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23)
로판 속 공무원 423화(424/451)
작위 계승식은 그레이트 홀에서 진행하기로 결정됐다. 그레이트 홀은 성의 메인 룸이기도 하고, 제법 웅장한 크기와 화려함을 자랑하는 곳이니 계승식 장소로는 충분하다.
게다가 넓은 만큼 식탁을 배치할 공간도 많다. 이는 계승식이 끝나면 곧바로 축하 연회를 진행할 수 있다는 의미. 연회는 중대 사항이지.
“이제 도련님이 아닌 남작님이라고 해야겠군요.”
“섭섭하게 왜 그래. 남작이 된다고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시녀가 건네준 샴페인을 마시며 그레이트 홀을 둘러보니, 유모와 훈훈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에리히가 보였다.
영지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우울한 기색을 온몸으로 풍기던 놈이었는데, 이제야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인정했는지 평온한 안색을 보이고 있다. 어쩌면 유모를 만나서 기분이 좋아진 걸 수도 있고.
“제 눈에는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도련님이 나뭇가지를 들고 기사들을 괴롭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작위 귀족이 되시다뇨.”
“아니,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감정이 북받치는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는 유모의 모습에 에리히는 민망한 듯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언제 적 얘기인지 모르겠다. 내 기억에도 없는 걸 보면 이 육체가 꼬꼬마였을 시절이라는 건데, 그 정도로 옛날 일을 끄집어내는 건 너무하잖아.
그래도 그만큼 유모가 나와 에리히를 오래 지켜봤다는 거겠지. 우리 기억에도 없는 흑역사도 소환하는 건 가혹하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다.
“심지어 하디네르 남작이라니, 도련님과 이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
활짝 웃는 유모를 보자마자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유모가 직접적으로 말한 건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에리히가 하디네르 남작위를 택한 것 때문에 유모가 오해를─ 작지만 치명적인 오해를 하고 말았다고. 세라와의 관계가 진전돼서 에리히가 하디네르를 고른 거라 착각 중이라고.
안타까운 심정에 살며시 눈을 감고 말았다. 물론 에리히가 하디네르를 고른 이유 중에 세라가 있기는 하겠다만, 유모가 생각하는 방향은 아니다.
‘입 다물고 있자.’
허나 도저히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 몸이 약해서 지인이라고는 우리 형제가 전부인 세라다. 그런 세라가 오랜 세월 동안 연심을 품은 대상인 에리히다.
유모 입장에서는 드디어 소중한 딸의 연심이 이루어졌다고 생각 중일 텐데, 이 기쁜 날에 잔혹한 진실을 알려줄 수는 없지 않나. 유모가 충격으로 쓰러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미안해, 유모. 내 착한 침묵을 이해해 줘.
‘내가 남은 1년 동안 어떻게든 해볼게…’
에리히의 졸업까지 약 1년. 그 1년 사이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둘을 잇는다.
사실 나로서도 할 만큼 했으니 슬슬 손을 떼려고 했지만, 해맑은 유모를 보니 도저히 물러날 수 없다. 유모가 우리를 돌봐준 은혜를 갚아야 할 시간이다.
‘끝까지 간다.’
내가 속이 터져 죽든, 에리히가 보트를 타든 둘 중 하나다.
백작령의 모든 가신들과 사용인들이 그레이트 홀로 집결한 뒤, 가족들과 함께 단상에 올랐다.
그러자 대화를 나누거나 가볍게 목을 적시던 인원들도 하나둘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백작령의 유일무이한 주인을 향한 존중이기도 하지만, 그 주인이 바뀌는 자리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아랫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이리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오랜만이로군.”
가볍게 인파를 훑어본 아버지가 입을 여셨다.
“자주 만나면 일에 소홀하다는 것이니 기꺼운 일이다.”
적막 속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아버지 나름의 농담이기도 하고, 백작령을 위해 헌신하는 가신 및 사용인들을 향한 치하기도 했으니.
상사가 부하의 노고를 인정하고 격려한다? 하루하루 구르는 부하 입장에서는 큰 위안이 될 수밖에 없다.
“본작은 그대들의 헌신 덕에 타일글레헨의 영주로서 군림할 수 있었다. 경들의 충정은 실로 크라시우스를 지탱하는 기둥이었으니, 이는 크라시우스가 황실을 보필함에 있어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게 하였다.”
아버지의 치하와 격려는 끊이지 않았다. 크라시우스가 크라시우스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아래에서 받쳐주는 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크라시우스의 영광은 가신과 사용인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가주이자 백작이 친히 인정했다.
의례적인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의례적인 말조차 아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아버지는 평균 이상의 상사다.
“그렇다. 경들이 있었기에 본작은 지금까지 백작령을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잠시 입을 다문 아버지는 나와 에리히의 어깨에 손을 얹으셨다.
“그렇기에 본작은 경들의 헌신이 영원할 것을 믿으며 물러나고자 한다.”
그 말과 함께 아버지는 품 속에서 인장을 꺼냈다.
“크라시우스 가문의 정당한 일원, 에리히 크라시우스는 들으라.”
“에리히 크라시우스가 가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아버지의 명에 에리히는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가주에게서 작위 계승이라는 은혜를 받는 자가 뻣뻣하게 서있을 수는 없다.
“하디네르 남작은 타일글레헨 백작령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이나, 크라시우스 가문의 일원으로서 가문을 위해 헌신한 너는 하디네르 남작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다.”
그러고는 에리히에게 친히 인장을 쥐어주셨다.
