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18)
로판 속 공무원 418화(419/451)
에르제베트가 쏘아 올린 호칭 논쟁은 종족 단위 탈룰라와 3대의 추억 부정이라는 미친 치트키로 인해 종결되었다. 저 치트키에 대항했다가는 순식간에 인간쓰레기가 되고 만다.
그런 미래는 감당할 수 없다. 연인 셋이 지켜보는 앞에서 추악한 인성을 과시하다니, 그딴 건 미래가 없는 새끼나 할 짓 아닌가.
“낭군님도 괜찮기는 한데, 결혼 전에 쓰기는 거창한 것 같아. 당분간은 서로 이름으로 부르자.”
“그러니?”
그래도 하늘이 나를 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잠깐의 유예 기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낭군님이라는 호칭을 쓸 수는 있다. 실제로 베아트릭스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사용했다고 하니 없는 호칭도 아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100년 전 인물이고, 외할머니는 수백 년 전에 남편과 사별했다. 사실상 역사 속 호칭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나이를 신경 쓰는 베아트릭스 입에서 나오기에는 심히 곤란한 호칭이다.
‘왜 자폭을 하는 거지?’
조금 안타까울 정도다. 은근히 나이를 신경 쓰면서 사소한 말이나 행동에 연륜이 묻어 나오고 있잖아.
“확실히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무튼 내 제안에 베아트릭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슬며시 미소까지 짓는 걸 보니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도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솔직히 이름이든 낭군님이든 아가보다는 양호하겠지만.
“…칼.”
“응.”
슬쩍 내 이름을 부른 베아트릭스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
그 모습에 나도 미소를 짓고 말았다. 아가라는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불리니 평범하고 대등한 연인이 된 기분이었으니까. 지금까지 베아트릭스가 나를 아랫놈으로 취급했다는 건 아니나, 아무래도 아가는 좀 그랬지. 마땅한 대체 호칭이 없어서 용인했을 뿐.
“후후, 몇백 년이 지나도 오늘을 잊지 못할 것 같구나.”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바꿀 걸 그랬어.”
마르와 말을 놓을 때도 한 생각이었지만, 사소한 변화로 큰 행복이 올 줄 알았다면 진작 했을 거다. 고작 반말을 하는 걸로도, 이름을 부르는 걸로도 저렇게 기뻐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베아트릭스가 아가라고 부른 건 스스로 자초한 거 아닌가. 딱히 내 잘못은 아닌 것 같─
‘아니지.’
황급히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냈다. 이 사태에 베아트릭스의 지분이 있더라도 내가 무죄라는 건 아니다. 그리고 연애 경험이 전무한 연인이 길을 헤매고 있었다면, 한 번이라도 연애 경험이 많은 내가 리드하는 것이 옳았다.
반성하자. 너무 현재에 안주하여 미래를 보지 못했다. 당장 우리 사이에 불화가 없었다고 더 좋은 방법을 모색하지 않았다.
“트릭시.”
잠시 고민하다가 베아트릭스를 애칭으로 불렀다. 베아트릭스는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불만을 보인 적은 없었고,애칭으로 불러달라는 기색을 보인 적 또한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애칭을 입에 담았다. 이게 더 좋은 방법이니까. 연인으로서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애정 표현이니까.
“카, 칼?”
그리고 고작 세 글자인 애칭이었으나 효과는 확실했다. 귀를 파닥이며 웃고 있던 트릭시가 그대로 굳어버렸으니까.
“트릭시만 호칭을 바꾸면 불공평하잖아. 나도 더 친밀하게 불러야지.”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씩 트릭시에게 다가갔다.
“아, 아가─ 아니, 칼? 갑자기 왜…”
안 그래도 혼란 상태에 빠진 트릭시는 거침없는 발걸음에 더욱 패닉에 빠진 듯, 내가 가까워질수록 횡설수설하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흐읏…”
그러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벽에 부딪혀 파르르 떠는 것을 보니 애잔할 지경이다. 고작 애칭 가지고 이런 반응을 보이면 어쩌려고.
