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26)
로판 속 공무원 426화(427/451)
저주에 걸렸다. 어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일개 주술사의 저주가 아닌, 무려 드래곤 로드나 되는 존재의 저주에 걸리고 말았다.
“허면 검은 아이는 다음에도 볼 수 있겠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저주가 맞다. 드래곤 로드가 직접 ‘너는 다음에도 보겠네.’ 같은 말을 남겼다면 무엇보다도 강렬한 저주이자 낙인이 아니겠나. 이 낙인은 나와 드래곤 로드 중 하나가 죽어야 지워지는 끔찍한 낙인이다.
그리고 둘 중 누가 먼저 죽을지는 뻔하니, 다르게 표현하면 평생을 함께 할 낙인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다음에만 보면 그나마 다행 아니에요? 가끔 3대나 4대를 섬긴 신하도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 저주는 여기 있었구나.”
허나 내 하소연을 들은 에리는 오히려 더욱 소름끼치는 욕설을 내뱉었다. 아니,욕설은 아니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패드립보다 심한 말이었다. 3대나 4대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그렇기에 서운한 감정을 담아 오른쪽 무릎에 앉아있던 에리를 간지럽혔다.
“치, 치사해! 자기도 부정 못, 하니까! 이런 식으로…!”
“조용.”
진심을 담은 손짓에 에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비비 꼬았다. 탈출하지 못하게 허리도 꽉 끌어안고 있었으니 에리가 할 수 있는 건 불판 위 오징어처럼 꿈틀거리는 것뿐이다.
“히헥, 흐이잇, 흐헤에엣…!”
거의 울듯이 몸을 꼬았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그만큼 지금 에리가 한 말은 선을 넘어도 화려하게 넘은 것이다.
뭐? 다음에만 보면 다행이야? 3대나 4대나 섬긴 신하도 있어?
‘4대로 끝나면 다행이지.’
착잡한 심정에 조용히 눈을 감고 말았다. 동굴에서는 드래곤 로드의 수제 저주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나는 4대로 끝나면 다행인 상황이다.
트릭시가 만든 수명 증폭 포션. 만약 그 포션을 복용한다면 나도 수백 년을 살아갈 텐데, 그렇게 되면 4대가 아니라 14대를 섬기는 수가 있다. 드래곤 로드 앞에서 ‘이 분은 에이만카 30세입니다.’ 라는 말을 하고, ’17세가 즉위한 게 얼마 전 같은데.’ 라는 답을 들을 수도 있다는 거다.
‘망할.’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무병장수가 모든 인간의 소원이기는 하지만, 그 장수가 수백 년 단위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마 황제도 수백 년을 살라고 하면 고개를 젓지 않을까.
허나 나는 거부하기 어렵다. 내가 장수를 택하지 않으면 트릭시 홀로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니.
‘어렵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수명 포션은 수십 년을 복용해야 효과가 나온다고 해서 천천히 결정하려고 했으나, 드래곤 로드를 보고 나니 기억 저편에 묻어둔 수명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말았다.
물론 당장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이건 나와 트릭시만의 문제가 아닌 가족 전체의 일이지 않나.
그래도 씁쓸하고도 복잡한 감정은 어쩔 수 없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얼마나 오랜 시간을 숙고하든 슬픔은 각오해야 하는 일─
“주, 주인님.”
“응?”
왼쪽 무릎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상념이 끊겼다.
“에리도 반성하는 것 같으니, 이제 놓아주시는 건…”
그 말에 에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흐끅, 그으으윽…”
“아.”
거의 울다시피하는 에리를 보자마자 손을 거두었다. 너무 열중해서 그런지 과한 대미지를 주고 말았다.
“역시 피네가 마음이 넓네.”
“과, 과찬이십니다!”
