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25)
로판 속 공무원 425화(426/451)
제국에서 제일 고귀한 장소에 인간과 동물이 공존하는 기묘한 현상. 실로 기묘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귀찮기는 한데 우리가 조심해야 한다.’ 라는 말로 일축했으니 어쩔 수 없다. 이제 황궁은 자연과 함께하는 친환경 장소로 변모하는 수밖에.
사실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막 즉위한 황제가 상황이 기르는 동물을 내쫓을 수도 없지 않나. 까마득한 조상의 유언도 받들어야 하는 것이 황제인데, 살아있는 상황의 동물? 천연기념물처럼 애지중지 여기며 돌봐야 한다.
귀찮고 꼬울 수도 있지만 어쩌겠나. 황제라는 직책을 혈연 계승으로 얻었다면 선대를 융숭히 대접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융숭한 대접에 애완동물도 끼어있다는 것이 문제기는 하나,
‘신경 쓸 필요 없겠지.’
어차피 내가 아니라 황제가 걱정할 일이다.황궁에 방문하지만 않는다면 상황의 브레멘 음악대와 접촉할 일도 없으니까.
물론 황태녀의 대부 겸 장관 내정자기에 아예 발걸음을 끊을 수는 없겠지만, 설마 오늘 같은 일이 황궁에 올 때마다 터질 것 같지는 않다. 황실 기사단도 자신들의 멘탈을 위해 노력할 테니.
그런데 진짜 신기하기는 하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닭이 탈출한 거지? 시골에서 기르는 닭도 문만 잘 걸어 잠그면 탈출할 일은 없잖아.
‘영약이라도 먹였나?’
순간 부리에 마나를 두른 채 자물쇠를 부수는 닭을 상상하고 말았다. 마나를 쓰는 닭이면 탈출해도 인정이지.
“아, 그러고 보니 백작. 시간 좀 내줄 수 있겠나?”
그리고 마나를 두른 부리로 소를 쪼아대는 닭을 상상할 무렵, 황제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백작이 오늘 올 줄 알고 준비한 게 있어서 말일세. 이왕 온 김에 어울려줬으면 하는군.”
“예, 폐하. 그리 하겠습니다.”
사실상 권유의 탈을 쓴 명령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너 이제 할 일도 없으니 나랑 일 좀 하다 가자.’ 라는 말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바쁜데 귀찮게 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작위 계승 신고를 하는 것에 맞춰서 준비했다고 하니 더더욱 거부하기 애매하다.
“다행이로군. 전승공도 지금이 아니면 신년은 돼야 시간이 난다고 하던데, 신년 때는 짐이 바쁘지 않나. 혹시 백작이 어렵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다네.”
황제의 말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단 둘이 하는 일이 아니라 전승공까지 포함된 일이었어?
‘뭐지?’
단둘이었다면 평소처럼 짬처리라고 생각했겠으나, 공작까지 낀 일이면 보통 일이 아니다.심지어 전승공이 끼는 것이라면 더더욱.
불안하다. 요즘 전승공은 황제의 장인으로서 괜한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총사령부 지박령이 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전승공까지 겨우 시간을 내서 움직일 사안이라면 도대체 무슨 일일지 두려울 정도다.
“…폐하, 송구하오나 소신이 무엇을 하면 되올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기에 짧게 머리를 굴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저히 짚이는 게 없으니 당사자에게 직접 묻는 것이 확실하다.
다행히 내 질문에도 황제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딱히 비밀리에 진행해야 하는 일이라거나 판을 크게 벌여야 하는 일은 아닌 것 같─
“황실의 큰어른께 인사를 드리려고 하니, 같이 가서 고개만 숙이면 되네.”
?
“원래는 즉위하자마자 찾아뵙는 것이 맞는데, 근래 피를 뽑으셔서 그런지 주무시고 계시더군. 감히 그분을 깨울 수는 없어서 이제야 가게 됐지.”
황제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웃지 못했다.
황실의 큰어른이니, 근래에 피를 뽑아서 주무시고 계신다느니, 다소 뜬금없는 말이지만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드래곤 로드잖아.’
