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32)
로판 속 공무원 432화(433/451)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제도에 있는 저택으로 이동했다. 마음 같아서는 신년하례식 전까지 영지에서 버티고 싶었으나, 아카데미도 방학에 돌입한 상황이라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괜히 집에서 놀고 있으면 황제가 잡아갈 게 뻔하다. 자기는 일하고 있는데 부하라는 놈이 불법으로 놀고 있다? 솔직히 나였어도 납치한 다음에 온갖 업무를 얹어줬을 거다. 괘씸죄는 못 참지.
물론 부모님은 하루 만에 떠나는 걸 아쉬워하셨지만, 신년하례식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으니 순순히 보내주셨다. 만약 며칠만 더 자고 가라고 권하셨다면 마음이 흔들렸을 테니 다행인 일이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그리고 주인을 반기기 위하여 정문까지 나온 집사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용인들까지 끌고 나올 필요는 없다고 했는데, 부탁한 대로 집사만 나와줬다.
“오랜만이야, 집사. 잘 지냈지?”
“주인님의 위엄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덕에, 덩달아 저도 즐겁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농담 섞인 아부에 픽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섬기는 주인의 위세가 높아지면 그 아래 사용인들도 어깨를 으쓱일 수 있다. 오죽하면 어지간한 평민보다 귀족이 기르는 개가 더 대접받는다는 말이 있겠나.
그런 의미에서 집사의 위세는 어지간한 귀족과 동등한 수준까지 올라갔을 거다.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 같아 민망한 생각이지만, 이중 백작 겸 현직 장관을 섬기는 집사를 누가 함부로 대할 수 있을까.
아마 집사를 대하는 사람들은 집사의 신분이 평민이라는 걸 망각했을 수도 있다. 평민처럼 함부로 대했다가 집사가 나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하면, 그 사람은 ‘감찰’ 당할 가능성이 소소하게 높아질 테니.
‘신분이라.’
잠시 입을 다문 채 집사를 바라봤다. 가문의 후계자나 공무원으로서의 칼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칼을 가장 오래 섬긴 인물, 주인이 부재중인 경우가 잦은 저택을 훌륭히 관리한 인물.
그럼에도 내 위세를 빌려 사적 욕심을 채우지도 않고 묵묵히 업무만 처리한 충성스러운 사용인.
‘저택 관리만 맡기기에는 아깝지.’
저택 관리가 쉬운 업무라는 건 아니나, 집사의 능력과 성품을 생각하면 더 큰일을 맡겨도 무방하다. 심지어 지금까지 내 집사로 지내며 여러 귀족들과 접한 경험도 있을 테니, 당장 맡겨도 잡음이 생기지는 않을 터.
“집사. 혹시 귀족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남작위를 줄 테니 위리디아에서 시종장을 맡아줬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집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무리 집사여도 작위를 언급하는 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동요하는 기색이었지만, 금방 표정을 가다듬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주인님께 죽을 때까지 일해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더한 은혜를 내리시면 수백 년을 살아도 부족합니다.”
과분하니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답변에 조금 머쓱해졌다. 지금처럼 집사가 은혜니 뭐니 할 때마다 민망하기 그지없다.
나와 집사의 관계는 일방적 은혜가 아닌 쌍방 거래나 다름없다. 나는 집사를 돈으로 고용하고, 집사는 그 금액만큼의 능력을 나에게 바친다. 딱히 은혜라고 볼 수 없는 지극히 자본주의 방식이지 않나.
“집사라면 영지 업무도 잘할 것 같아서 말한 거야. 진심으로 말하는 거니까 진지하게 생각해봐.”
그래서 한 번 더 권유했다. 예의상 거절하는 것일 수도 있고, 농담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으니.
“감사한 말씀이지만, 전 이 저택을 관리하는 일을 생의 마지막 업무로 삼고 싶습니다.”
허나 단호한 대답에 포기하고 말았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권하는 건 민망할 일이다.
“아, 아직 예비 마님들께 인사를 드리지 못했군요. 이거 참, 저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이 모양입니다.”
그리고 내가 포기한 걸 눈치챈 듯, 빠르게 화제를 돌리는 집사의 모습에 다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래, 집사만큼 저택과 사용인들을 잘 관리하는 사람을 찾는 건 힘들겠지. 시종장은 집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구하자.
“이제는 마님이라고 불러도 괜찮겠지요?곧 결혼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편한 대로 불러.”
“그럼 마님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집사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연인들에게 다가갔고, 그 모습은누가 봐도 안주인을 대하는 사용인의 모습이라 연인들도 기꺼운 듯 미소를 지었다.
완벽하다. 몇 번을 봐도 시종장을 맡기기에 딱인 인재다.
…
‘작위는 소매넣기 같은 거 안 되나?’
상황이랑 황제는 존나 잘 넣던데.
고민된다. 그냥 집사가 자는 사이에 작위 수여부터 해버릴까?
잠시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했으나, 훌륭히 억누르고 무사 출근을 할 수 있었다. 괜히 억지로 소매넣기를 했다가 집사가 암흑진화를 하면 나만 곤란해질 뿐이니까.
게다가 과도한 직책과 업무를 짬처리 당한 자의 분노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나도 그렇게 암흑진화한 케이스 아니던가.
