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30)
로판 속 공무원 430화(431/451)
마침내 올해 아카데미 일정이 전부 끝났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카데미에서 구른 학생들은 후배들의 박수 속에서 졸업장을 받았고, 제법 친해진 후배가 있는 졸업생은 사교계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카데미라는 정해진 길을 벗어나 여러 갈래의 미래로 나아갈 졸업생들을 축하하고 격려하듯,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 정도의 눈이, 적당히 발자국을 남길 정도의 눈이.
“앞으로는 방학도 없으니 푹 쉬다 오도록. 어쩌면 지금이 인생의 마지막 휴식일 수도 있어.”
나 또한 눈에 찍힌 발자국처럼 내 흔적이 짙게 남은 졸업생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발자국이 찍힌 눈밭은 영원히 되돌릴 수 없듯이, 내가 채간 졸업생들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소중한 인력이다.
그러니 이런 인사와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다. 앞으로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할 아이들에게 그 정도도 못 해주겠나.
“예!”
“명심하겠습니다!”
정작 얘네는 의례적 인사라고 여기는 것 같지만.
안타까운 일이다. 수시로 대학에 합격한 고3이 몸과 혼을 불살라 노는 것처럼, 이 아이들에게도 이 시간이 인생의 마지막 낙이다.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고, 휴가도 가뭄에 콩 나듯 즐길 수 있을 테니.
‘어쩔 수 없지.’
착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연신 허리를 숙이는 예비 공무원들의 어깨를 토닥였다.
나는 충분히 경고 겸 조언을 해줬다. 그걸 제대로 수용하느냐 마느냐는 듣는 사람에게 달린 것이니 나는 할 만큼 했다. 인생의 마지막 낙을 즐기지 못하고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다면 그건 본인들 팔자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칼!”
그러던 중 다른 졸업생, 후배들과 인사를 마친 마르가 멀리서부터 다가왔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달려오지는 않았다만, 오른손을 격렬하게 흔드는 걸 보면 이미 품위와는 거리가 멀어진 것 같다.
물론 품위와 거리가 먼 모습도 예쁘니까 괜찮다. 내가 품위 때문에 마르랑 연인이 된 것도 아니고.
“장관님의 은혜에 반드시 보답할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기대하겠다.”
마르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아멜리아가 슬쩍 물러날 기색을 보이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놓아주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물러나는 예비 공무원들.
‘빠르네.’
그 뒷모습에서 혹여나 마르와 마주칠까 두려워하는 것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너무 과도한 반응이다. 마르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성격도 아니니, 3년 동안 알고 지낸 지인이자 내 밑에서 일하는 애들을 기꺼워할 가능성이 높다. 만난다면 반갑게 인사를 건네줄 정도는 된다는 말.
하지만 이건 상사의 입장이고, 까마득한 말단의 입장은 또 다를 수도 있다.
‘알아서 조심하는 건가?’
하긴. 나도 옛날에는 황태자비를 만나기 조금 꺼려 했잖아. 까마득한 상사의 부인 앞에서 실수할 바에는 처음부터 만나지 않는 게 최선이기는 하지.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는 법이니까.
“미안해요, 너무 늦었죠?”
“아니. 전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마르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그리고 늦었어도 상관없어. 이제 평생 같이 지낼 거잖아.”
그 말에 마르의 귀가 빨갛게 변했다. 추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한 말이 부끄러워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후자가 아닐까 싶다.
‘평생이라.’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마르가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났으니 결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래, 이제 나와 같은 성을 쓰는 연인이 생기는 거다. 마르는 마르게타 바렌티가 아닌 마르게타 크라시우스가 되는 거다.
“내년 이맘때에는 자식이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빨갛게 변한 마르의 귀를 양손으로 덮어주자 이번에는 얼굴이 붉어졌다.
재미있는 반응이다. 결혼을 하면 당연히 자식을 낳게 될 터인데, 자식이라는 말에 부끄러워하는 마르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평소에는 당당한 주제에 왜 이럴 때는 수줍은 모습을 보이는지 모르겠어.
“카, 칼은 아들이랑 딸 중에 누가 더 좋나요?”
심지어 수줍어하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이어서 더더욱 귀엽다.
“나랑 마르를 닮은 아이면 어느 쪽이라도 좋아.”
이건 진심이다. 내 피가 섞인 가족이 세상에 태어나는데 그깟 성별이 대수일까. 그나마 바라는 것이 있다면 건강하게 태어나는 것 정도?
그런 마음을 담아 마르의 이마에 입을 맞추자 마르는 여전히 붉은 얼굴로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차갑네.’
그건 그렇고 슬슬 실내로 들어가야겠다. 아무래도 눈 속에서 뽈뽈 돌아다녀서 그런지, 마르의 몸이 차가워지기 시작했으니까.
나야 알몸으로 눈밭에 굴러도 멀쩡하겠지만, 마르는 감기에 걸릴 수도 있잖아.
‘아픈 마르.’
아주 잠깐이었지만 미간이 찌푸려졌다.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리는 흉악한 미래다.
한적해진 강당에 들어가자마자 부원들이 보였다.
“오라버니! 마르게타 언니!”
리제가 양손을 파닥이며 존재감을 뽐낸 덕분에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걸 보지 못하면 시력에 문제가 있는 거지.
