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24)
로판 속 공무원 424화(425/451)
전대 황실 기사단장의 인사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지나가다 만난 거라면 평범히 인사를 나눌 수 있었겠지만,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만나고 말았다.
‘왜 여기 있어?’
혼란스럽다. 저 양반이 황실 기사단장 자리에서 물러난 건 상황을 호위하기 위해서다. 상황의 은혜를 받아 황실 기사단장에 올랐던 인물이기에, 상황의 평온한 노후를 위하여 단장직을 벗어던진 것이다. 단장이 아닌 개인 자격이어야 상황 호위가 편하니까.
황제도 은혜를 갚겠다고 물러나는 인물을 잡을 정도로 프로 개새끼는 아니라 상황의 호위 기사로 활동 중이라고 들었는데, 상황 호위는커녕 닭이나 쫓고 있다.
진짜 뭔데 이거. 혹시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황궁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 꼬고고곡! 꼬곡, 꼭!
그 와중에 추격전을 펼치고 있던 닭은 더욱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날개를 파닥였다.
기이한 일이다. 분명 닭은 날지 못하는 새로 알고 있었는데.
‘잘 나네.’
너무 잘 난다. 자기를 공터 쪽으로 몰던 기사를 뛰어넘을 정도로 높이 날았다.
혹시 닭이 아니라 비둘기인가? 그런데 비둘기는 닭보다 못 날, 아니 비둘기는 날 수 있는 새지 참.
아무튼 닭 한 마리에게 농락당하는 기사들을 보다가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어지간한 사건이면 기사들을 믿고 지나갔겠으나, 이 상황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황제와 대면 중에 닭 울음소리가 들리면 서로 머쓱하잖아.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전대 단장에게 합류 의사를 전한 후 팔을 뻗었다. 마침 포위망을 뚫은 닭이 나한테 달려오─
“조심하셔야 합니다! 상황 폐하께서 직접 기르시는 닭입니다!”
팔을 뻗은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상황이 기르는 닭?’
전대 단장의 말을 듣자마자 이 기괴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작 닭 한 마리에 기사들이 쩔쩔매는 이유가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무려 상황이 기르는 닭이다. 잘못 건드렸다가 어디 부러지거나 터지면 상황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다. 물론 상황이 닭 한 마리에 분노를 표할 사람은 아니나, 제국을 위해 수십 년을 헌신한 노인의 노후를 박살 내는 꼴 아닌가.
벼슬을 휘날리는 닭이 내 다리 사이로 통과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괜히 힘줘서 잡았다가 터지면 어떡해.
‘그럼 나보다 높은 건가?’
이윽고 그런 의문이 들었다. 상황이 직접 기르고 기사들이 전전긍긍하는 애완 닭. 그런 존재를 고작 동물로 봐도 괜찮은 건가? 어쩌면 제국백인 나보다 높은 존재 아닐까?
막말로 제국백은 서른이지만 이 닭은 오직 하나다. 어떠한 존재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
‘윗사람 맞네.’
눈물 겨운 자기 객관화를 끝냈다. 저 계공(鷄公) 각하는 나보다 귀하신 분이 맞다.
“저, 저놈, 황후궁으로 가고 있습니다!”
귀하신 분이 황궁 구경을 하고 싶으시다면 그냥 두는 게 도리가 아닐까 고민하는 사이, 한 기사가 처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그 외침에 다른 기사들의 표정도 급변했다.
“쫓아! 잡지 못하면 몸으로라도 막아!”
전대 단장마저 표정이 험악하게 돌변하여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다. 이미 황궁을 제 집처럼 누비고 다닌 것이 황후궁에 들어간다고 딱히 달라질 건 없지 않나? 게다가 황후 성격상 이런 해프닝 정도는 웃어넘길 수 있는 사람이고, 황태녀도…
‘이런 시발.’
