의 죄책감이 몰려왔다.
분명 이 자리에 있는 건 마르와 에르제베트지만, 다섯 번째인 에르제베트는 이 자리에 없는 셋에게 순서를 양보하고 있다.
‘망할.’
다 내 업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