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20)
로판 속 공무원 420화(421/451)
하나의 쿠키를 공유하는 고문과 이리나. 그 경이로운 모습을 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연인이 사랑을 나누는 흐뭇한 광경이지만 타인이 대놓고 볼 광경 또한 아니다. 그렇기에 아무 지적이나 야유 없이 고개만 돌린 것이다.
사실 당황스럽기도 하다. 고문과 이리나의 관계는 잘 알고 있지만, 설마 저런 애정 표현을 아무렇게 할 줄은 몰랐다. 단순한 접촉이면 모를까 저건 좀.
‘제국은 연애에 적극적인 건가?’
순간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제국은 타인의 시선보다 연인과의 사랑을 더 중요시하는 문화가 있는 거 아니냐는 합리적인 생각.
제법 가능성 있는 가설이다. 내 조국인 유벤 연합왕국과 제국은 대륙의 끝과 끝이기에 상당한 거리가 있지 않나. 유벤과 제국의 문화가 다르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니었군.’
허나 그 가설은 금방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막 새로운 쿠키를 가지고 오던 루이제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히히 웃던 임시 고문 선생은 무언가 고민하는 것처럼 손에 들린 쿠키를 바라봤다.
심지어 마르게타 공녀와 마종공께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으니, 고문의 행동은 제국인 입장에서도 파격적이라는 의미다.
‘고문이 특이한 거구나.’
심사숙고 끝에 그런 결론을 내렸다. 제국인이 적극적인 게 아니라 고문이 파격적인 것이라고. 하마터면 제국의 문화를 오해할 뻔했다.
그리고 고문이라면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도 납득할 수 있다. 최근에 위험을 감수하고 종군을 한 입장이니, 종군한 기간 동안 연인들을 향한 애틋함이 커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위기 속에서 일상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래, 당연하다. 당연한 일이기는 한데…
‘너는 왜.’
무심코 에리히를 보고 말았다. 지금 고문이 보이는 화려한 애정 표현은 종군 때문이라고 치자. 그런데 고문은 종군 전에도 연인을 만들고, 소소하다지만 애정도 보였다. 정상적인 인물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에리히는 정상적이지 않다. 주변인들이 밀어주고 있음에도 꿋꿋한 소나무 같은 놈이다.
‘다른 피가 흐르는 것도 아닌데.’
만약 둘이 남남이라면, 하다못해 고문과 에리히가 너무 다른 모습을 보였다면 에리히가 슬픈 돌연변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헌데 고문과 에리히는 피를 나눈 형제가 맞다. 루이제가 우리를 차고 고문에게 관심을 보인 직후, 당시 고문은 지금의 에리히처럼 눈치가 없는 모습을 보였다. 누가 보더라도 같은 성격을 가진 혈육이 맞았다.
그렇다면 에리히도 슬슬 고문처럼 연인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째서 저놈은 여전히 과거의 고문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안타깝군.’
에리히 옆에 앉아있는 세라를 보자마자 한숨이 나올 뻔했다. 다른 사람들이 고문의 애정 과시에 당황하거나 조용히 시선을 돌리는 반면, 세라는 마치 부럽다는 듯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에리히를 흘끗 쳐다보고, 다시 고문과 이리나를 보고, 또 다시 에리히를 보고.
안타깝다. 그 말 외에는 도저히 생각나는 말이 없다.
“으, 으르브느…”
그 와중에 이를 악문 듯한 루이제의 목소리가 들려 황급히 그 쪽을 쳐다봤다. 자신이 만든 쿠키로 다른 사람과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 충분히 분노와 질투에 눈이 뒤집힐 일─
‘아.’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를 악문 게 아니라 입에 쿠키를 물고 있었다.
“오늘따라 많이 춥네.”
류티스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으니까.
***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복귀 기념 파티는 무난히 마무리되었다.
‘다친 사람 없으면 무난한 거지.’
침대에 걸터앉으며 자기합리화를 시작했다. 비록 다른 연인들이 기겁하고 부원들이 시선을 돌렸으나, 아무튼 물리적 피해는 없었다. 그렇다면 무난하게 끝난 것이 맞다.
물론 한창 자라나는 10대들 앞에서 과한 모습을 보였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동안 못해준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가 적절하지 않겠나.
“저랑 페넬리아한테는 뭐 해 줄 지 고민하고 와요! 애매한 거면 지하실에 가둬서 안 놓아줄 거예요!”
그 대가로 방학이 조금 고달파질 것 같으나, 내가 감당해야 할 업보니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못 간다고 버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사실 에리 입장에서지하실 감금 선언을 한 건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순순히 제도로 복귀해준 것에 내가 감사를 표해야 할 정도로.
막말로 옆구리가 시려 혼자는 못 간다 드러누웠으면 달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제도에 있는 페넬리아를 지원군으로 불러 난리를 쳤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고.
때문에 고맙고도 미안할 뿐이다. 애가 좀 떼쟁이가 된 것 같기는 하나, 그래도 마음은 넓은 것 같으니까.
…그런데 떼쟁이와 마음이 넓다는 표현이 같은 사람한테 쓸 수 있는 표현이었나?
‘뭐 어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언제는 에리가 정상이었던가. 아무리 특이하고 이상한 일이라도 대상이 에리면 그럴 수 있다.
그렇게 홀로 납득하며 품 속에 있는 통신구를 꺼냈다. 늦은 밤에 연락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밤이 되어야 업무에서 해방되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 업무 중에 연락을 거는 것보다는 밤에 거는 게 나을 터.
– 칼?
그리고 그 생각이 맞았는지, 연락을 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답이 돌아왔다.