황태녀에게 생각이 닿자마자 전대 단장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황후만 있다면 괜찮지만 황후궁에는 아직 옹알이 중인 황태녀가 있다. 면역력이 약해 사람도 조심해서 만나야 하는 어린 아기가 있다.
만약, 아주 만약 닭이 황후궁에 난입하여 황태녀의 건강에 이상이 온다면 전원 모가지다. 아무리 정숙한 황후여도 분노를 표할 것이고, 상황은 닭과 함께 우리를 기름에 집어넣을 것이다.
그렇기에 미친 듯이 달렸다. 저 새끼가 황후궁에 발을 들이면 계공이 아닌 너겟이 되는 거다.
다행히 계공 각하가 너겟 새끼로 전락하기 전에 생포 작전을 끝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각하의 깃털이 몇 개 빠졌으나 다친 곳은 없었다.
정작 기사들은 땅바닥을 구르느라 난리였지만, 기억에서 지우기로 했다. 이 사건은 서로의 흑역사니 배려할 필요가 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덕분에 무사히 잡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쓴웃음을 짓는 전대 단장의 인사에 머쓱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런 일로 감사를 듣는 것도 민망한 일이니.
“상황 폐하 앞에서는 얌전한 편인데, 이상하게 상황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시면 온갖 사고를 칩니다.”
내 씁쓸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전대 단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부연 설명을 했다.
딱히 알고 싶은 정보는 아니다. 주인밖에 모르는 짐승 새끼 때문에 이 고생을 했다는 거잖아.
‘계새끼.’
전대 단장의 손에 붙잡혀 퍼덕이는 닭을 내려다 봤다. 주인 앞에서 발광하면 냄비로 직행할 거라는 걸 알아서 자제하는 건가? 지능범이 따로 없다.
“전에는 소한테 싸움을 걸더니만.”
그리고 기가 빨린 듯 중얼거리는 전대 단장의 목소리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닭이 소한테 싸움을 거는 것도, 황궁에 소가 있는 것도 전부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이건 대체.’
정신이 나갈 것 같다. 분명 황제 시절에는 엄격하고 냉정하던 사람이었는데, 상황이 되니 황궁에서 동물농장을 찍고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분명 기행이나 애써 불만을 억눌렀다. 지금 황제 새끼가 이 난리를 쳤다면 쌍욕을 했겠다만, 상황이라면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이랬을 테니까.
‘…자연 생활도 중요하지.’
그래, 사실 상황은 황태녀를 위한 자연 공간을 마련한 것일 거다. 지루한 황궁 생활을 보낼 황태녀에게 동물 친구들을 마련해준 것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업무를 보던 중, 문 밖에 있던 헨드릭 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타일글레헨 백작입니다.”
그 말에 무심코 시계를 보고 말았다. 정문에 있는 황실 기사단장에게서 감찰성 장관이 통과했다는 보고를 들은 것이 한참 전의 일이다. 아무리 정문과 태양전 사이의 거리가 멀다지만 이제야 왔다고?
이상한 일이다. 단장이 가짜 보고를 했을 리도 없고, 장관이 늦장을 부렸을 리도 없다.
“들라하라.”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기는 하나 당사자에게 직접 들으면 될 일이다.
게다가 헨드릭 경의 목소리도 평온했기에 위기감은 들지 않았다.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이 된 후로 더욱 업무에 성실해진 헨드릭 경이다. 만약 장관에게서 이상한 낌새가 보였다면 진작 반응했을 터.
“황제 폐하 만세. 황실의 은혜를 받은 종, 크라시우스 가문의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이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장관이 들어왔다.
그것도 하루 아침에 변한 풀네임과 함께.
‘타일글레헨이라.’
픽 웃음이 나왔다. 이제 장관은 일개 후계자가 아닌 제국백 당사자가 되었다. 명실상부한 황제의 수족이자 직속 봉신이 된 것이다.
즐거운 일이다. 이미 황실과 제국을 위해 헌신하는 장관에게 제국백이라는 이름까지 붙다니, 이건 일하다가 죽어야 할 숙명적 이름이 아닌가.