민망함에 애써 페넬리아에게 말을 걸자, 본명이 아닌 애칭으로 불린 피네는 파르르 몸을 떨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재미있는 반응이라 절로 웃음이 나왔다. 스킨십도 겨우겨우 적응하고 있던 피네는 고작 두 글자인 애칭에 다시 침몰하고 말았다. 정작 에리가 애칭으로 불리는 걸 부럽다는 듯 본 주제에.
“과찬은 무슨. 피네가 착해서 착하다고 한 건데.”
그 말과 함께 피네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여러 의미로 내성이 약한 피네니, 시간이 날 때마다 이런 애정 표현을 하는 것이 옳다. 입을 맞추고 있는 지금도 진동이 느껴질 정도니까.
만약 내성이 약하다고 표현도 적게 하면 신부가 결혼식장에서 기절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건 안 되지.
“또 저만 빼고 좋은 분위기!”
그 와중에 제정신을 차린 에리가 기습적으로 내 귀를 물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기습이라 피네의 입술까지 덩달아 깨물 뻔했다.
황제에게 제국백 작위 계승 보고, 드래곤 로드에게 문안 인사, 제도에 들른 김에 에리와 피네랑 놀기.
마지막 일정 중 눈이 뒤집힌 에리에게 시달리느라 볼과 입술이 부르트기는 했지만,제도에서 해야 할 일들은 무난히 끝내고 아카데미에 복귀할 수 있었다. 아무튼 무난히 끝났다.
‘뭉쳐야 좀 편할 텐데.’
그러나 무난한 마무리와 별개로, 감찰관 숙소로 들어가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연인들이 흩어져 있어서 불편하기 짝이 없다. 누구와 만나면 누구랑은 만나지 못하고, 누구랑은 한 스킨십을 누구와는 하지 못하는 기괴하고 끔찍한 상황.
연인들이 전부 한곳에 모여 있거나, 하다못해 하루 안에 만날 수 있는 여건이 보장된다면 좀 좋을 텐데─ 애석하게도 그게 힘들다.
‘진짜 출퇴근 형식으로 가야 하나?’
침대에 몸을 누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텔레포트로 제도와 아카데미를 출퇴근하기, 예전에 잠깐 생각했다가 보류한 안건이지만 슬슬 다시 검토할 때가 왔다. 곧 마르가 졸업하고 결혼하면 제도의 저택이 거점이 될 텐데, 부원들은 여전히 학생 신분이라 아카데미 감찰관 신분 또한 유지해야 한다.
골치 아픈 일이다. 제도 지박령이 되면 타국 왕족을 방치하는 꼴이고, 아카데미를 택하면 신혼인데 일터에서 지내는 꼴이다. 어느 쪽을 고르든 피를 토할 일이니 출퇴근이 답이다.
‘트릭시가 있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 옆에 대륙 제일의 마법사가 있다는 것. 텔레포트 출퇴근이 이론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대신 아내 차를 얻어타며 출퇴근하는 남편이 된 듯한 자괴감이 들겠다만,
‘자존심이 별거냐.’
다르게 말하면 그 자괴감만 감수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신혼 생활과 공무원 업무를 전부 챙길 수 있고, 제도와 아카데미가 일일생활권이 되면서 모든 연인들과 하루 안에 만날 수 있다. 지금처럼 연인들이 흩어진 현상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조만간 얘기 좀 꺼내봐야지.’
생각해 보면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한 연상 아내의 차를 얻어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짧지만 알찼던 주말이 끝난 후, 오랜만에 빌라르와 대면하게 되었다.
“이제 2학년 일정도 끝나가는군요. 올해는 작년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 같습니다.”
덤덤하게 입을 여는 빌라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많아서 시간이 금방 간 건지, 아니면 잠시 북방으로 떠나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2학년 일정은 빠르게 지나간 기분이다.
아니, 어쩌면 작년에 비해 부원들이 잠잠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부원들만 얌전하면 아카데미 생활도 무난한 편이지.
“빌라르 경과 만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는 건데… 이거 참, 내년에 헤어진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입니다.”
“다행입니다. 저만 아쉬운 게 아니었군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자 빌라르도 농담 섞인 답을 돌려줬다.
