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29)
로판 속 공무원 429화(430/451)
누군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애정이 가득 담긴, 동시에 배려도 듬뿍 담았는지 조심스러운 손길 덕분에 슬며시 눈이 떠졌다.
“칼, 깼나요?”
그러자 빙그레 미소를 짓는 마르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아름다운 광경에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좋은 광경이기는 한데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분명 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새 누워서 마르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바라보자 마르는 쿡쿡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칼이 자고 있길래 잠깐 눕혔어요. 앉아서 자는 것보다는 누워서 자는 게 좋잖아요.”
‘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바깥은 추운 겨울 날씨지만 아카데미 내부는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고귀한 신분이나 뛰어난 능력을 지닌 학생들이 학구열을 불태우는 곳인데, 난방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심지어 이곳은 학생회장실이자 공작의 막내딸이 지내는 곳이다.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완벽한 온도 덕분에 깜빡 존 모양이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뒤늦게 온몸의 감각이 활성화되었다.
‘부드럽다.’
마르의 허벅지를 베고 있는 뒤통수를 타고 극상의 행복이 느껴졌다. 나는 이 세상 그 어떠한 베개보다도 완벽한 베개를 베고 있었구나. 매번 신세를 지고 있는 베개지만 매번 새롭다.
그렇기에 여전히 내 머리를 쓰다듬는 마르를 보다 무심코 몸을 180도 돌려버렸다.
“카, 칼!?”
당황하는 마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굳건한 자세로 버텼다.고작 뒤통수에게 양보하기에는 너무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니까.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그러자 어쩔 줄 몰라하던 마르도 결국 포기한 듯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물론 몸을 일으키고 나서 조금 혼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다. 대가 없는 행복은 없는 법 아니겠나.
그렇게 믿는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는 웃는 얼굴로 차를 우려줬다. 막 일어났으니 따뜻한 거라도 마셔야 한다면서.
너무도 따뜻한 배려라 눈물이 나올 것 같다. 180도 회전 사태를 후회하지는 않지만 이런 상냥한 연인을 잠시나마 부끄럽게 했다는 것에 반성을─
‘평소에도 부끄러워했지 참.’
생각해 보니 조금 강한 스킨십을 하면 마르는 행복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보였다. 마르를 부끄러움에서 해방시키려면 스킨십 자체를 끊어야 한다는 말.
마르에게 있어서는 그게 더 가혹한 일이겠지. 앞으로도 열심히 부끄럽게 하자.
“아 참, 칼.”
“응?”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마르가 입을 열어 흠칫하고 말았다. 혹시 내 생각을 읽은 건가, 싶어서.
“곧 간부들이 올 시간이에요. 급하게 올 건 없으니 느긋하게 점심은 먹고 모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나 다행히도 관심법이 아닌 평범한 정보 전달이었다.
“그래? 그럼 슬슬 준비해야겠네.”
기이한 안도감을 뒤로하며 품 속에서 명함을 꺼냈다.
마르가 말하는 간부들은 학생회 간부들. 즉, 내 추천장을 받아 공무원의 길을 걷게 될 파릇파릇한 새싹들을 볼 시간이라는 거다. 작년에도 간부들이 내 추천장을 받고 취업했으니 얘네는 2기생이라고 보면 되겠지.
‘올해는 다섯 명이군.’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올해 학생회 간부는 작년보다 한 명 줄었다는 것이다.
본래 학생회 간부는 학생회장, 부회장, 총무, 회계, 서기, 선도부장, 홍보부장까지 해서 총 일곱 명. 이중 부회장은 2학년이 맡으니 넘어가더라도 여섯이 남는데, 올해 회장은 마르다. 마르가 공무원이 될 필요는 없으니 내 추천장이 필요한 간부는 다섯이 남는 셈.
황실과 제국을 위해, 내 평온한 미래를 위해 헌신할 새싹이 줄어든 건 아쉬운 일이나, 그래도 괜찮다. 아예 없는 것보다는 무려 다섯이라도 있는 게 어디냐.
‘음.’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명함에 서명을 하는 사이,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꼭 행정부로 보내야 하나?’
내가 발굴한 귀한 원석들을 굳이 행정부에 넣을 필요가 있나?
