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21)
로판 속 공무원 421화(422/451)
아버지가 확언을 주셨으니 늦어도 이번 달 안에 타일글레헨 백작위를 계승할 수 있을 거다. 아버지는 확신이 서지 않으면 말을 아끼는 편이지, 냅다 내질러버리는 편이 아니니까.
‘이제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인가.’
한 글자 늘어난 풀네임을 떠올리며 품 속의 명함을 꺼냈다. 이 명함을 만든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또 새로 만들게 생겼다. 이것도 다 예산인데.
귀찮은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작위를 여러 개 가진 귀족은 오직 하나의 작위만 이름에 붙일 수 있으니. 모든 작위를 이름에 주렁주렁 달면 풀네임을 쓰는 데만 10분 정도 걸릴 사람들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하나의 작위는 가문의 본 작위어야 하기에, 위리디아라는 이름을 지우고 타일글레헨을 적어야 한다.
‘겨우 익숙해졌는데.’
미묘한 기분이다. 최근 위리디아에 머물면서 간신히 풀네임에 익숙해진 상황인데, 겨우 익숙해진 풀네임을 바꿔야 한다고? 성 세 개인 종놈도 아니고 이게 뭐야.
‘…이게 마지막이겠지.’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면 이번 변경이 마지막 닉네임 변경이 될 것이라는 거다.
이번에 타일글레헨 백작위를 계승 받으면 더 이상 받을 작위도 없고, 이름을 바꿀 일도 없다. 변수가 있다면 위리디아 백작위가 후작위로 오르는 경우인데─ 만약 위리디아 후작이 돼도 타일글레헨 백작위를 본 작위로 삼자.
솔직히 크라시우스의 근본은 제국백 작위잖아. 막말로 일반 백작 작위는 경우에 따라 오르고 내릴 수 있지만, 제국백 작위는 제국이 망하는 순간까지 변하지 않는다.
‘편하고 좋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꿋꿋함. 실로 공무원의 상징 같은 안정감이다.
다음날 동아리 시간, 부원들이 모이자마자 작위 계승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이번 달 안에 작위 계승 문제로 잠깐 자리를 비울 수 있으니 알아두라고.
물론 아버지도 내가 아카데미에서 구르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니 최대한 주말에 맞추겠지만, 혹시 모르지 않나. 여차하면 평일에 움직일 각오도 하고 있다.
“벌써? 당장 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 않았나?”
내 말에 에리히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에리히도 크라시우스 가문의 사람이니 작위 계승이 결정된 건 알고 있었으나, 다소 미뤄도 무방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갑작스레 ‘이번 달 안에 작위 계승 받는다.’ 라는 말을 들으니 의아할 수밖에.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없을 것 같더라고. 아무리 늦어도 내년 초에는 끝내야 하는데, 그때는 결혼해야지.”
“그건 그렇네.”
치트키나 다름없는 명분을 꺼내자 에리히도 빠르게 납득했다. 결혼은 중대 사항 아니겠나.
그런 에리히를 보다가 슬쩍 마르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헤실헤실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마 결혼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으로 미니 칼이나 미니 마르를 낳은 모양.
문득 궁금해졌다. 크라시우스 가문의 흑발 유전자와 바렌티 가문의 적발 유전자가 충돌하면 어느 쪽이 이길까? 적어도 셋 정도는 낳아야 비교가 가능할 것 같은데.
“그럼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잘 다녀와. 평일에 가도 부원들이랑 잘 있으─”
“너도 같이 가는 건데 무슨 소리야.”
“어?”
평온한 얼굴로 이른 작별 인사를 하던 에리히는 그 말에 굳고 말았다.
그 반응을 보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내가 작위 계승을 받으러 영지로 간다면 얘도 같이 가야 한다. 가문의 중대사니 같이 축하하기 위해? 형이 작위를 계승 받는 자리에 동생이 불참하면 불화설이 돌 수 있어서?
