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22)
로판 속 공무원 422화(423/451)
에리히가 계승 받을 작위까지 고른 이후로는 딱히 처리해야 할 일이 없었다. 작위 계승식은 영지에서 준비 중이니, 단순히 작위만 받을 예정인 나와 에리히는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나마 할 일이 있다면 작위 계승이 끝난 뒤 가신들이나 영민들 앞에서 손을 흔드는 정도인데, 연설도 아닌 손을 흔드는 것쯤이야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아도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다.
“오라버니, 여기요.”
“아, 응. 고마워.”
덕분에 아버지의 연락이 오기 전까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루이제가 만든 쿠키를 먹는다거나, 쿠키를 먹는다거나, 쿠키를 먹는 그런 나날을.
‘점점 길어지네.’
한가득 쌓인 쿠키를 보다가 조심스레 하나를 들었다.’그’ 사건 이후로 평범한 원 모양이던 쿠키가 점점 막대 모양으로 진화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두 사람이 양 끝을 물 수 있을 정도로 길어졌다.
심지어 겉에 초코 코팅까지 했다.아무리 봐도 빙의 전 세계에 있던 막대 과자가 떠오르는 비주얼이잖아.
‘사람 생각하는 거 다 비슷하구나.’
그래, 롯O도 루이제도 둘 다 ㄹ로 시작하기는 하지. 그런 만큼 뭔가 통하는 게 있나 보다.
멍하니 쿠키─ 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막대 과자를 보다가 슬쩍 입에 물었다. 그러자 루이제도 살며시 반대쪽 끄트머리를 입에 물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 또한 내 업보다. 내가 제국 제과계에 독을 풀고 말았다.
‘너무 자극적이었나.’
뒤늦은 후회를 하며 야금야금 막대 과자를 갉아먹었다. 이리나가 영혼을 담아 시전 한 ‘아앙’을 쿠키 키스로 반격한 이후, 루이제는 각성한 것처럼 막대 과자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해할 수 있다. 루이제 입장에서는 자신이 애정을 담아 만든 쿠키로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눈 거니까. 아무리 그 다른 사람이 친구라고 해도,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내가 너무 무신경했지…
“잘 먹었어요, 오라버니.”
“…응, 나도.”
어느새 서로의 입 속으로 사라진 막대 과자, 활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여는 루이제.
이 기묘한 상황 속에서 겨우 입꼬리를 올릴 수 있었다. 평범한 입맞춤으로도 기뻐할 순수한 소녀에게 이상한 걸 가르쳐주고 말았다.
나는 죄인이다. 멀쩡한 반지를 쪼개서 끼는 흉악한 유행을 일으킨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과자를 사이에 낀 키스를─
“아, 잠깐만요. 손에 뭐 묻었어요.”
싱글벙글 웃던 루이제는 자연스레 내 손을 잡더니 손가락에 묻은 초콜릿을 혀로 핥았다.
본인도 부끄러운 듯 뺨이 붉게 물들었지만, 행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정신 나갈 것 같다.
주말을 하루 앞둔 날 밤.
– 내일 마법사를 보내마. 어디로 보내면 되겠느냐?
“에리히랑 같이 본관 앞에 있을 테니, 거기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 본관 앞이라. 알겠다.
역시 아버지는 확신이 서야 입을 여는 분이 맞다.빠르면 이번 주말에 처리할 수 있다던 말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놀라운 일이다. 빨리 끝냈으면 하기는 했지만, 작위 계승을 받겠다고 말을 꺼낸 게 고작 며칠 전이지 않나. 그런데 벌써 준비를 끝냈다고? 가신들을 갈아가면서 처리하신 건가?
아니, 어쩌면 상황에게 은퇴를 종용 받은 이후로 어지간한 준비는 미리 끝낸 것일 수도 있다. 내 시간에 맞춰서 준비하겠다고 하셨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
– 하디네르 남작위 계승식 뒤에 타일글레헨 백작위를 물려줄 예정이니 알아두거라.