물론 감찰성에 유입되는 인원이 늘어날수록 내가 편한 건 맞는데, 상황의 마지막 황명이나 다름없는 감찰성은 여러 부서가 통폐합되고 황제가 특별히 신경 써서 인력과 예산을 투입할 부서다. 여기서 내가 더 힘을 쓸 필요는 없다.
가만히 둬도 황제의 지원을 받을 부서보다, 내가 개인적으로 꾸려야 하는 곳으로 인재를 투입하는 게 맞지 않나?
‘100명 모아봤자 퇴직도 안 시켜줄 텐데.’
황제가 아직 황태자였던 시절, 인재 100명을 모아오면 내 퇴직을 고려해 주겠다는 도발 아닌 도발을 한 적이 있다.
누가 들어도 놀리는 말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그 놀림에 희망을 걸 정도로 퇴직이 간절했다. 정말 100명을 모아서 황태자가 퇴직을 윤허하면 좋은 거고, 아니어도 열정 넘치는 신입 100명이 생기는 거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퇴직은 얼어 죽을.’
이제는 그 간절함마저 죽어버렸다. 황태녀의 대부이자 감찰성의 초대 장관, 북방 파벌의 파벌장이자 드래곤 로드를 대면한 심복.
100명은커녕 100개 군단을 들고 와도 눈앞에서 사직서가 찢길 것이다. 확신할 수 있다.
…
잠시 고민하다가 품 속에서 다른 명함도 꺼냈다.
그래도 공무원을 꿈꾸던 애들의 미래를 내가 강압적으로 바꿀 수는 없으니 선택지 중 하나로 줘야겠지.
***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며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아직도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긴장감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더 시간을 끌 수는 없다.
이 문 너머에 감찰부장님─ 아니, 감찰성 장관님이 기다리고 계시니까. 나와 올리비아가 굶지 않고 다닐 수 있는 배려를 해주시고, 이제는 인생이 바뀔 은혜를 내려주실 분이 계시니까.
그렇기에 마지막 심호흡과 함께 회장실 문을 두드렸다.
“마르게타, 나야. 다른 간부들도 같이 왔어.”
안에 장관님이 계신 건 알지만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장관님의 호출이 아닌 학생회장의 호출을 받고 모인 거니까.
“들어와라.”
허나 돌아오는 대답은 장관님의 목소리였고, 그 목소리에 뒤에 있던 다른 간부들마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다. 장관님은 냉정하거나 잔인하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의 경험상 상냥한 쪽에 가까운 분인데, 장관님의 직함 때문인지 말 한마디 한마디에 위압되고 있다.
‘작년이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나도 모르게 장관님을 처음 뵈었던 작년을 떠올렸다. 그때도 감찰부장이셨기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분이었지만, 불과 1년 사이에 부장이라는 직책은 장관이 되고, 작위도 여러 개나 가지고 계시는 분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차기 황제가 될 황태녀 전하의 대부까지.
갑자기 작년 선배들이 부러워졌다. 그분들은 이렇게 어마어마한 진화를 하신 장관님이 아닌 부장 시절의 장관님을 봤을 거잖아.
아니, 작년까지 갈 것도 없이 1학기 때의 장관님도 괜찮았다.
“드, 들어가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겨우 억누르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총무가 아니라 회계로 갈걸.’
그리고 억누르기 무섭게 다른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회장과 부회장을 제외하면 간부 중 선두라고 할 수 있는 총무,오늘만큼 그 직책이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내가 다른 간부였다면 대표가 아닌 일행 중 하나로서 회장실에 들어갔을 테니.
자리에 앉자 무려 공녀님이 직접 차를 건네주었다.아카데미 안에서야 동급생이니 마르게타라고 부르는 거지, 졸업만 하면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가 황송할 대접을 해주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심장 마비로 죽을 것 같은 심정인데, 이어지는 장관님의 말은 여러 의미로 심장을 공격했다.
“너희를 가까이서 지켜본 만큼, 너희의 능력은 잘 알고 있다. 오직 한 가지 미래만 열어두기에는 아까운 수준이라는 것도.”
그 말과 함께 장관님은 장관님의 서명이 적힌 명함을 간부들에게 건네주셨다.
무려 두 장이나.
