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19)
로판 속 공무원 419화(420/451)
조용한 회장실이 아닌 북적거리는 동아리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연인들이 아닌 제발 국경 밖으로 나갔으면 하는 부원들.
분명 뒷목을 잡기에 충분한 환경이지만 기이할 정도로 마음이 평온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없는 사이에 사고를 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녀석들이었는데, 바닥 밑의 바닥을 경험하다 보니 이것들이 선녀로 보인다.
적어도 얘네가 나를 굴리지는 않잖아. 77년도면 모를까, 78년도 시즌 부원들은 적어도 황제보다 선녀다.
‘고맙다.’
그렇기에 속으로 소소한 감사를 표했다. 너희가 성실하고 평범한 사람이 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제도에 있을 누렁이처럼 흉악한 개새끼만 되지 말아 줘.
“형제님? 혹시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없다.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잠시 쳐다본 거야.”
그 절절한 눈빛을 눈치챘는지 타니안이 먼저 말을 걸었으나, 애써 고개를 저었다.
‘황제를 보다가 너희를 보니 너희의 소중함을 알겠다.’ 같은 말을 하면 황제 뒷담화를 하는 것 같잖아. 솔직히 뒷담화가 맞기는 한데, 괜히 그런 말을 했다가 ‘그럼 졸업 후에도 제국에 남겠습니다!’ 같은 대답이 돌아오면 혀를 깨물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도 대학원생과 유사한 보조 교사라는 존재가 있다. 이것들이 독한 마음을 먹으면 졸업 후에도 제국에 남을 명분이 존재한다.
‘끔찍하네.’
무시무시한 가능성을 떠올리니 절로 오한이 들었다.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3년 동안 제국에 있는 걸로도 미칠 노릇인데,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는 대학원생 루트까지 밟는다?
원작에서 내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을 거라는 건 알겠다.
‘진짜 원작은 2부였나?’
순간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작년에 부원들이 보였던 개노답 짝사랑 레이스는 제3자 입장에서 처절하고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아카데미 생활이 1부, 졸업 이후가 2부 아니냐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제법 가능성 있는 추측이다.
타국 왕족이 제국에서 대학원생 생활을 하는 게 말이 되냐는 합리적 지적 따위 통하지 않는다. 그런 합리가 통할 녀석들이면 애초에 제국에 오지도 않았을 테니.
“아무래도 2년을 같이 지내다 보니 정이 들었나 봅니다. 이거 참, 보조 교사 과정을 신청해서 제국에 남아야 하나 고민되는군요.”
‘이 시발.’
그리고 마치 확인 사살을 하는 듯한 류티스의 발언에 쌍욕이 목 끝까지 치솟았다.
방금 말 덕분에 확신했다. 일개 고문인 내 말로도 보조 교사 운운하는데, 루이제에 대한 짝사랑이 지속 중이었다면 100% 남았다. 루이제가 누군가와 사귀기 전까지는 무조건 남았을 거다.
“졸업 후면 돌아가야 한다는 게 너무 아쉽습니다.”
너스레를 떨며 웃는 류티스의 울대를 조용히 바라봤다.
저기에 딱밤 한 대만 날리고 싶다. 어차피 외상 정도는 금방 치료할 수 있잖아. 트릭시도 있고 타니안도 있으니 즉사만 아니면 모든 부상을 치료할 수 있을 거다.
‘참자.’
물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고작 이 정도로 움직였다면 이미 제과 동아리는 공중분해됐을 거다.
“검술부도 보조 교사 과정이 있나?”
그 와중에 침묵하던 라테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딱히 태클을 걸거나 검법라시코에 시동을 거는 것이 아닌,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듯이.
그런데 듣고 보니 궁금하기는 하다. 마법은 학문의 성격이 강하니 그렇다 치지만, 검술은 철저한 실기로 이루어진다. 그런 과목에 보조 교사가 필요한가? 쓸 논문이나 연구도 없을 것 같은데.
“검술의 역사는 깊고, 각 가문이나 국가별로 비전처럼 내려오는 검술도 있지. 또한 수련도 개인의 신체적 특징에 맞게 조정해야 하니 학문적으로 접근할 여지는 많다!”
이어지는 말에 납득했다. 확실히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보조 교사가 탄생할 여지가 많다. 아니, 오히려 학문에 약한 순수 검사들을 위하여 머리가 잘 굴러가는 보조 교사의 존재가 절실할 터.