그런 이유도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아버지가 은퇴하면 너도 작위 받아야지.”
에리히도 작위 계승의 주인공이다. 아버지가 가진 작위는 타일글레헨 백작위 외에도 남작위가 여럿 있으며, 그중 하나는 에리히가 받을 예정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어느 작위는 물려주고 어느 작위는 가지고 있으면 완전한 은퇴가 아니잖아. 제국백이라는 휘황찬란한 이름에 시선이 쏠려서 그렇지, 다른 남작위들도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오, 너도 작위 귀족이 되는 건가? 축하한다!”
이제야 본인의 미래를 깨달은 듯 멍하니 서있는 에리히를 향해 류티스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
뭔가 도발처럼 느껴지지만 축하 맞을 거다. 류티스는 앞에서 대놓고 까면 깠지, 치졸하게 돌려 깔 놈은 아니다.
“10대 작위 귀족이라. 제국을 지탱할 기둥들이 점점 젊어지는 것 같아 기꺼울 정도군요.”
심지어 아인테르마저 에리히의 작위 귀족 등극에 찬사를 보냈다.
축하한다. 황족과 왕족의 축하 속에서 등극하는 남작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 비록 작위는 오등작 중 말단인 남작이지만 명예만큼은 백작도 부러워할 거다.
물론 난 부럽지 않다. 동생의 명예를 시기하는 건 형이라고 할 수 없지, 아암.
“혹시 남작위 중에 원하는 작위가 있으면 말하고. 동생을 위한 건데 그 정도는 양보해야지.”
“…아무것도 안 받으면 안 될까?”
한참을 침묵하다 겨우 입을 연 에리히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백작위 양보하기 전에 골라.”
순간 에리히가 험한 말을 중얼거린 것 같지만 넘어갔다.
***
잊고 있었다. 하도 크라시우스 가문을 제국백 가문이라 부르고, 가주님을 타일글레헨 백작이라고 부르다 보니 완벽히 잊고 말았다.
백작위 이상의 고위 귀족이 되면 작위 정도는 여러 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국백 중에서도 상위권인 가주님은 수많은 남작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심지어 자식도 둘이잖아.’
차라리 작위를 물려받을 자식이 많았다면 모를까, 자식이 고작 둘이면 무조건 분할 상속을 받게 된다. 후계자를 제외하면 자식이 하나라는 건데─ 그 하나를 외면할 정도로 크라시우스 가문이 빈곤한 가문은 아니다.
그렇기에 후계자인 형의 유일한 동생으로서 작위를 받아야 한다. 제국의회 의원 대리직만 떠맡는 것이 아닌, 작위까지 맡아야 한다.
‘나쁜 건 아닌데.’
그래, 엄밀히 따지면 나쁜 일은 아니다. 작위는 귀족들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나 마찬가지고, 작위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부, 명예, 권력의 격을 나눈다.
게다가 가주님이 가진 남작위는 전부 영지가 딸린 작위다. 그중 하나라도 물려받으면 평생 백수로 살아도 무방하다. 괜히 떠맡았다가 피를 보는 건 관료 같은 직책이지, 작위가 아니니까.
하지만 불안하다. 동생이라는 이유로 의원 대리 직함을 짊어지게 됐는데, 작위까지 물려받으면 뭘 떠맡게 될지 공포스러울 정도다.
“제국백인 나도 일하는데 남작 나부랭이가 논다고? 조카도 의회에서 일하는데 삼촌이 놀아?”
암울한 미래가 보인다.원래형이 낳은 자식이 장성하면 의원 대리직을 넘기고 평화롭게 지내려고 했지만,남작이 되면 조카가 장성해도 형에게 쪼이는 미래가 보여.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다. 피할 수 없는 절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뭐, 없으면 말고. 아버지가 적당한 거 하나 주시겠지.”
‘아.’
그 말에 점점 희미해지던 정신이 돌아왔다.
안 된다. 작위 자체를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내가 고를 수 있어야 한다. 남작위라고 다 같은 남작위가 아니다.