“내 백작이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지.”
무릎을 꿇은 장관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장관은 감찰성 장관이 아닌 타일글레헨 백작으로서 방문한 것이니 기꺼이 백작이라 칭했다.
그 세심한 배려에 장관이 흠칫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감동한 모양이다.
“일어서게.”
“예, 폐하.”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는 장관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째서인지 계속 웃음이 나왔다.
“최연소 제국백은 되지 못했군. 아쉽게 됐어.”
“…과분한 명예를 피할 수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를 악문 듯한 대답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최연소 부장이자 최연소 장관이 된 순간부터 명예는 직통으로 맞은 상태지만, 장관이 감사하게 생각한다니 굳이 지적하지는 않기로 했다.
사람은 소소한 행복을 지녀야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법. 그 소소함을 깨트리는 건 도리가 아니다.
“전대 타일글레헨 백작, 빌헬름 크라시우스는 제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였다.”
그 말에 장관의 기세가 다소 누그러들었다. 황제로서 제국백 작위 승계를 인정하는 말이자, 자신의 부친을 치하하는 말이기도 했으니.
“빌헬름 크라시우스는 후계자 시절부터 황실과 제국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제국백이 되자 두 차례의 전쟁에 종군하는 등 수많은 공로를 세웠다. 그렇기에 상황 폐하께서도 빌헬름 크라시우스를 특히 총애하셨음이라.”
의례적인 말은 아니다. 상황께서는 제국백들을 신뢰하셨고, 그중 전대 타일글레헨 백작을 특히나 눈 여겨 보셨다.
크라시우스 가문 특유의 묵묵한 충정을 마음에 들어하신 것도 있고, 빌헬름 크라시우스 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것도 있으나─ 장관을 아카데미가 아닌 행정부로 보낸 공로가 매우 컸으니까.
만약 장관이 아카데미에 갔다면 제국의 역사가 좋지 못한 방향으로 바뀌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그 정도로 상황 폐하께서 총애한 충신이 물러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짐은 웃을 수 있다. 선대의 뜻을 이은 후계자가 짐을 보필할 터이니 어찌 슬퍼하겠는가.”
“황송한 말씀입니다, 폐하.”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장관의 어깨를 다시 토닥였다.
“그러니 짐은 에이만카 2세로부터 제국백의 이름을 하사받은 크라시우스 가문의 뜻을 존중하여, 타일글레헨 백작위가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에게 승계되었음을 인정한다. 이제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은 크라시우스 가문의 가주이자 제국의회의 정당한 의원일지니─ 황실을 향한 변치 않은 충정을 기대하노라.”
“선조께 베푼 황실의 무거운 은혜를 잊지 않고, 영원한 충정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제국백 계승 절차가 완전히 끝났다.
애초에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니 길게 끌 것도 없다. 어디까지나 황제와 제국백 사이의 유대를 강조하기 위한 절차니 복잡할 필요가 어디 있겠나.
그리고 지금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헌데 백작.”
“예, 폐하. 하명하소서.”
“혹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나?”
장관의 작위가 늘어난 것보다 늦은 이유를 묻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
단호하고 정확한 질문에 장관의 눈동자가 잠시 좌우로 굴렀으나, 금방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 상황 폐하께옵서 기르시는 닭을 발견하여,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느라 늦었습니다.”
‘아.’
대충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 것 같다.
그렇군, 장관은 닭을 만났군.
‘난 말이었는데.’
며칠 전, 황궁을 거닐다 웬 흑마와 정면에서 마주쳤던 기억을 떠올렸다.
상황께서 애정을 담아 기르고 계신 듯 덩치도 우람하고 털에 윤기도 흘렀었지. 도대체 어떻게 마구간을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걸세.”
덤덤한 대답에 장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께서 친히 기르시는 것들을 험하게 묶어둘 수는 없으니, 우리가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