“에리히 크라시우스. 하디네르 남작으로서 의무를 다하겠느냐?”
“에넨과 대제 앞에서 맹세하오니, 제 생이 다하는 날까지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좋다. 이제 너는 에리히 크라시우스 오브 하디네르 남작일지니, 위로는 네 형과 황실을 향해 충성하며 아래로는 영민들을 보살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작위 귀족의 탄생을 알리는 아버지의 선포. 그 선포에 가신과 사용인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수 소리가 커질수록 에리히의 표정도 점점 해탈에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힘내라.’
무슨 심정인지 알 것 같기에 속으로 소소한 격려를 보냈다. 에리히는 일개 도련님이 아닌 어엿한 작위 귀족이 됐다.앞으로는 단순히 가문이나 영지 단위의 일뿐만 아닌, 제국 단위의 일에도 열심히 굴러야 하는 신분이 된 것이다.
그러니 힘내라, 에리히. 다행히 대영주 휘하의 중소 영주까지 구를 일은 별로 없을 거다.
“크라시우스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 칼 크라시우스 오브 위리디아는 들으라.”
…게다가 아무리 굴러도 나보다 구를 것 같지도 않고.
“칼 크라시우스 오브 위리디아가 가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다시 고요해진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타일글레헨 백작은 황실을 수호하는 서른의 제국백 중 하나이며 황제 폐하를 위해 앞장서는 검이자 방패이나, 크라시우스 가문의 후계자로서 제국을 위해 헌신한 너는 타일글레헨 백작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이제 아버지가 타일글레헨 백작으로서 의무를 다하겠느냐 물어보고, 나는 에리히처럼 에넨과 대제 앞에 맹세한다고 하면 끝─
“또한 너는 백작이 되기 전부터 귀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였으니, 이는 천상의 에넨과 대제께서도 알고 계심이라.”
갑자기 다른 문장이 나와버렸다.
‘뭔데.’
당황스럽다. 공무원이 매뉴얼과 다른 상황을 접하면 얼마나 기겁하는지 잘 아시는 분이 이런 짓을 하다니, 아버지가 조금 원망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어느새 아버지는 내 앞에 백작의 인장을 내려놓으시고 어깨를 토닥이셨으니까.
“크라시우스 가문의 가주로서 후계자인 너에게 모든 것을 물려줄 것이다. 받아들이겠느냐?”
“…선대의 영광을 후대에 물려주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에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어머니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치고 계셨다.
이윽고 에리히도, 집사장도, 시녀장도, 다른 가신들과 사용인들도─ 전부 우렁찬 박수와 함께 새로운 제국백의 탄생을 축하했다.
…
‘최연소 기록은 피했네.’
갑자기 호르펠트 백작이 떠오르는 날이다.
깔끔하게 끝난 계승식처럼 축하 연회도 평온히 흘러갔다.
애초에 연회에 참석한 사람이라고 해봤자 백작령 각지에서 온 가신들 정도인데, 아무리 사교계와 거리가 먼 나라도 가신들 얼굴은 그럭저럭 아는 편이다. 영주가 될 후계자가 가신들하고도 데면데면하면 이상하잖아.
오히려 ‘당연히’ 백작이 될 예정이었던 나보다 새롭게 작위를 받은 에리히에게 가신들이 몰렸다. 신임 백작의 동생이자 백작령의 2, 3인자 포지션이 될 사람이니 미리 얼굴도장이라도 찍으려는 거겠지.그 덕에 연회는 에리히를 제물로 삼아 평화롭게 끝낼 수 있었다.
‘이왕이면 황궁도 대신 가주지.’
황궁을 올려다 보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물론 에리히가 들었다면 쌍욕을 내뱉었을 발상이지만 진심이다. 어쩌면 에리히도 황궁 구경하니 좋지 않을까?
허나 제국백은 에리히가 아닌 나였기에 내가 황궁에 오고 말았다. 제도를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황제를 보게 생겼다.
“각하, 들어가셔도 됩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일단 새로 임명된 황실 기사단장의 검문을 받으며 정문을 통과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 단장도 융통성 넘치는 가라 단장이라는 것이겠지만, 황제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큰 위안은 되지 못했다.
차라리 단장이 FM이고 황제가 느슨한 게 낫지. 황궁 안에 보스가 버티고 있는데 문지기가 유순해봤자 무슨 의미… 가?
‘뭐야 저거.’
절로 걸음이 멈췄다. 황제가 머무는 태양전으로 향하던 중, 이상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 꼬곡, 꼭, 꼬고고고곡!
경박한 울음소리를 내며 질주하는 작은 동물.
“저쪽으로 간다!”
“다치면 안 된다! 최대한 공터 쪽으로 몰아!”
그리고 그 뒤를 맹렬하게 쫓는 기사들.
정신이 나갈 뻔했다. 동물 따위가 정예 중의 정예인 황실 기사들의 포위망을 뚫고 있는 기괴한 광경. 설마 살면서 저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아니, 그것보다 황궁에 저런 게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애처롭게 파닥이는 날개, 좌우로 흔들리는 벼슬, 이리저리 굴리는 작은 눈동자.
‘닭이잖아.’
닭이 왜… 황궁에 있지?
혹시 오늘이 복날이었나? 아닌데, 이 세계에는 그런 거 없는데?
“아, 각하!”
그러던 중 닭을 쫓던 기사 중 하나가 알은체했다.
전대 황실 기사단장이었다.
‘뭐지 시발.’
진짜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