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31)
로판 속 공무원 431화(432/451)
영지에 도착하자 언제나 그렇듯 어머니와 가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문의 후계자였던 시절에도 정문까지 나와 반겨줬는데, 이제 나는 후계자가 아닌 제국백이자 대영주. 가신들 입장에서는 과로로 죽기 직전이어도 마중을 나와야 하는 상황이기는 하다.
물론 영지를 위해 갈려가는 가신들이 업무 중에도 나와 있는 걸 보면 미안할 따름이나, 마중을 나올 필요가 없다고 하면 오히려 기겁을 할 확률이 높다. 저 신참 백작이 벌써부터 충성심 테스트를 하나─ 하고.
그러니 어쩌겠나. 그냥 빨리 인사를 나누고 성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그래. 어서 오렴.”
어머니에게 다가가 가볍게 포옹을 하자 어머니도 마주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에리히도 왔구나.”
“아, 예.”
그러고는 내 뒤에 있던 에리히도 조심스레 끌어안으셨다.
다소 뻣뻣한 움직임이었지만 저 포옹이 어머니에게는 큰 용기를 낸 행동이겠지. 에리히도 그걸 알고 있기에 별 저항 없이 순순히 포옹을 받아들였다.
훈훈한 모습이다. 황제가 아인테르를 황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우리 가족도 조금씩 마음을 열고 서로를 인정하고 있다. 이제 에리히와 아버지가 친해지기만 하면 완벽하다.
“미안하구나. 기껏 집에 왔는데 나밖에 없어서.”
정작 친해져야 할 아버지가 부재 중이라는 게 문제지만.
“업무 때문에 바쁘다고 하더구나. 그래도 저녁까지는 돌아온다고 하니 걱정하지 마렴.”
“괜찮습니다. 의원이 바쁜 건 당연한 일이죠.”
그 말에 막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난 에리히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1년만 지나면 바쁜 의원이 자기가 될 테니까.
허나 과한 걱정이다. 의원이 바쁜 건 맞지만, 에리히가 생각하는 수준의 심연은 아니다.
– 아무래도 늦을 것 같구나. 의장이 아주 난리를 쳐서 조금은 상대해 줘야 할 것 같아.
며칠 전, 미리 아버지 입으로 직접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아버지는 업무 때문에 자리를 비우신 게 아니다. 그저 저번처럼 낚시를 위해 먼 길을 떠나신 거다.
어떻게 보면 가족보다 낚시를 우선시하는 미친 가장처럼 보이지만, 딱히 우려가 되지는 않았다.
– 자기는 아직 백작인데 왜 너희만 작위를 물려줬냐고 발광하는 게 꼴불견도 그런 꼴불견이 없었지. 정작 본인도 의장 임기만 마치면 물러나는 주제에.
끌려가는 아버지도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셨었으니까. 가기 싫었는데 오랜 친구가 땡깡을 부려 억지로 간다는 기색이 역력했었다.
“그래도 의장께서 아버지를 절친한 친우로 여기시기에─”
– 난 그런 친구 둔 적 없다.
그 와중에 단호한 아버지의 대답에 황급히 입술을 깨물기도 했었다. 평소 진지한 사람이 예능감을 담아 대답하니까 절로 웃음이 나오더라.
다행히 필사적으로 참은 덕에 웃음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진지한 상황에 아들이라는 놈이 웃으면 끔찍한 불효지.
‘이번에는 들키지 말아야 할 텐데.’
속으로 아버지의 무운을 빌며 연인들에게 다가가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쫓아내는 일이 없기를.
그런데 신기하기는 하다. 이미 아버지는 어머니를 속인 전적이 여러 번 있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들켜서 어머니에게 혼나기까지 했었고.
헌데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믿고 업무 중이라고 하셨다. 예의상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듯한 표정이었다.