‘조용한 영지가 어디였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가주님이 가진 남작령 중 가장 평화롭고 고요한 곳. 괜히 광산이나 주요 교역로 같은 귀찮은 거 없고, 영민이 많아서 관리할 것이 많은 곳도 아닌─
…
있다. 괜찮은 곳 하나 있다.
“하디네르 남작위면 좋을 것 같은데.”
급하게 입을 열자 형이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하디네르 남작령의 위치를 떠올리는 중인 것 같다.
그러나 형이 기억을 끄집어내기 전에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 하디네르?”
세라였다.
“…아, 거기.”
이윽고 형도 하디네르의 위치를 떠올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디네르 남작령이 자이겔 남작령 옆이지?”
“응, 거기 맞아.”
자이겔 남작령, 세라의 가문인 트리마라 남작가가 관리하는 타일글레헨 백작령 휘하 소영지.
그리고 하디네르 남작령은 그런 자이겔 남작령과 맞붙어 있는 이웃 영지다. 타일글레헨 백작령 내부에서도 유난히 조용하고, 별 소란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곳.
딱이다. 귀찮은 것도 없고, 세라와도 이웃이 될 수 있는 영지다. 나뿐만 아니라 내 자식들을 생각해도 최고의 입지다.
“괜찮지?”
“네가 원한다면야.”
형의 허락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어차피 받아야 하는 작위면 하디네르가 낫지.
“이제 세라랑 이웃으로 지내겠다.”
“어, 으, 응! 그러네!”
미소를 머금고 세라에게 말을 걸자 조금 당황한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해한다. 고른 나도 아직 당황스럽거든.
***
낄낄거리는 에리히를 한 번, 얼굴이 붉게 물든 채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세라를 한 번.
그렇게 두 명을 번갈아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미친놈.’
경이롭다. 말아먹은 눈치와 별개로 본능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지, 정말 기가 막힌 선택을 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남작위는 많다. 곳곳에 흩어진 남작령도 바로 떠올리기 힘들 정도다.그런데 그 많고 많은 남작위 중에서 하디네르 남작위를 골랐다고? 자이겔 남작령의 이웃 영지를?
‘혼인하면 같이 관리하기 딱이잖아.’
본래 자이겔 남작의 자식은 둘이었으나, 한 명이 세상을 떠나며 세라만 남았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나면 자이겔 남작령은 세라의 것이 되는 거다.
그리고 하디네르 남작인 에리히와 자이겔 남작인 세라가 혼인을 하면─ 서로 붙어있는 두 남작령을 한 부부가 관리하는 것이다. 타일글레헨 백작령 내부에서 제법 강한 세력이 탄생하는 꼴이다.
‘노린 것도 아닐 텐데.’
귀족이 결혼을 통해 세력을 불리는 건 당연한 일이나, 저 새끼가 그걸 의도하고 하디네르 남작위를 고른 건 아닐 거다. 확신할 수 있다.
그렇기에 미친놈이라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의도하지 않았으면서도 이런 선택을 한 건 대체…
‘…호르펠트 백작이 독주할 수도 없겠어.’
이윽고 에리히가 의원 대리가 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던 호르펠트 백작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영지에서 출퇴근하는 것처럼 에리히도 제도가 아닌 영지 생활을 택할 수 있다. 그러면 업무 시간에는 호르펠트 백작, 퇴근 후에는 세라와 가까이 지낸다는 거다.
그렇게 되면 호르펠트 백작이 불리하다. 업무로 접하는 호르펠트 백작보다는 사적 시간에 만나는 세라와 더 친하게 지낼 테니.
‘미친 밸런스다.’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권력을 쥔 호르펠트 백작, 이웃이라는 입지를 쥔 세라.한 명이 앞서나가려고 하면 다른 한 명도 비빌 수 있는 조건이 생기고 있다.
‘중매라도 서야 하나?’
얘네한테 맡기면 30이 넘어도 답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