물론 애칭으로 끝낼 생각은 없지만.
‘지금이다.’
느낌이 왔다. 지금이야말로 분위기를 타서 적극적인 애정 표현을 할 기회다.
일단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트릭시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뒤는 막혔지만 옆으로 도망이라도 치면 민망한 일이다.
“어?”
그런 내 행동에 무언가 눈치챘는지, 등 뒤에서 에르제베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트릭시도 다가올 미래를 직감한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귀를 광속으로 파닥였다. 황급히 눈동자를 돌리는 게 탈출할 곳을 찾는 것 같지만, 동시에 은근한 기대감을 담고 있었다.
“나도 오늘을 잊지 못할 거야.”
그 말과 함께 트릭시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
격렬하게 느껴지던 진동이 어느 순간 끊겼다.
예상한 일이라 딱히 놀랍지는 않다. 이런 거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흐릿했던 눈에 생기가 돌아온 트릭시는 황급히 변명을 했다.
“미, 미안하구나. 잠깐 어지러워서…”
말로는 추한 변명을 내뱉었으나, 정작 팔은 내 몸을 꽉 붙잡은 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다. 먼저 낭군님이라는 호칭을 꺼냈으면서 애칭을 부르니 도망가고, 정신은 키스에 기절했으면서 몸은 떨어지지 않게 붙잡고 있다. 통일성이 없는 기묘한 패턴이지만─ 이쯤 되면 이게 트릭시의 특성인 것 같아 귀여울 정도다.
“언니, 아까까지는 쌩쌩했잖아요.”
그러나 누군가는 귀여움이 아닌 배신감을 느꼈는지, 다소 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오늘 안에 나 빼고 다 하겠네.”
그 말에 민망한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도로 돌아가면 너랑 같이 있을게.’ 같은 말을 해놓고, 정작 다른 연인과의 애정을 과시했다. 에르제베트 입장에서는 두 번 물 먹이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할 일.
“에리도 키스 잘할 자신 있는데.”
이어지는 후속타에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훅 치고 들어온 발언이라 민망함과 별개로 웃음이 터질 뻔했다.
“언니, 저희밖에 없지만 조금은 돌려서 말─”
“마르는 승리자라 패배자의 심정을 몰라! 나도 혀 잘 비빌 수 있다고!”
“어, 언니!”
심지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최강의 명분으로 깽판을 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마르나 트릭시가 에르제베트를 말려봤자 승리자의 여유가 될 뿐이니까.
덕분에 에르제베트는 다시 바닥에서 자유형을 실시했고, 그 처절한 난동은 에르제베트가 아닌 에리로 부르겠다는 합의 끝에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사적인 장소가 아닌 공적인 장소에서도’ 라는 구체적인 조건과 함께.
‘버릇이 이상하게 들었어.’
히히 웃으며 두 발로 선 에리를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제도 길바닥에서 울고불고 사정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에리는 더 이상 바닥에 드러누워 난동 부리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됐다.
이것도 내 업보라면 업보겠지…
***
수업이 끝나자마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전에도 정규 수업이 끝나면 빠르게 동아리실로 가는 편이었으나, 근래 들어서는 수업이 끝나기 전부터 미리 짐을 챙기고 있다. 조금의 지연도 없이 바로 교실을 뜨기 위해서.
‘눈치 볼 필요 없는데.’
교실문을 열자 뒤통수로 쏠리는 시선, 복도를 거닐자 은근히 좌우로 갈라지는 인파를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난감하다. 내가 3황자 아인테르가 아닌 유일한 황제(皇弟) 아인테르가 된 순간부터 이렇게 됐다. 황자에서 황제라는 존재가 되었으니 감히 접근하기 두려울 터.
‘어쩔 수 없지.’
물론 이해할 수 있다. 티끌만큼이라도 황태자의 계승을 방해할 수 있는 일개 황자와 이미 황제로 즉위한 자의 동생. 어느 쪽의 권위와 권한이 더 강할지는 뻔한 일이다. 숙청을 당하지만 않는다면 후자가 더 안정적이고 강력하다.