당연한 말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본 행사인 백작위 계승식을 먼저 하면 기껏 작위 귀족이 되는 에리히가 묻힐 수도 있다. 에리히가 작위를 받는 걸 반기느냐 마느냐를 떠나, 가족의 경사를 묻히게 만들 수는 없지 않나.
이렇게 배려심 넘치는 아버지와 형이 있다니, 에리히는 복받은 녀석이 맞다. 걔가 본인의 인복을 인정해야 할 텐데.
– 아, 계승식을 마친 후에는 황궁으로 가거라. 다른 작위를 계승하면 서신으로 인사를 드려도 무방하다만, 제국백의 경우는 황제 폐하 앞에서 다시금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아, 예. 알겠습니다.”
처음 듣는 말이지만 이 역시 당연한 말이기에 납득했다.
제국백은 황제의 직속 봉신이다. 그런 직속 봉신의 작위를 다른 사람이 물려 받았는데, 황제에게 직접 인사를 하지 않고 서신으로 처리한다? 남들이 보면 황제와 제국백의 사이의 관계를 의심할 수도 있다.
심지어 그 황제가 새로 즉위한 황제고, 제국백이 황태녀의 대부면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오히려 가지 말라고 해도 가야 할 판이다.
‘징한 새끼.’
한숨이 나올 뻔했다. 기껏 황제 곁에서 벗어나 아카데미로 복귀했는데, 다시 황제 앞으로 가게 생겼다.
그래도 어쩌겠나. 꼬우면 상황이 물러나기 전에 작위를 물려 받았어야지.
‘망할.’
황궁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찔하다. 조금만 더 빨리 움직일 걸 그랬어.
***
집사장이 올린 보고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을 확인해도 흠잡을 것 없이 완벽하다.
‘이대로 진행하면 되겠어.’
빌리가 맡긴 가주의 직인을 찍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빌리도 자식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일이니 최대한 영지에 머무르고 있지만, 의원으로서 제도에 있는 시간이 더 긴 것은 필연적인 일. 덕분에 빌리보다는 나와 집사장이 계승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나마 빌리의 은퇴가 확정된 후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한지라 시간에 쫓기지는 않았다. 만약 칼이 계승을 받겠다 선언한 순간부터 준비했다면 내년이 되어서야 준비가 끝났을 테니 다행인 일이지.
‘이게 마지막이겠구나.’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를 보다가 미소를 짓고 말았다. 자식을 위한 일이니 힘들지는 않았다. 그저 이 업무가 크라시우스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마지막 업무라고 생각하니 허전하고도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이제 칼이 타일글레헨 백작이 된다면, 내년에 결혼을 한다면 크라시우스 가문의 안주인은 내가 아니다.물론 내 나이가 이제야 40이고, 첫 며느리가 적응할 시간을 생각하면 한동안은 안주인처럼 지내겠지만─ 아무튼 명목상으로는 은퇴한 전 세대 인물에 불과하다.
‘전 세대라.’
구석에서 다른 서류를 정리 중인 라우라를 보니 웃음이 터졌다. 내가 전 세대 인물이면 라우라도 전 세대겠구나.
“니아?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내 웃음소리에 시선을 돌린 라우라를 향해 애써 고개를 저었다.
말할 수 없다. 나도 너도 이제 늙어서 물러나야 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다. 그런 말을 하면 라우라가 평소처럼 불같이 화를 낼 것이 뻔하니까.
아직 한창 일할 40대인데 누구를 늙은이 취급하냐고, 아직 다른 사람들은 자기를 20대로 본다고 난리를 칠 거다. 대체 그 다른 사람들이 누군지 궁금할 따름이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나도 라우라도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편이기는 하다.그런데 그건 미용에 신경 쓰는 귀족들 전부 그렇지. 동안이 아닌 귀족을 찾는 게 더 힘든 편일 텐데.
