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17)
로판 속 공무원 417화(418/451)
무거운 업보를 뒤로 하고 겨우 입을 열었다.
“…최대한 노력할게.”
에르제베트에게는 유감인 일이나, 오늘 안에 차례가 온다고 확답을 줄 수 없었다.
아무리 순서가 중요해도 의무적인 애정 표현은 뭔가 이상하지 않나. ‘다섯 번째가 기다리니 두, 세, 네 번째를 빠르게 처리한다!’ 같은 건 스스로 생각해도 미친 발상이다. 폐점 시간이 임박한 마트에서도 그 정도 떨이 행사는 안 한다.
게다가 입맞춤이라는 고-강도 애정 표현을 분위기도 잡지 않고 강행하는 건 상대에게 실례다. 빙의 전, 빙의 후 인생을 통틀어 연애 경험이 헤카테뿐인 나도 분위기의 중요성은 안다.
“부장님이 오셨으니 전 이제 돌아가야 한다고요! 그러면 방학 때까지 못 보잖아요!”
허나 확답을 피하니 에르제베트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억울하다는 듯 항의했다. 너무 절절하고 설득력 넘치는 항의라 도저히 반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럴 거면 나이 떼! 출생 신고 새로 할 테니까 나도 18살 할래! 그럼 아카데미에 있을 수 있잖아요!”
“아니, 나는 뭐 나이 많아서 관료 생활했냐…”
이윽고 바닥에 누워서 버둥거리기 시작한 에르제베트는 듣는 사람이 부끄러워지는 떼를 쓰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내 품에 있던 마르도 슬며시 일어나 에르제베트와 거리를 벌렸을까.
그 처절한 발버둥은 베아트릭스가 수업을 마치고 올 때까지 이어졌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바닥에서 투쟁하던 에르제베트는 베아트릭스의 품에 안겨 하소연을 했다.
“언니도 작년에는 제도에 있었으니 제 마음 알죠?”
“그럼, 당연히 알지.”
그런 에르제베트를 토닥이던 베아트릭스는 딸을 달래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정신이 나갈 것 같다. 루이제를 핑크 카피바라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사실 진짜 카피바라는 쟤가 아닐까? 정숙한 황후, 조용한 페넬리아에 이어 이제는 100년 동안 군림한 공작과도 친분을 쌓았으니 평범한 인간의 친화력이 아니다.
물론 베아트릭스와 친해진 건 다른 연인들도 마찬가지기는 한데, 저 정도로 벽을 허문 건 에르제베트가 유일하다.
“하지만 아가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란다. 아가가 우리를 차별할 성격이니?”
그렇게 멍하니 화이트 카피바라를 보던 도중, 베아트릭스의 말에 감동했다.
베아트릭스의 말이 맞다. 나는 여섯 중 누구도 차별하지 않기 위해 홀로, 묵묵히 노력했다. 그 노력을 누군가 알아준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너도 그렇구나.’
무심코 손을 내려다 보고 말았다. 처량하게 반짝이는 반쪽 반지가 자신도 같은 심정이라며 호소하는 것 같았다.
차별 없는 연애를 위해 너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했었지… 정말 미안하다…
“그러니 이해해 주렴. 지금 서운한 만큼 방학이 되면 행복해질 테니.”
그러자 베아트릭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에르제베트가 스르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픽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은 눈빛이었으니까. 베아트릭스가 한 말이 맞다고 확답을 달라는 거겠지.
“제도로 복귀하면 나랑 집무실에서 같이 지내자.”
그래서 해줬다. 순수한 상사-부하 관계라면 혀를 깨물고 싶은 말이겠지만, 연인 사이라는 걸 감안하면’방학 때는 너한테 시간을 많이 쓰겠다.’ 라는 수줍은 고백.
“매일매일 야근하는 거 맞죠? 기대할게요!”
그 덕분인지 에르제베트도 히히거리며 농담으로 받아쳤다.