빌라르를 처음 봤을 때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을 반응. 2년의 세월은 무뚝뚝한 기사와도 친분을 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나 보다.
“아, 그러고 보니 작위를 계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늦은 인사지만 축하드립니다.”
“그래도 타국인 중에서는 빠르게 하신 편입니다.”
그 말에 빌라르도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야 내가 본 타국인이라고 해봤자 아카데미에 있는 사람들이 고작이니─
“허면 선물은 어떻습니까? 그건 제국인을 포함해도 빠른 편일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한 빌라르가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회중시계였다.
“…선물은 빌라르 경이 처음입니다.”
“영광입니다.”
의외인 상황이라 잠깐 당황하고 말았다. 확실히 축하 인사는 많이 받았지만 선물은 처음이다.
그야 작위와 영지라는 미친 재산을 계승받은 사람에게 무슨 선물을 주겠나. 정말 귀한 걸 주는 게 아닌 이상 안 주느니만 못하다. 줘봤자 기억에서 빠르게 잊혀질 테니.
그럼에도 빌라르는 굳이 선물을 꺼냈다. 그것도 회중시계라는 평범한 물건을.
‘뭐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빌라르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제법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빌라르는 이유 없는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다. 저 회중시계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
그리고 그런 눈빛을 읽었는지, 빌라르가 먼저 설명을 해줬다.
“사실 제가 준비한 선물은 아닙니다. 류티스 저하를 훌륭히 지도해주시는 감찰관님을 향한 국왕 전하의 성의입니다.”
그렇군, 빌라르가 아니라 아르메인 국왕의 선물이었군.
…
?
‘뭐?’
누구?
***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는 감찰관을 향해 회중시계를 건네줬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당황스럽고 황송할 정도다. 국왕 전하의 하사품을 내 품 속에 가지고 있었다니, 심장이 두근거려 손이 떨릴 지경이다.
허나 단순한 전달 역할인 나조차 이러한데 감찰관은 오죽하겠나. 아무리 타국의 왕이라도 왕은 왕. 감찰관도 심히 놀랄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줄 수 있어서 다행이군.’
복잡한 표정으로 회중시계를 받은 감찰관을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 회중시계를 가지고 다니기 시작한 건 올해 여름 방학이었다. 잠시 조국으로 돌아갔을 때, 국왕 전하의 명으로 관리하고 있던 물건이다. 언젠가 신호를 줄 터이니 그때 감찰관에게 전하라는 명이었다.
“…로벤스 왕가의 문장이군요.”
“예. 국왕 전하께서 은인을 향해 건네는 선물이니 왕가의 문장을 새겼습니다.”
막 회중시계의 뚜껑을 연 감찰관의 중얼거림에 자연스레 대답했다.
저 시계는 단순한 시계가 아니다. 왕실에 열렬한 충성을 바치거나 국가에 공을 세운 충신에게 주는 물건, 혹은왕실이 반드시 가까워져야 하는 인물에게 건네는 상징적 물건이다.
그리고 감찰관은 명백히 후자다. 국왕 전하께서 아르메인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우호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여기는 인물이다.
‘그럴만하지.’
감찰관은 현 시점에서 검사들의 정점에 위치한 인물이다. 게다가 제국의 북방 정벌에서 결정적인 활약을 했다.
그렇기에 국왕 전하께서는 우려하실 수밖에 없다. 혹 감찰관의 칼날이 언젠가 아르메인을 향하지는 않을까, 과거 아르메인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철혈공의 뒤를 잇는 건 아닐까.
그 결과 국왕 전하께서는 타국의 신하인 감찰관에게 우호의 손을 뻗으셨다.황제의 명을 받은 감찰관이 전쟁에 나서는 건 막을 수 없더라도, 감찰관이 먼저 개전을 요구하는 주전파가 되는 건 막기 위해.
“과분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직접 감사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게 한이군요.”
다행히 감찰관의 반응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거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