“싱겁기는.”
다행히 라우라는 더 추궁하지 않고 넘어갔다.
‘저렇게 좋을까.’
오히려 작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가벼운 몸짓으로 서류를 옮기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기분 좋은 일이 있는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한 행동.
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 아마 내 기분도 라우라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테니.
‘역시 같이 지내니 진전이 있어.’
입꼬리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드디어 에리히와 세라의 관계에 진전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 분명 진전이 있다. 그게 아니라면 에리히가 많고 많은 작위 중 하디네르 남작위를 택할 리가 없다. 분명 세라를 염두에 두고 결정한 것일 거다.
그걸 알기에 라우라도 기쁜 마음으로 업무를 돕고 있었다. 세라의 애타는 짝사랑이 마침내 빛을 본 것이니까.
주말 아침이 되자마자 성 정문 앞에서 칼과 에리히를 기다렸다. 이미 내가 할 일은 전부 끝냈으니 밖에 나와있어도 문제는 없다. 그저 조금이라도 아이들을 빨리 만나고 싶을 뿐이다.
“…부인, 마음은 알지만 아직 마법사가 출발하지도 않았소.”
옆에서 빌리가 하는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중요한 건 아이들이 오는 시간이 아니다. 아이들을 기다리면서 가지는 설렘이다.
그 설렘이야 말로 하루를 즐겁고 행복하게 시작하는 방법인데, 빌리는 그걸 모른다.
“날씨도 싸늘하니 안에서 기다리는 게 어떻겠소?”
“괜찮으니까 걱정 말아요.”
빌리의 제안은 고맙지만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비록 빌리나 아이들보다는 못하더라도, 나도 나름 건강을 챙기고 있는 성인이다. 잠깐 바람을 맞고 있다고 탈이 날 육체는 아니다.
게다가 괜히 자리를 비웠다가 아이들이 부모가 아닌 가신들의 마중을 먼저 받으면 얼마나 섭섭할까. 이미 그 아이들에게 많은 죄를 지었는데, 더 죄를 지을 수는 없─
“그러면 이거라도 입고 있으시오.”
빌리의 외투가 내 어깨에 걸쳐졌다.
온기 가득한 흑색 외투에 살포시 미소가 지어졌다.
“고마워요.”
그 말에 빌리는 고개만 끄덕였다.
***
혹시나 탈주하거나 잠수를 탈까 봐 친히 에리히를 픽업하고 영지에 도착했다. 동생에게 작위 챙겨주려고 직접 픽업도 해주다니, 이런 형이 어디 있냐. 평생 감사해라.
“10대에 작위 귀족이 되는 게 말이 되나…”
씁쓸히 중얼거리는 에리히의 말은 가볍게 무시했다.
10대 제국백이나 10대 부장도 있는 판국인데 10대 남작 정도야 우습지. 트릭시는 인간 나이로 치면 무려 4살에 공작이 됐고.
‘응?’
아무튼 중얼거리는 에리히의 어깨를 토닥이고 정문으로 시선을 돌리니, 다소 의외인 광경이 보였다.
겨울에 가까운 날씨임에도 외투 없이 서있는 아버지, 굉장히 익숙한 흑색 외투를 걸치고 미소를 짓고 있는 어머니.
…흠.
‘너무 일찍 왔나?’
난감하다. 부부가 오붓한 감정 교류를 하려는 찰나에 자식들이 방해한 것 같은 기분이다.
‘하루만 늦게 올걸.’
그러면 크라시우스 가문의 막내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는데.
허나 아쉬운 감정을 뒤로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깨진 분위기는 도로 붙일 수 없다. 차라리 빠르게 용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게 두 분을 위한 행동일 터.
“저희 왔습니다.”
그렇기에 명절에 방문한 아들의 심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명절처럼 빠르게 치고 빠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