‘부부의 신뢰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경이로운 감정마저 들었다. 20년 넘게 부부로 살아왔기에 결과가 어떻게 되든, 당장은 상대를 믿고 옹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신뢰보다는 언제든 아버지를 털어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 같기도 하지만.
“드디어 졸업이구나. 이제야 같은 가문이 될 수 있겠어.”
“저도 어머니랑 같은 성을 쓸 수 있어서 기뻐요.”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어머니와 마르를 보자마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만약 마르가 어머니의 가르침을 듬뿍 받은 안주인이 된다면─ 나도 거짓말을 하기 무섭게 들키고 쫓겨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건가?
‘끔찍하네.’
이윽고 본능적으로 위리디아를 떠올리고 말았다. 내가 마르에게 쫓겨난다면 가장 먼저 대피소로 삼을 수 있는 변방 영지.
물론 아버지가 유사시에 사용하라고 애용하는 호수를 알려주기도 하셨지만, 솔직히 낚시 경험이 없는 입장이라 썩 땡기지는 않는다.
‘상황 폐하의 은혜…’
그렇기에 지금쯤 계공 각하에게 모이를 주고 계실 상황을 떠올렸다. 그분이 나에게 위리디아를 하사하지 않으셨다면 대피소라고는 호수가 다였겠지.
실로 크나큰 은혜다. 오늘부터 하루 세 번 황궁 쪽으로 절하자.
저녁 무렵에 돌아온 아버지는 이번에도 어머니에게 들키고 말았다.
저번과 달리 신발을 깔끔히 정리하여 완전 범죄가 될 수 있었으나, 손가락에 남은 낚싯줄 자국 때문에 발각되셨다.
매번 흔적을 남기고 다니는 아버지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미세한 흔적도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어머니가 대단한 건지 모르겠다.
“혹시 오라버니도 낚시 좋아하나요?”
그렇게 시부모님이 싸우는─ 아니, 일방적으로 구박받는 모습을 보게 된 리제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그 물음에 당당히 대답했다. 거짓말이 아니기에 떳떳한 대답이었다.
그야 빙의 전에는 낚시 같은 비싼 취미에 맛을 들일 기회도 없었고, 빙의 후에는 관심도 없었으니까.
“만약 낚시를 하고 싶으면 저희 영지로 와주세요. 장어가 잘 잡히거든요.”
“…응.”
그 말에 반 박자 늦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놀랐다. 이 타이밍에는 당연히 ‘오라버니는 낚시 같은 거 하지 말아 주세요.’ 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
황궁으로 복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 폐하의 호출이 떨어졌다.
순간 책 잡힐 일을 했었나 고민했지만 금방 진정할 수 있었다. 더 이상 황제 폐하께서 내 목을 노리실 일은 없다. 내가 반역을 꿈꾸는 게 아닌 이상, 폐하께서 나를 쳐내실 일은 없다.
그리고 내가 미치지 않는 이상 감히 반역을 꿈 꿀 생각은 없으니 내 앞날은 평온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너도 작위를 받아야겠지.”
폐하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그렇게 생각했었다.
“작위, 말씀이십니까?”
일단 당혹감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친히 작위를 언급하시는데 침묵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그래. 너도 이제 황제의 동생 아니더냐. 심지어 훗날 황제의 숙부가 될 터인데, 아무런 작위도 없다면 귀족들이 업신 여길 것이다.”
그 정도는 익숙하다는 말이 떠올랐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폐하께서 나에게 우호적으로 접근하시는데, 과거의 분쟁을 꺼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동시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에리히가 남작이 된 것을 놀린 게 얼마 전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작위를 받는다? 놀린 것보다 몇 배나 되는 놀림과 의무가 따라올 것이 자명하다. 황실의 일원이자 황제의 동생이기도 한 작위 귀족이 평온한 삶을 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안락하고 조용한 삶을 원한다면 작위는 피하는 게 옳다. 허나 황실의 일원으로서 이 제안의 탈을 쓴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괜히 의심만 산다.’
