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27)
로판 속 공무원 427화(428/451)
빌라르가 돌아간 뒤, 멍하니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렸다.
휴대성을 고려한 듯 한 손에 들어오는 적당한 크기, 대륙 2위 국가의 주인이 선물한 만큼 화려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갖춘 외관. 아무래도 제법 신경을 써서 준비한 물건인지, 시계 자체로도 예술품 수준의 물건이었다.
물론 로벤스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순간부터 외관 따위는 아무래도 좋지만.
‘살다 보니 별걸 다 받네.’
고작 20대가 할 생각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제국의 귀족이 아르메인 국왕의 선물을 받을 일이 어디 있겠나.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아르메인에 방문한 고위 외교관 정도는 돼야 국왕 명의의 선물을 받을까 말까고, 그마저도 보통은 비단이나 보석 같은 것들이다. 왕실의 문장이 새겨진 물건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물건이 내 손에 들어왔다. 심지어 내가 아르메인까지 가서 받은 게 아닌, 앉은 자리에서 배달로 받았다.
‘국력 차이가 심해지긴 했어.’
계속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다 픽 웃음을 흘렸다. 제국 다음가는 국력의 국가, 기사들의 왕국, 제국의 제1 가상적국 등. 아르메인을 가리키는 수식어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그 화려한 수식어들이 뜻하는 건 간단하다.아르메인이 제국을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제국도 아르메인을 완전히 제압하려면 많은 피해를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 만큼 아르메인은 제국을 상대로 숙임과 당당함이 공존하는 외교를 보였는데, 갑자기 일개 귀족에게 왕가의 문장을 새긴 선물을 건넸다. 양국의 격차가 아득히 벌어진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인정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기는 하지.’
사실 놀랄 일은 아니다. 북방이 제국의 품에 안기며 북쪽 국경을 지키던 제국군 일부가 동쪽으로 이동했고, 북방의 유목민들은 제국의 기병으로 전직했다. 이러고도 뻣뻣하면 용기가 아니라 만용 아니겠나. 적어도 아르메인의 국왕은 용기와 만용을 구분할 줄 아는 군주다.
‘좋아.’
회중시계를 품에 넣고 통신구를 꺼냈다. 상대가 상하관계를 인정한다면 제국 입장에서도 기꺼운 일이다. 굳이 무력을 동원하여 서열을 정립할 필요가 없으니까.
“대제께서 보우하심에 북방이 평온하니, 동부에도 진정한 평화와 질서가 자리 잡기를 소망할 뿐이다.”
황제가 막 즉위했을 당시, 황제의 애착 장난감으로 전락하여 같이 다니다 그런 말을 들었었다. 제국의 국력을 갈아 넣으며 북방을 정벌했으니 제발 동부가 잠잠했으면 좋겠다는 한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한탄이었다. 북방 정벌이야 유목민들이 무국적자로 취급되어 날름 집어삼킬 수 있었다만, 동부 왕국들은 명확히 국적과 국경이 있다. 괜히 영토를 먹으면 수습하는데 한 세월이고, 영토를 뜯지 않고 물러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기어오른다.
그런 딜레마 속에서 황제는 전쟁 없는 서열 정리를 원했다. 아르메인 국왕이 전쟁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황제도 주화파 성향인 것이다.
– 아르메인 국왕이 선물을 보냈다?
“예, 폐하.”
그렇기에 황제는 내 보고에 미소를 지었다. 동부 왕국, 특히 제국의 제1 가상적국이 주제를 알고 고개를 숙였다? 막 즉위한 황제 입장에서는 위신과 실리를 동시에 챙길 수 있는 소식이다.
– 장관의 노고에 아르메인 국왕도 감동한 모양이군. 류티스 왕자가 장관을 좋게 얘기한 모양이야.
“소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지.
작게 웃음을 터뜨린 황제는 이윽고 표정을 가다듬더니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 조만간 아르메인으로 사절을 보내야겠어.
“실로 영민하신 판단입니다.”
그런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의례적인 답변을 했다.
허나 의례로만 가득한 대답은 아니었다. 황제의 말처럼 아르메인에게 사절을 보낼 필요성이 있기는 하다. 아르메인이 공식적인 사절을 보내 제국에 굴복한 것은 아니나, 현 황제의 최측근에게 접촉하여 굴복의 뜻을 보였다. 그러니 먼저 굴복한 아르메인의 체면 정도는 제국이 살려줄 수 있다.
예컨데, 제국과 아르메인의 평화는 아르메인이 먼저 굴복해서가 아니라─ 제국이 뻗은 손을 아르메인이 잡아 이루어졌다는 명분 정도.
‘그 정도는 배려해 줘야지.’
이렇게 상대 체면도 좀 살려줘야 상대도 망설임 없이 대가리를 박지 않겠나.
자기 힘만 믿고 깽판 치는 새끼는 결국 업보를 쌓아서 망하는 법이다. 역사 속의 아펠스와 현재의 레온이 그 증거다.
– 헌데 장관. 장관을 향한 아르메인 국왕의 관심이 지대한 것 같은데, 혹 아르메인으로─
“송구하오나 소신은 제국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 와중에 사절단 합류를 언급하는 황제에게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 망할 놈이 국내로도 모자라서 국외로 보내려고 해? 어림도 없지.
– 그런가? 아쉽군.
다행히 황제도 진지하게 권한 건 아니었는지 빠르게 포기하며 물러났다.