야근이라는 말에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았지만 아무튼 농담일 것이다.
…농담 맞지?
***
여전히 내 품에 안긴 채 웃고 있는 에리를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나를 어려워하던 다섯 아이들 중 가장 먼저 다가온 아이, 이제는 에르제베트라는 이름보다 에리라는 애칭이 익숙해진 아이.
그리고 활기차고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기는 했으나─ 의외로 속이 깊고 배려심이 넘치는 기특한 아이.
‘질투할 수도 있을 텐데.’
정말 기특한 아이다. 나는 운이 좋게도 두 번째지만, 이 아이는 누구보다 아가를 빨리 만나고 가까이 지냈음에도 다섯 번째가 되고 말았다. 아가가 순서로 차별을 하는 아이는 아니지만, 지금처럼 순서를 신경 써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피해 아닌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사실 에리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화가 날 수도 있다. 루이제와 이리나, 두 아이는 에리보다 늦게 아가를 만났으니까.
그럼에도 에리는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떼를 쓰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가의 관심을 받기 위한 행동이지, 정작 다른 아이들에게 화를 내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보인 적이 없다.
“언니?”
‘아.’
어느새 내 손이 에리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기특하다고 생각만 한다는 걸 행동으로 옮겨버린 모양이다.
“머릿결이 좋구나. 너무 부드러워서 나도 모르게 만졌단다.”
“그렇죠? 매일 관리하고 있어요!”
잠깐 당황했다가 급히 변명을 했으나, 마음에 드는 말이었는지 에리는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아무리 에리가 질투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너보다 늦게 아가를 만난 아이들도 너보다 앞인데, 화내지도 않고 장하구나.’ 라고 하는 건 잔인한 일이다. 그 말을 들은 에리가 내 머리를 쥐어뜯어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언니보다는 못하겠지만, 제 또래 중에서는─”
신나게 말을 잇던 에리가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아마 에리 나름대로의 배려일 거다. 평소에도 내 앞에서 최대한 나이 얘기를 꺼내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으니, 방금 또래라는 말 때문에 내가 씁쓸해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지금 같은 반응이 더 상처가 된다. 차라리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게 낫지, 지금처럼 말하다가 끊으면 내 눈치를 보는 게 너무 뻔하지 않나.
‘엘프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거늘.’
조금은 서운하다. 혼혈이기에 어머니처럼 나이의 10%만 적용할 수는 없지만, 20% 정도는 된다. 그렇게 치면 나도 에리의 또래라고 할 수 있다.
허나 굳이 항변하지는 않았다. 몇 달 전 외할머니 댁에서 내 나이가 엘프 나이의 20%라고 언급했을 때, 아가가 지었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으니까. 덤덤한 척했지만 분명 문화적 충격을 받은 외지인의 표정이었다.
…그래, 나이가 뭐가 중요할까. 내가 진짜 나이를 속이고 이 아이들에게 접근한 것도 아닌데.
“아, 그러고 보니 부장님! 이제 마르하고 편하게 말하기로 한 거죠?”
“응, 그렇지.”
이윽고 안절부절 못하던 에리가 갑자기 아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참에 언니하고도 편하게 말해요!”
그 말에 고개를 기울이고 말았다.
편하게라니, 이미 나와 아가는 편하게 말하고 있는─
“연인 사이에 아가라고 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자식이 태어나면 어쩌려고!”
데…?
***
베아트릭스 앞에서 나이를 언급한 에르제베트는 온몸으로 당혹감을 표현하더니, 갑자기 나에게 주제를 돌렸다. 살기 위한 발버둥이 처절하여 안쓰러울 정도였다.
“연인 사이에 아가라고 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자식이 태어나면 어쩌려고!”
‘오.’
하지만 제법 괜찮은 화제 전환이었다.
‘그렇기는 하지.’
맞는 말이다. 베아트릭스와 호칭을 정리하는 건 언젠가 해야 할 일이다. 나도 베아트릭스에게 크게 화를 냈다가 화해한 이후, 호칭을 아가에서 다른 걸로 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했었으니까.