황제의 자식들은 황태자나 황태녀를 제외하면 어떠한 작위도 받지 않는다. 비극적인 일이 터져 다른 자식이 황위 계승자가 될 수도 있기에, 그전까지는 무작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작위가 없는 황족은 황위와 가까운 황족이라는 의미. 이제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 상황에서 그 동생이 작위를 거부하면, 아직 황위에 미련이 있다는 뜻이 된다.
그건 안 된다. 이제야 목숨이 위태로운 삶에서 벗어났는데 다시 지옥으로 걸어갈 생각은 없다.
“폐하의 은혜에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영원히 은혜를 잊지 않고 황실과 제국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빠르게 계산을 끝내고 허리를 숙였다. 어차피 받아야 하는 작위라면 순순히 받는 것이 좋다.
“…그래. 기대하겠다.”
잠깐의 침묵 끝에 폐하께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하셨다.
이상하다. 어째서인지 그 짧은 대답 속에 여러 감정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작위는 관례대로 단승 후작위를 내릴 것이다. 신년하례식 때 정식으로 수여할 것이니 알아두거라.”
“예, 폐하.”
허나 금방 이전의 목소리로 돌아오셨다. 마치 내가 느낀 것이 착각이라는 것처럼.
“또한─”
이윽고 무언가 덧붙이려는 듯 말을 이어가던 폐하께서 도로 입을 다무셨다.
“아니, 이건 다음에 말하마.”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움찔하고 말았다. 내 처우와 연관된 말임이 분명한데, 그걸 나중으로 미룬다고 하니 기묘한 불안과 걱정이 치솟았다.
당연히 티를 내지는 않았다. 폐하께서 다음에 말하겠다면 그만한 사유가 있을 테니.
***
아인테르를 돌려보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아인테르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다.
물론 아인테르를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 건 아니다. 그에 대한 고민은 감찰성 장관 덕분에 끝낸 지 오래다.그저 아인테르에게 어느 정도의 작위를 줘야 할지, 어느 정도의 권력을 줘야 할지 고민될 뿐이다.
‘관례대로 하는 게 무난하기는 한데.’
턱을 매만지며 고민을 이어갔다. 일단 황제의 남매에게는 단승 후작위를 주는 것이 관례다. 계승이 아닌 단승이기에 오직 당사자만이 작위 귀족으로 인정받는다.
그래, 오직 당사자에게만 허락되는 영광이다. 황제가 그 후작을 특히 총애하여 따로 계승 백작위를 내리지 않는 이상, 황족이었던 후작은 다른 귀족가와 혼인하여 자식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편이다. 상황께서도 그런 후작을 조상으로 두셨지.
그렇기에 지금까지 고민하였다. 아인테르에게 계승 백작위도 주어야 할까. 아니면,
‘다른 후작가와 혼인을 시킬까.’
사실 전례도 드문 계승 백작위를 하사하는 것보다 그게 무난하기는 하다. 그 후작가 입장에서도 황실의 피가 섞이는 것이니 아인테르를 홀대하지는 않을 거 아닌가. 아마 딸에게 부속 작위 정도는 주겠지.
그러면 아인테르는 자식에게 작위를 물려줄 수 있다. 고위 귀족은 운이 좋아야 가능하겠다만 작위가 있다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바란디가도 괜찮은 것 같은데.’
그러다 문득 바란디가 후작이 떠올랐다.
황실의 피가 섞이는 걸 기꺼워하고, 아인테르와 결혼할 딸에게 괜찮은 작위를 줄 귀족? 이거 딱 바란디가 후작이다. 마침 바란디가 후작에게는 자식이 딸밖에 없기도 하고.
…
“바란디가라.”
머리에서 맴돌던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북방의 구심점이자 막 귀족이 되어 권위가 필요한 신진 귀족.
게다가 감찰성 장관의 파벌원이기에 사고를 칠 가능성도 지극히 낮은 귀족.
‘괜찮군.’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