확실하다. 분명 에이만카 대제의 자식인 드래곤 로드를 말하는 거다.애초에 직계가 개박살 나서 방계가 즉위한 황실 아닌가. 그런 황실에 큰어른이라고 할 존재는 드래곤 로드밖에 없다.
‘미친.’
쌍욕이 목 끝까지 치솟았다가 겨우 가라앉았다.
아니, 드래곤 로드를 만나러 간다는 걸 이렇게 덤덤히 말해도 되는 건가? 나름 준비도 갖추고, 선물 같은 것도 준비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페넬리아처럼 단순히 피만 뽑고 오는 것이라면 몸만 가도 되지만, 황제의 방문은 대제의 후예가 큰어른께 문안 인사를 드리는 방문이다. 당연히 보다 철저하고 화려한 행렬을 준비해야 할 텐데?
“그분은 소란스러운 걸 싫어하신다네.”
그런 심정을 눈치챘는지, 황제는 픽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당사자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황제의 행차치고는 간소한 규모의 행렬이 드래곤 로드가 머무는 동굴로 향했다. 다소 험한 지세에 위치한 동굴이라 대규모로 가봤자 불편하기만 하니 어쩔 수 없는 일.
“경들은 여기서 대기하고 있도록.”
“예, 폐하.”
그마저도 호위를 위해 참여한 황실 기사들은 동굴 앞에서 대기하게 되었으니, 동굴 안으로 들어간 건 나와 황제, 전승공뿐이었다.
‘결국 이렇게 됐네.’
가슴이 옹졸해진다. 역대 황제들이 즉위식 직후, 드래곤 로드에게 인사를 하러 간다는 건 알고 있다. 혼자가 아닌 극소수의 심복들과 함께 간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상황은 전 궁내성 장관과 갔으니 ‘황제와 함께 드래곤 로드를 본 신하’ 라는 건 신뢰와 총애의 상징이다.
그리고 나도 그 신하에 포함되고 말았다. 황태녀의 대부가 된 순간부터 예상한 일이지만 조금은 씁쓸하다. 이제 나는 황실의 큰어른이 보기에도 황제의 애착 장난감이라는 것이니.
“왔느냐?”
아무튼 씁쓸함을 뒤로하고 동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니, 갑작스레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
“잠시 잠들었던 사이에 왔었더구나. 반겨주지 못해 미안하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오.’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비늘과 이쪽을 내려다 보는 보랏빛 눈. 누가 봐도 대제의 자식이자 현 드래곤 로드다운 모습이었다.
“말도 없이 찾아왔던 저희의 잘못인데 어찌 사과를 하십니까. 부디 말씀을 거두어주십시오.”
멍하니 드래곤 로드의 모습을 구경하는 사이, 드래곤 로드의 사과를 들은 황제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일생에 두 번은 보지 못할 희귀한 광경이다. 하늘 아래 황제가 스스로를 낮춰야 하는 존재가 있다니. 아무리 교황이라도 황제와 동등한 존재일지언정 위에 서는 존재는 아닌데.
“그러지 말거라. 너는 아버지의 뜻을 잇는 리브노만의 가주이자 제국의 황제일지니. 내가 너를 가벼이 여기면 아버지께서 크게 노여워하실 거다.”
정작 드래곤 로드는 황제의 말에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물론 드래곤 로드 입장에서만 살며시지, 우리 입장에서는 거대한 건물이 좌우로 흔들리는 기분이었지만.
“헌데 코르부스, 그 아이는 잘 지내고 있더냐?”
“예. 아직 정정하십니다.”
“그 아이는 제국을 위해 많은 고생을 하였지. 이제 평온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
그러고는 꼬리를 느릿하게 흔들었다. 마치 상황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소식에 안심한 것처럼.
아마 저 드래곤 로드 입장에서도 상황이 수십 년 동안 겪은 고난의 행군은 안타까운 일이었나 보다.
“길버트라고 했었지. 이제 몇 세라고?”
“에이만카 17세입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10세가 즉위한 것이 얼마 전 같은데.”
추억에 젖은 드래곤 로드에게는 미안한 생각이지만, 너무 늙은이 같은 발언이 튀어 나왔다.에이만카 10세면 역사 교과서에나 나오는 존재잖아. 좀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라고.