그리고 나는 양위식 때 귀족들과 섞여있는 것이 아닌, 단상 위에서 새로운 황제 폐하의 즉위를 축하했다. 이는 황제 폐하께서 나의 존재를 용인하고 중히 여기겠다는 의미.
그렇기에 양위식 이후로 학생들은 은근히 나와 거리를 두고 있다. 어울려서 좋을 것 없는 존재라 피하는 게 아닌─ 혹시 무례를 저지를까 두려워서.
‘…내년이면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 올해만 버티자.’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허나 근거 없는 낙천적 추측은 아니다. 귀족들에게 있어 사교는 호흡이자 본능. 지금은 거리감을 재느라 눈치를 보고 있으나, 늦어도 내년이면 빠르게 계산을 끝내고 평범히 다가올 것이다.
결정적으로 황제 폐하께서 막 황태자로 책봉되었던 시절, 내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의 상황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어찌 되었건 나를 경외하기에 피하는 것이니까.
“아인테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뒤에서 에리히의 목소리가 들렸기에 뒤를 돌아봤다.
‘이런.’
몸을 돌리자마자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막 대련을 마치고 온 것인지 허리춤에 목검을 멘 에리히, 언제나처럼 에리히 옆에 딱 붙어있는 세라. 어쩌다 결성된 조합인지 뻔하다.
“오늘도 대련이 있었나 보군요. 고생 많았습니다.”
“뭘, 무인이 고생하는 건 당연하지.”
“하하, 그도 그렇군요. 헌데 세라도 대련장에 있었습니까? 용케 같이 오는군요.”
“아니, 오는 길에 만났어.”
글쎄. 오는 길에 만난 게 아니라 매복 중인 세라에게 걸렸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런 감정을 담아 쳐다보자 세라는 민망한지 조심스레 시선을 내렸고, 에리히는 그저 당당했다. 진심으로 오는 길에 만났다고 여기는 것처럼.
‘하여간.’
다시 웃어버렸다. 내가 황제가 되고, 부원들이 황제를 편히 대할 수 없다며 장난삼아 존대를 하고, 그런 부원들을 만류하며 결국 상호 간에 이름은 편히 부르자고 합의를 보는 등─ 짧은 시간 안에 실로 다양한 일이 있었으나 에리히의 눈치는 변함이 없었다.
저걸 한결같다고 봐야 할지, 발전이 없다고 해야 할지.
“뭐, 어차피 가는 곳은 같으니 만날 수도 있죠.”
늘 고통받는 세라를 보다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애석하게도 에리히의 연애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옆에서 부원들이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등을 밀어줬음에도 에리히는 굳건히 그 자리에서 버텼다. 이제 남은 방법은 누군가의 조력이 아닌 스스로 각성하는 수밖에 없다.
“일단 가면서 얘기합시다. 고문께서 오랜만에 돌아온 날인데, 늦게 갈 수는 없으니까요.”
“아, 그렇지 참.”
내 말에 에리히는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반응했다. 본인 형인데 너무 무심한 거 아닌가.
“이제 형수님도 돌아가겠네.”
그 말에 움찔하고 말았다. 부재 중인 고문 자리를 임시로 채우기 위해 온 감찰부 1과장.
‘…대단했지.’
잠시 1과장이 고문으로 지내면서 생겼던 일들을 회상했다.
벌써 두 번이나 임시직을 수행하는 것이기에 일적으로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으나, 매일매일 벌어지는 기행으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이 심대했다.
“아, 그거 알아? 여기 천장 뜯으면 비밀통로 있다?”
“이 동상, 머리 잡아당기면 뽑혀. 내가 실수로 부쉈다가 몰래 붙인 거거든.”
“저어어기 공터 파면 검술부에서 쓰던 진검 나온다? 어떻게 아냐고? 나랑 선배가 숨겼거든! 검술부 애들이 너무 시끄러워서!”
…
실로 심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