“하나는 감찰성 장관 내정자로서 쓴 추천장이다. 그걸 들고 행정부나 다른 기관에 방문하면 적당한 자리를 주겠지. 나로서는 감찰성에 와주는 것이 좋지만, 그건 너희의 자유니 원하는 곳으로 가라.”
그건 잘 알고 있다. 작년, 감찰부장 시절의 장관님에게서 이 명함을 받은 선배들은 광란의 춤을 추며 학생회실을 무도회장으로 만들었었다. 당시 후배였던 우리에게 추천장을 과시하기까지 하면서.
딱히 볼 생각은 아니었지만 너무 긴 무도회였기에 저절로 보고 말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대영주로서 쓴 추천장─ 이라기보다는 권유서라고 보는 게 낫겠군.”
권유서라는 말에 슬쩍 명함을 내려다봤다. 감찰성 장관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이 아닌, 타일글레헨 백작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이라고 적혀있는 명함을.
“나는 행정부의 관료임과 동시에 대영주다. 관료로서 황실과 제국을 위해 헌신할 의무가 있으나, 대영주로서 폐하의 신민들을 보살필 의무 또한 존재한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간부들은 양손에 쥔 명함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다들 눈치와 머리가 좋은 편이니 장관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아챈 모양이다.
물론 나도 그렇다. 저 말을 듣고도 장관님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타일글레헨 백작령은 300년 크라시우스의 역사가 쌓이며 부족할 것이 없다만, 위리디아는 막 직할령에서 백작령으로 변한 상태라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럼에도 장관님은 친히 설명해주셨다.
우리가 대영주로서의 장관님을 따르기로 한다면 수도권인 타일글레헨 백작령이 아닌 북쪽의 위리디아로 향할 것이라고.
번화한 수도권인 아닌 다소 황량한 변방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부족한 것이 많고 막 태동한 영지이기에─ 기회가 널린 황금의 땅이라고.
‘위리디아.’
무심코 침을 삼키고 말았다. 위리디아에 대한 소문은 나 같은 평민들은 물론 귀족 학생들에게도 널리 퍼졌다.
정확히는 위리디아 백작령의 집사장인 키셀레 자작에 대한 소문이.
‘기회의 땅.’
비록 성을 가지고 있지만 귀족이라고 하기에는 미묘한 입지였던 수석 지방관을 하루아침에 자작으로 임명한 곳. 아직 무수히 많은 직책과 작위가 공석으로 있는 곳.
‘나, 나도…’
다시 손이 떨렸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떨림이었다.
욕심이 생겼다. 감히 노릴 수 없는 것이라면 꿈에서도 그리지 못했겠지만, 이건 노릴 수 있다. 장관님이 나 같은 존재에게도 희망을 보여주셨다.
만약, 만약 나도 장관님의 눈에 들어오면, 장관님이 보시기에 흡족하면…
나도, 내 동생들도…
‘귀족으로 살 수 있는 거야…?’
배부르고 따뜻하게 살 수 있는 거야?
***
다섯 중 셋이 감찰성 대신 위리디아를 택했다.
심지어 간부들 중 선도부장은 행정 공무원보다 군부에 적합한 인재라는 걸 생각하면 사실상 한 명만 행정부를 택한 것이다. 그 유일한 친구마저 가문이 제도 인근에 기반을 잡은 가문이라 제도 생활을 원한 것이고.
만족스럽다. 명백히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하는 인원을 제외하면 전부 위리디아에 온 것이다.
‘숨 좀 돌리겠네.’
연신 허리를 숙이며, 심한 경우에는 감사의 눈물까지 흘린 간부들을 돌려보낸 뒤 한숨을 내쉬었다.
집사장이라는 특급 인재를 확보하기는 했으나 아직 위리디아는 인력난에 비명을 지르는 곳이다. 그런 상황에서 소규모라지만 행정 업무 경험이 있는 젊은 인재가 셋이나 투입된다? 집사장의 수명에 조금은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을 터다.
“축하해요, 칼. 영지가 더 발전하겠어요.”
마르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축하를 건넸다.
“내 자식이 이어받을 영지니 당연히 발전해야지.”
그런 마르를 향해 픽 웃으며 답하자 마르도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미래의 내 아들, 혹은 딸아. 보고 있니? 이 아비가 널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단다.
그러니 너는 제발 평온한 백수가 되렴.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