“이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버지.”
– 아니, 괜찮다. 마침 업무가 끝난 참이니.
일단 사과부터 하자 아버지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셨다.
그 모습을 보니 씁쓸한 심정을 지울 수가 없다. 은퇴를 눈앞에 두고도 늦은 시간까지 업무를 봐야 한다니, 도대체 의회 의원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직업인가.
그나마 에리히가 졸업하면 그 고통에서 해방되실 테니 다행이다. 에리히는 젊으니 고생 좀 해도 돼.
– 헌데 무슨 일이더냐? 오늘 아카데미로 복귀했다고 들었는데, 아비에게 연락할 시간에 부인들과 시간을 가져야지.
“충분히 가졌습니다. 저도 막 숙소에 도착한 거고요.”
– 부부 사이의 시간에 충분한 것은 없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 알아두거라.
순간 어머니한테 쫓겨나는 아버지가 떠올랐지만 애써 기억 저편으로 밀어냈다. 귀한 조언을 해주신 아버지 앞에서 너무 실례되는 생각이잖아.
“명심하겠습니다.그래도 이왕 연락드렸으니 오늘은 봐주십쇼.”
– 그래, 어쩔 수 없으니 말해보거라.
그렇기에 일부러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아버지도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하셨다.
“작위를 계승 받고 싶습니다.”
그 말에 아버지의 미소가 빠르게 사라졌다.
딱히 정색하신 건 아니다. 내가 큰 결단을 내렸으니 진지하게 임하고자 마음을 가다듬으신 것.
– 저번에 말한 듯이 당장 작위를 받을 필요는 없다. 상황 폐하께서도 내년 초까지는 용인하실 거다.
“괜찮습니다. 늦어도 이번 달 안에 계승 받고 싶습니다.”
– 그렇더냐.
단호한 대답에 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내 결심이 확고하다는 걸 확인하셨으니 일정을 확인하시는 듯 하다.
막 의회 업무를 끝낸 아버지에게 작위 계승이라는 빅-이벤트도 떠넘기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늦어도 이번 달 안에 계승 받고 싶다는 건 진심이다.
‘결혼 전에는 끝내야지.’
아버지의 말처럼 작위 계승 시기의 마지노선은 내년 초다. 갑작스러운 계승이니 아버지의 은퇴를 원한 상황도 딱 그 정도까지는 이해할 거다.
허나 내년 초에는 무우-려 마르와 결혼을 해야 한다. 그런데 결혼 시기에 작위 계승식까지 겹친다? 작위 계승식이 묻히거나 결혼식이 묻히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둘 다 묻혀서는 안 되는 행사다.
그렇다고 작위 계승 때문에 결혼을 미룰 생각은 없으니, 당연히 작위 계승을 앞당기는 것이 맞다. 작위보다는 마르가 더 중요하니까.
– …하긴. 첫 며느리를 위해서라도 당장 처리하는 게 좋겠구나.
이윽고 아버지도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고개를 끄덕이셨다.
– 빠르면 이번 주말에 진행할 수 있을 거다. 늦어도 달을 넘기지 않을 테니 걱정 말거라.
“예, 알겠습니다.”
늦지만 않으면 언제든 상관 없다.
***
칼의 인사를 끝으로 통신구의 빛이 사라졌다.
‘계승식이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미 상황 폐하께서 명하셨으니 작위 계승은 확정된 일이나, 막상 칼에게 계승 받겠다는 말을 들으니 감회가 새롭다.
그리고 홀가분하면서도 허전한, 불안하면서도 안심되는 기묘한 감정이 느껴졌다.300년 역사의 크라시우스 가문, 에이만카 2세로부터 제국백으로 임명된 크라시우스 가문의 주인이 변하는 순간이다. 아직 40대인 내가 300년 역사를 내려놓고, 20대인 아들에게 넘기는 순간이다.
짐을 내려놓았으니 홀가분하지 않다면 감정이 없는 것이고, 죽기 전에 내려놓았으니 허전하지 않다면 무책임한 것이다.
고작 20대인 아들에게 짐을 넘겼으니 불안하지 않다면 마음이 없는 것이고, 든든한 아들이기에 안심되지 않는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너라면 잘하겠지.’
그 기묘한 감정은 점차 홀가분함과 안심으로 기울어졌다. 칼이라면, 내 아들이라면 분명 잘할 터이니.
‘…이제 이중 백작인가?’
다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미 칼은 위리디아 백작위를 가지고 있다. 제국백도 분류상으로는 백작으로 취급되니, 칼은 공작이나 후작도 아니면서 백작위를 두 개나 겸하고 있는 거물이 된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고위 귀족이 되면 가문의 본 작위와 동등한 작위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없다. 공작이 다른 공작위를, 후작이 다른 후작위를 가지고 있는 건 이상한 일이니.
허나 칼은 해냈다. 제국백이라는 편법이기는 하나, 고위 귀족이면서 본 작위와 동등한 작위를 가진 존재가 된 것이다.
‘어쩌면 본 작위가 바뀔 수 있겠지.’
그래, 만약 위리디아 백작위가 후작위로 변하면 크라시우스 가문의 본 작위를 바꿔야 할 수도 있다.
‘크라시우스 후작가라.’
낯선 이름을 홀로 되뇌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망상이나 다름 없는 생각이다. 칼의 승작은 어디까지나 유력한 것이지 확실한 것이 아니다. 당장은 칼의 위세가 후작을 넘볼 수 있을 지경이나, 훗날은 아무도 모르지 않나.
그러나 어째서일까. 언젠가는 칼이 그 문제로 고민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