“우리가 제일 늦은 건가?”
“저희는 2학년이라 인사할 사람도 적잖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머쓱한 심정에 입을 열자 린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우리 중에서 졸업생은 마르가 유일하다. 친분을 쌓은 졸업생만 적당히 배웅하면 되는 재학생과 달리, 마르는 동기들이나 교직원들과도 인사를 나눠야 했으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졸업 축하드립니다. 마르게타 공녀.”
“감사합니다, 황제 전하.”
그리고 린의 뒤를 이은 아인테르의 말에 마르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지금까지는 아카데미 선후배로서 다소 느슨한 위계질서를 보였으나, 마르가 아카데미를 벗어남으로써 둘의 관계는 선후배가 아닌 황제의 동생과 공작의 딸이라는 명백한 수직 관계가 되었다.
“조만간 타일글레헨 백작 부인이 될 테지만, 그건 그때 가서 축하드리겠습니다.”
“예, 전하.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물론 명백할 뿐, 깐깐한 수준의 수직 관계는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2년 동안 쌓은 정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마르와 아인테르를 보니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당연히 질투 같은 건 아니고, 신기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작년에는 상상도 못 했을 일인데’
동복 형이 황위 계승 경쟁에서 탈락하며 본인의 목숨도 위기에 처했던 가련한 황자.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언제 숙청의 칼날이 날아올지 몰라 숨을 죽이고 살던 초라한 황자.
그랬던 아인테르가 황제의 최측근, 타국의 주요 인사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공작가의 일원과 대화를 하고 있다. 이 정도로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겠지.
그렇기에 신기한 일이다. 내가 처음 아카데미에 왔을 때는 유사시 아인테르를 처리하라는 명까지 받았었는데, 2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자 명실상부한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
“짐이 왜 아인테르를 받아들였는지 아나? 감정에 휘둘렸기 때문일세.”
문득 황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했던 황제는 자신의 선택이 너무 감정적이라며 한탄했지만, 그 감정 덕분에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 터.
‘…나쁘지 않네.’
사실 지도자로서 감정을 좇는 건 지양해야 할 일이 맞다.그러나 그 감정의 결과가 무해한 혈육을 살리는 길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아인테르 형제님과 달리 저는 지금이 아니면 축하 인사를 할 기회가 없겠군요. 공녀님의 앞날에 에넨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이후 타니안을 시작으로 다른 부원들도 하나둘 입을 열었다. 특히 앞으로 마르를 볼 기회가 없는 류티스나 라테르, 타니안이 특히 말이 길었다.
타니안의 말처럼 같은 제국인인 아인테르와 달리, 타국인인 저것들은 졸업한 마르와 만날 일이 없다. 앞으로 마르가 아카데미에 올 일도, 그 반대도 성립되지 않을 테니 당연한 일.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아쉽군요. 청첩장을 보내준다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겠습니다.”
“하객들이 놀랄 테니 그건 곤란하다. 마음만 받도록 하지.”
웃음 섞인 류티스의 말에 본능적으로 거절하고 말았다.다른 사람이 한 말이면 농담이겠거니 넘어갔을 텐데, 저 새끼라면 정말 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젓는 류티스를 보고 확신했다. 저 새끼는 청첩장을 보냈으면 진짜 왔다.
“대신 선물 정도는 보내겠습니다. 물건 정도야 쉽게 보낼 수 있으니, 지인의 정이라 생각하고 받아주십시오.”
“그래, 고맙다.”
그런 류티스를 한심하다는 듯 보던 라테르의 말에 겨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왕족의 선물도 부담스러운 건 마찬가지이나, 청첩장 운운한 발언 다음에 선물 얘기를 들으니 선녀처럼 느껴졌다.
“아, 그럼 저도 보내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자연스레 숟가락을 얹는 류티스의 말에 합리적 의심이 생겼다.
저거 혹시 일부러 저러는 건가? 결혼식 참석 발언으로 충격을 준 다음에, 선물이라는 진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분명 과대망상이지만 류티스라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어긋난 믿음이 생겼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부원들이 귀국하기 시작했다.
‘이제 내년이면 끝.’
부원들을 배웅하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지옥이라고 생각했던 3년 중 어느덧 2년이나 지났다. 이제 1년만 버티면 부원들도 졸업, 나도 아카데미에서 해방이다.
’79년도는 어떠려나.’
77년도 부원들과 달리 78년도 부원들은 나름 잠잠하고 무난했다. 올해의 부원들은 작년의 부원들보다 약해진 것이다.
그러니 내년의 부원들도 나를 기쁘게 해줄 것이라 믿는다.부디 올해보다 약해져서 돌아오렴.
그게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강해지지만 말기를.
‘마지막은 좋게 끝내자.’
과정이 개 같아도 결과가 좋으면 추억 보정이 가능하잖아. 만약 과정도 결과도 끔찍하면 난 너희를 미워하게 될 것 같아.
우리 꼭 웃는 얼굴로 헤어지자.
“이제 우리도 가자꾸나.”
“아, 응.”
79년도에 광명이 비치기를 기도하려는 찰나, 트릭시의 부름에 몸을 돌렸다.
일단 영지부터 들렀다가 제도로 가자. 에리히랑 세라는 영지에 떨궈줘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