‘태권도과 같은 건가.’
대충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보조 교사할 것도 아닌데 자세히 알 필요는 없지.
…
‘저 새끼는 왜 아는 거지?’
떨리는 눈으로 류티스를 바라봤다. 나도 모르는 걸 저 녀석이 자세히 알고 있다는 건, 이미 검술부 보조 교사에 대해 알아봤다는 의미잖아.
공포스럽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원작 2부: 두근두근 대학원생 생활!’이 코앞까지 다가왔었다. 다행히 좌초된 프로젝트지만 심장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
‘…큰일 날 뻔했네.’
슬며시 루이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내가 온 기념으로 파티라도 하자며 열심히 쿠키를 굽고 있는 루이제, 한때는 부원 전원의 사랑을 받았던 루이제.
만약, 아주 만약 루이제가 부원들을 차지 않았거나 나에게 마음이 없었다면─ 지금쯤 원작처럼 2부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와.’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그런 미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루이제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폭증하는 기분이다.
동아리실에서 급히 진행하는 파티다 보니 규모 자체는 조촐했지만, 제법 괜찮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나를 반기기 위해, 그동안 정이 든 에리의 복귀를 배웅하기 위해, 그냥 즐기기 위해.
그렇게 루이제가 만든쿠키를 씹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아쉽다는 듯 울상을 짓는 에리가 보였다.
의외다. 쟤도 부원들과 정이라도 들었─
“흐잉, 아직 못 알려준 비밀통로도 많은데.”
아니구나. 내가 착각을 했네.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까?”
“아카데미가 아니라 개미굴이었군.”
그리고 난데없는 비밀통로 발언에 아인테르와 라테르가 헛웃음을 지었다.
‘해탈했구나.’
그 모습에 측은한 감정이 들었다. 교육 기관에 비밀통로가 있다는 어이없는 주장을 들었음에도 헛웃음만 지으며 넘어갔다?이미 에리의 광기에 시달릴 만큼 시달렸다는 의미다. 아카데미에 비밀통로가 있다는 미친 발언을 자연스레 수긍할 정도로 화려하게.
‘있기는 하지.’
문화충격과 정신오염을 동시에 당한 저 둘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나, 제국 아카데미 곳곳에는 비밀통로가 실제로 존재한다.
이 제국 아카데미는 아펠스 제국이 건재하고, 그 수도가 번영하던 시절에 세워진 건물. 유사시 고위직의 피난이나 은신을 위함이었는지, 아카데미 곳곳에 비밀통로가 있기는 하다.
정말 작정하고 만들었는지 꽤나 튼튼한 비밀통로라 제국 행정부에서도 알고 있고, 나도 작년에 직접 확인─
“나랑 선배가 소강당부터 기숙사까지 만든 통로도 있으니까 잘 찾아봐. 직접 보여주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네!”
?
‘뭐야 시발.’
그건 나도 몰랐는데.
쿠키를 씹던 그대로 굳고 말았다. 아펠스 시절의 비밀통로 외에도 다른 통로가 존재했다고? 심지어 그걸 직접 만들어?
‘…선배랑?’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다. 에리와 친하게 지낸 선배라면 황후밖에 없지 않나?
‘아니겠지.’
황급히 불경한 생각을 털어냈다. 황실의 양심이자 황제 억제기인 황후다. 그 정숙하고 온화함의 상징인 황후다.
백 번 양보해서 에리와 친하게 지낸 건 에리의 미친 친화력이라고 쳐도, 당시 공작 영애였던 황후가 삽질을 하며 비밀통로를 만들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마 다른 선배를 말하는 거겠지. 아무렴.
“그런데 그 선배는 대체 누굽니까? 온갖 일은 전부 같이 한 것 같은데, 이름이라도 알고 싶군요.”
그리고 아인테르의 말에 잠깐 침묵이 맴돌았다. 동아리실에 있던 인원 전부가 입을 다물고 에리를 볼 정도였으니, 실로 모두의 의문을 대변한 질문이었다.
“그건 비밀! 그 선배가 스스로 밝히기 전까지는 나도 묻어두려고!”
히히 웃으며 넘어가는 에리였지만 나는 봤다. 아주 찰나였지만, 분명 에리의 얼굴에 망설임과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었다.