“…이런, 또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말았군.”
그래도 자신이 옛날 얘기를 한다는 걸 인지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래, 너희가 이 아이를 보필할 아이들이구나.”
추억에서 벗어난 드래곤 로드의 시선이 어느덧 나와 전승공에게 향했다. 황제와는 충분히 대화를 나눴으니 슬슬 이쪽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예, 영광스럽게도 그러하옵니다.”
정중히 대답하는 전승공을 따라 고개를 숙이니 잠깐 침묵이 맴돌았다.
“하얀 아이야. 혹 그 검이 내 손톱이더냐?”
“그렇습니다. 황송하옵게도 폐하께서 소신에게 하사하신 귀물이옵니다.”
드래곤 로드의 질문에 전승공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드래곤의 손톱으로 만든 검은 공작가가 아닌 국가의 보물로 삼아도 부족함이 없는 물건. 그런 물건을 전승공이 가질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손톱을 인간에게 넘긴 드래곤 로드 덕분이니까.
“그 검으로 황실과 제국의 적을 베거라. 그렇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을 터이니.”
“명심하겠습니다.”
전승공의 즉각적인 대답에 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자신의 손톱이 황실을 지킨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 것 같다.
…그런데 자기 손톱을 다른 사람이 정성스레 가공해서 가지고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좀 묘할 것 같은데. 드래곤이라 인간과 감수성이 다른 건─
“으음?”
갑자기 웃음소리가 멈췄다.
“검은 아이야, 내가 인간의 나이는 잘 모르지만─ 너는 유독 어린 것 같구나.”
그 말에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나한테 최연소라는 딱지가 덕지덕지 붙기는 했지만, 300년을 살아온 드래곤 로드가 보기에도 독보적인 놈이었나? 역대 황제의 심복 중에 나랑 비슷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아니, 그래도 20대 중후반 정도면 한 명은 있을 법 하지 않나?
“아직 젊지만 능력만큼은 부족함이 없는 자입니다. 또한 황태녀의 대부기도 하니, 황실의 기둥이나 다름 없습니다.”
“오호.”
할 말을 잃은 나 대신에 황제가 지원 사격을 해줬으나 고맙지는 않았다.
저 개새끼, 목소리에 묘하게 웃음이 섞여있어.
“허면 검은 아이는 다음에도 볼 수 있겠구나.”
그 말에 마음으로 울고 말았다.
***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길버트가 로드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보통 즉위식 직후에 가는 걸 생각하면 늦은 방문이나, 그분에게 개월 단위의 시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딱히 신경 쓰시지 않겠지.
그러니 길버트는 적당히 덕담이나 듣다가 돌아올 터. 내가 걱정할 것은 없다.
“황후궁까지 갈 뻔했다고?”
“예, 상황 폐하.”
…지금 내가 걱정해야 할 것은 길버트가 아니라 이 힘이 넘치는 녀석이다.
황실 기사단장 자리에서 물러나 내 호위를 맡은 로만 경의 보고에 잠시 눈을 감았다. 내 손에 잡혀 가만히 눈만 깜빡이는 녀석이 대형 사고를 칠 뻔했다.
내가 잠든 사이를 노려 탈출한 것도 문제지만, 하필 황후궁으로 달려갔다. 아직 어리고 어린 황태녀가 있는 곳에 짐승이 들어갈 뻔한 것이다.
“기운도 넘치는군.”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소신의 책임이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다친 사람도 없는데 무슨 책임을 묻겠나. 또한 경의 충정은 잘 알고 있으니 그런 말은 하지 말라.”
그 말에 더욱 고개를 숙이는 로만 경을 보다가 닭의 목덜미 부근을 뒤적거렸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이 녀석들에게 이름표를 붙여뒀었지.
‘이 녀석이군.’
이윽고 깃털에 파묻힌 이름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너겟.’
프라이드, 오븐과 함께 열심히 달걀을 낳는 녀석 중 하나.
먹이를 줄 때는 잠잠하길래 방심했거늘. 앞으로는 유심히 살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