물론 무슨 생각으로 권한 건지는 안다. 내가 사절단 사이에 토템처럼 버티는 걸로도 아르메인에게 압박을 줄 수 있으니, 가서 자리만 지키라는 의미였겠지. 아르메인의 체면을 살려주는 건 살려주는 거고, 실리는 최대한 뽑아야 하니까.
하지만 싫다. 외교는 명백히 내 담당 업무가 아닐뿐더러, 난 내년 초에 결혼할 예비 신랑이다.
‘예비 신랑을 해외로 보내?’
그런 사악하고 파렴치한 상사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회중시계 사건 이후로는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제도에서는 외무성 장관을 사절단장으로 삼아 아르메인으로 갈 사절단을 구성 중이라는데,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니 넘어갔다.
지금 내가 걱정해야 할 것은 멀리 있는 제도의 일이 아닌 눈앞의 연애 문제니까.
“오라버니, 페넬리아 언니도 애칭으로 부르셨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동아리 시간, 루이제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실이다. 얼마 전부터 페넬리아도 피네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마르, 트릭시, 에리에 이어 네 번째 애칭이 탄생한 것이다.
‘…어쩌지.’
허나 이는 애칭 소유자의 숫자가 애칭 비소유자를 능가했다는 의미다. 비소유자가 서운해하고 불만을 표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줄이기 애매한데.’
곤란한 일이다. 마르게타는 마르, 베아트릭스는 트릭시, 에르제베트는 에리, 페넬리아는 피네. 딱 줄이기 적당한 이름이라 적당한 애칭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루이제랑 이리나는 어떻게 줄여야 하지? 솔직히 세 글자도 짧은 편 아닌가?
루이랑 이리? 뭔가 남자 이름에 짐승 이름 같다. 그럼 이제랑 리나? 그렇게 부르니 루랑 이가 성 같잖아.
“오라버니?”
“아, 그으… 맞아.”
처절할 정도로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루이제의 재촉에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루이제의 눈에 희미한 물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죄책감이 가슴을 쥐어뜯었다.
‘이번에도 에리겠지.’
죄책감은 어느새 원망으로 변했다. 분명 에리가 루이제랑 통신구로 대화를 하다가 애칭 얘기까지 꺼낸 게 분명하다. 이게 다 에리 때문─
‘아니야.’
황급히 생각을 끊었다. 추하게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말았다.
죄가 있다면 진작에 애칭을 만들지 못한 내 잘못이겠지. 에리는 죄가 없다.
“그, 미안. 세 글자는 어떻게 줄여야 할지 몰라서.”
잠시 침묵하다가 내가 생각해도 부끄러운 변명을 하고 말았다. 더욱 부끄러운 건 저 변명이 둘러대는 게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
“오빠.”
“응?”
그러자 입을 다물고 있던 이리나가 슬쩍 끼어들었다.
“가족들은 절 린이라고 부르니, 오빠도 린이라고 불러주세요.”
“…어, 그래…”
상상도 못 한 애칭 어필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심지어 루이제조차 이리나의 틈새 공략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급히 이리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모르시면 알려드리면 되잖아.”
그 시선에 이리나도 조금은 민망했는지 작은 목소리로 항변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묘하게 당당했다. 마치 자신의 행동에 한 점 후회가 없는 것처럼.
경이롭다. 기회가 되면 빠르게 어필하는 추진력. 저것이 상인의 덕목인가?
“그, 그럼 저도!”
아무튼 순식간에 유일한 애칭 비소유자로 전락해버린 루이제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입을 달싹였다.
“저도오오오…”
그러나 그저 달싹이기만 할 뿐, 루이제의 애칭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없구나.’
안타까운 광경이라 절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아무래도 세 번째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셨던 모양이다.그게 아니라면 사랑받고 자란 루이제에게 애칭 하나 없었을 리가.
“저기, 루이제?”
그렇게 침도 함부로 삼키지 못할 어색한 침묵 속에서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꼭 애칭이 있어야 사이가 좋은 건 아니잖아. 우리 부모님도 애칭은 없지만 사이는 좋으셔.”
세라였다.
이미 애칭이 있어서 입을 열면 기만이 되는 다른 연인들, 루이제에게 차였던 전적이 있어 애칭을 입에 담으면 질척이는 것 같은 부원들과 달리─ 유일하게 자유롭게 말할 권리가 있는 자가 입을 열었다.
감동했다. 그동안 에리히와의 관계 진전을 위해 세라를 도왔던 것이 은혜로 돌아왔다. 그게 아니라면 세라가 끼어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루이제만 애칭이 아닌 본명이니까, 오히려 루이제가 특별한 거 아닐까?”
허나 애석하게도 은혜와 언변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 위로를 해주는 건 고맙지만, 애칭이 없어서 슬픈 아이에게 ‘애칭이 없으니 특별한 거야!’ 라는 말은 좀 그렇지 않니?
‘어쩔 수 없나.’
더욱 시무룩해진 루이제, 어쩔 줄 몰라하는 세라를 보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세라는 평생을 저택에서 지내다가 올해 처음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기에, 언변이 다소 부족한 건 필연적인 문제다. 그냥 나를 돕기 위해 나섰다는 걸로도 충분히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생기를 잃은 핑크 카피바라의 모습에 즉석 애칭 공모전이 열리고 말았다.
그리고 열렬한 토론 끝에 ‘루’ 라는 애칭이 탄생하게 되었다. 다행히 다른 사람의 머리가 아닌 내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실로 다행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