저 에리가 망설였다. 에리의 광기 넘치는 세계관으로도 선배의 정체를 밝히면 어마어마한 일이 생길 거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거기다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건의 경중을 떠나 그 선배 자체가 에리에게 있어서 두려움의 존재라는 것이다.
“뭐, 이미 졸업한 사람이니 알아봤자 의미도 없지. 이제 와서 통로를 메우라 부를 것도 아니잖아.”
그렇기에 직접 나서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머리를 굴리면 금방 후보가 추려질 것 같지만, 이 이상 접근하면 안 된다고 본능이 경고하고 있다.
“맞는 말입니다. 이미 졸업한 사람을 알아봤자 뭐하겠습니까? 당장 눈앞에 있는 임시 고문 선생부터가 그 시절 사람이니, 굳이 다른 사람을 만날 필요는 없겠죠.”
“그 시절 사람이라고 하니 늙은 것 같잖아요!”
“크흐, 실례했습니다.”
다행히 류티스와 에리가 적절히 받아줘서 빠르게 화제를 돌릴 수 있었다.
“오빠.”
“응?”
다른 주제로 투닥이는 에리와 부원들을 보고 있으니, 어느새 이리나가 다가왔다.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 아까부터 아무것도 안 드시던데.”
‘아.’
슬쩍 오른손을 쳐다봤다. 접근하면 안 될 것 같은 정보를 생각해서 그런가, 어느 순간부터 손이 멈췄다.
조금 민망했다. 기계적으로 먹던 쿠키를 입에 대지 않고 있으니 걱정할 만도 하지.
“오랜만에 먹는 거라 아껴 먹으려고 그랬지.”
그러고는 이리나의 허리를 끌어안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이리나도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부족하면 더 만들 테니 마음껏 드셔도 돼요.”
“루이제가?”
“플레이팅은 제가 하니 같이 만들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지금도 오븐 앞에 있는 루이제가 들으면 억울해 할 수도 있지만, 플레이팅에 기여했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이리나가 만든 쿠키도 먹어보고 싶은데.”
“제가 원예 동아리라 제과는 조금…”
농담 섞인 요구에 흠칫 몸을 떤 이리나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다. 이리나도 명예 제과 동아리 부원이나 다름없으니 어느 정도 제과 경험은 있으나, 루이제는커녕 트릭시와 비교해도 밀리는 실력이다. 이리나의 말처럼 소속 동아리가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밀가루에 설탕만 넣고 구워도 돼. 나 그런 것도 잘 먹어.”
“푸흐, 참고할게요.”
이번에도 농담인 줄 알았는지 이리나는 작게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농담 아닌데. 진짜 그런 것도 잘 먹는데.
‘루이제가 작년에 만든 수준만 아니면 뭐.’
열심히 만들었던 루이제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상한 재료가 들어간 것보다는 차라리 재료가 간소한 것이 낫다.
“저기, 오빠?”
미각이 돌아오자 도저히 먹을 수 없었던 ‘그’ 쿠키를 떠올리려는 찰나, 이리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아직 수제를 드리지는 못해도… 이런 거는 할 수 있는데…”
자연스레 접시에서 쿠키 하나를 들고는 내 입 앞으로 들이밀었다.
“아, 아앙~”
‘와.’
마르와 좋은 승부를 낼 수 있을 정도로 붉게 물든 얼굴, 본인도 부끄러운지 다소 기계적인 아앙.
부끄러움을 무릅쓴 애정 표현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설마 이런 서프라이즈를 할 줄은 몰랐는데.
‘아.’
갑자기 괜찮은 방법이 떠올랐다.
입 앞에 들이밀어진 쿠키를 한 입 물자 이리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용기를 낸 애정 표현이 받아들여졌으니 안심한 모양.
하지만 너무 이른 안심이었다.
“…오빠?”
쿠키를 입에 문 채로 이리나에게 다가갔다. 서로의 코가 부딪힐 정도의 거리로.
그리고 내 입 밖으로 삐져나와있는 쿠키를 가볍게 두드렸다.
“오, 오빠!?”
잠시 멍하니 그 광경을 보던 이리나가 뒤늦게 의미를 깨달았는지 황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이미 양 어깨를 잡은 뒤였다.
‘쿠키 게임.’
마침 이리나가 먹여준 쿠키가 초코 쿠키라 생각났다. 연인끼리 같은 걸 먹는다면 이게 최고지.
막대 과자였으면 더 완벽했겠지만 이걸로 만족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