그때도 에르제베트처럼 훗날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 라는 명분을 들먹였었다.애석하게도 마땅한 호칭을 찾지 못해 보류됐지만.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상, 유야무야 보류된 일을 다시 논의하려면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다. 이러다가 결혼 이후에도 아가라 불리고, 자식이 생기면 작은 아가라는 태명이 붙을 수도 있다. 끔찍한 일이다.
‘지금 정하는 게 좋겠네.’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베아트릭스를 볼 수 있었다.
그래, 지금이다. 마르에게 반말을 하고, 키스라는 연애 행위가 해금된 지금이 적기다. 이 기세를 타고도 호칭 조정에 실패하면 다음 따위는 없다.
“에르제베트 말이 맞는 것 같은데, 베아트릭스 생각은 어때?”
“으, 으응?”
내 물음에 베아트릭스가 흠칫하며 귀를 파닥이기 시작했다.
일단 꺼리는 반응은 아니다. 베아트릭스도 그냥 아가라는 호칭이 입에 붙어서 쓴 거지, 딱히 애착이 있는 호칭은 아닐 터.
“만약 우리 사이에서 태어날 자식이 하나면 작은 아가라고 불러도 괜찮지만, 하나만 낳는 건 좀 그렇잖아. 카토반 공작가를 위해서라도 최대한 많이 낳아야지.”
그 말에 베아트릭스의 귀가 더욱 빠른 속도로 파닥였다. 이미 머릿속에 작은 쿼터 엘프 셋이 정원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사실 나도 상상하고 말았다.
‘…안 돼.’
그렇기에 가장(예정)의 책임감이 솟구쳤다. 그 귀여운 아이들에게 작은 아가 1호, 2호, 3호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곧 부부니까 더 수평적이고 부드러운 호칭이 좋겠어.”
“그, 그렇지. 맞는 말이란다.”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는 베아트릭스와 그 품에 안겨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에르제베트.
그러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에르제베트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살기 위한 화제 전환이었으나, 아무튼 호칭을 정정할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니 칭찬해달라는 듯한 제스처였다.
물론 칭찬 대신 계속 거기 있지 말고 나오라는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하필 아이 생각을 하는 중인데 같은 백발인 에르제베트가 품에 있어서 괜히 흠칫하게 되잖아.
“저기, 그러면…”
삐죽 입술을 내민 에르제베트가 순순히 나온 직후, 어느새 얼굴이 붉어진 베아트릭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번에도 말한 건데, 낭군님은 어떠니?”
“낭군님?”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거 저번에도 나왔던 호칭인데, 너무 예스러운 단어라 못 들은 척했었던 거잖아.
“그건─”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께 낭군님이라는 호칭을 쓰셨다고 하더구나. 어머니도 생전에 그러셨고 나도 낭군님이라는 호칭이 좋으니, 아무래도 엘프의 전통이나 본능 같아.”
“낭만적이네.”
수줍게 미소를 짓는 베아트릭스의 모습에 급히 하려던 말을 정정했다.조금만 빨랐으면 종족 단위 탈룰라였다.
‘…어쩌지?’
곤란하다. 저런 말을 듣고 다른 호칭을 강요하려면 베아트릭스가 납득할 정도의 화려한 호칭이어야 한다.
그런데 솔직히 그런 거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남편이나 여보 정도면 모를까, 그 이상의 호칭은 아는 게 없어.
‘낭군님으로 가야 하나…?’
평범한 호칭과 장조모님, 장모님이 사용한 호칭.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후자의 명분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긴장감에 침을 삼키며 슬며시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 마르나 에르제베트 중에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나 하는 소망을 담아.
‘없네.’
유감스럽게도 없었다. 마르도 에르제베트도,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조용히 외면했다.
아무래도 이 싸움은 나 홀로 이겨내야 할 싸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