“사람은 무능해질 때까지 승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집사의 능력이 백작령의 시종장도 가능한 수준일 수 있으나, 지금 위치에서 멈추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겁니다.”
“그런가?”
“예. 역사가 그렇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허나 아쉽고 답답한 심정은 어쩔 수 없어서 차장에게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자, 차장은 덤덤히 집사의 결정을 지지해 줬다.
내 편이 없다는 것이 서글펐으나 틀린 말은 아니다. 집사를 무리해서 시종장에 올렸다가 버거워하면 나도 슬프고 집사도 슬프고 영지도 슬픈 일 아닌가. 그렇다면 굳이 집사를 애꿎은 곳에 보낼 필요가 없다.
“그럼 무능하면 다시 내려갈 수 있을까?”
“…….”
무심코 내뱉은 말에 차장이 굳게 입을 다물었다.
상처받았다. 왜 거기서 입을 다무는 거지? 빈말이라도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라고 말해주면 안 되냐.
난 이미 장관까지 올라가서 더 승진할 곳이 없다. 그러니 무능을 입증하면 승진이 막히는 게 아니라 강등 정도는 먹어야 수지타산이 맞다.
‘장관이 당할 징계는 강등이 최고지.’
그래, 막말로 장관보다 위인 직책을 만들 게 아닌 이상─
‘…장관보다 위라.’
잠깐 상상만 한 것인데도 정신이 아찔해졌다. 장관보다 위라니,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사악한 존재다.
‘총리대신?’
이윽고 떠오른 흉악한 단어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을 뻔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딴 일은 생기지 않을 거다. 2인자의 독주를 경계하여 궁내성 장관마저 장관 서열 1위로 만든 황실이다. 누군가 장관 중 선두에 서는 건 인정해도, 장관보다 위에 서는 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창설 준비는 잘 되고 있어?”
그렇기에 총리대신이라는 단어를 기억 저편으로 밀어내며 화제를 돌렸다. 한 해를 기분 좋게 마무리해야 할 연말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새해를 아름답게 맞이할 수 없다.
“예, 무난히 진행 중입니다. 빠르면 내년 여름에는 끝날 것 같습니다.”
“괜찮네.”
긍정적인 보고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새로운 성급 부서를 창설하는 업무다. 그런 업무를 올해에 시작하여 내년에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모든 인력과 예산을 최우선적으로 투자하여 이룩한 결과라는 뜻.
“그래도 무리하지는 말고. 빨리 끝내봤자 정식 출범은 내후년 신년하례식 정도에 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허리를 숙이는 차장의 어깨를 토닥였다. 서두른 결과가 여름이라면 다소 느긋하게 해도 상관없다.
“감찰성 창설은 상황 폐하께서 마지막으로 내리신 황명. 자식 된 도리로서 그분의 뜻을 화려하게 밝힐 터이니, 장관은 알아두라.”
“예, 폐하.”
이미 황제는 감찰성 정식 출범 선언을 신년하례식 중에 하고자 마음 먹었다. 그 새끼가 양심은 몰라도 지능은 있는 새끼니 당연히 내후년을 말하는 걸 테고.
만약 내년 신년하례식을 운운한다면 하극상을 각오해야 할 거다. 좆같은 명령을 내리면 본인이 좆 되는 수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럼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아, 그래. 수고해.”
슬쩍 허리를 든 차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보내줬다.
담배 피러 나온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다.
***
아인테르를 바란디가 후작의 여식과 이어주는 방안.
갑작스레 떠오른 방안이었으나 검토하면 검토할수록 매력적인 방안이었다. 이는 막 제국에 편입되어 혼란스러울 북방 귀족들에게 안심을 주는 행동이며, 바란디가 후작 입장에서도 북방 유일 후작으로서의 권위를 굳건히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바란디가 후작이 무력으로 모든 북방 귀족들을 제압하는 건 지양해야 하나, 권위로 군림하는 건 용인해야 한다. 유목민 출신 백작들이 바로 옆의 후작마저 우습게 여기기 시작한다면─ 멀리 있는 황제는 어떻게 생각하겠나.
그러니 이게 최선이다. 후작이 황실과 결합하여 본인의 권위를 굳건히 하고, 후작은 황실을 열렬히 지지한다. 나쁘지 않은 결과다.
‘혼수품은 넉넉하게 줘야겠군.’
황실의 재산을 훑어보며 적당한 것들을 하나둘 정리했다. 우선 아인테르에게는 이드라펜 후작위를 수여하고, 제도에 있는 건물 몇 채와 수도권의 농장들을 챙겨줘야겠다.
그리고 지방에 있는 땅도 적당한 크기로 떼어주는 게 좋겠지. 아무리 공식적으로는 단승에 영지도 없는 작위라지만, 황제의 동생이 먹고 살 땅도 없는 건 가혹한 처사다. 하다못해 평민들도 돈만 있다면 땅을 관리할 수 있으니.
‘금화… 보다는 물건 위주로 주는 게 좋겠고.’
그래, 아직 북방과의 거래가 원활하지 못한 것을 고려하면 화폐보다 물건으로 주는 게 좋을 거다. 금화를 줘봤자 살 물건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나머지는 황후와 상의해야지.’
목록을 훑어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예비 부인을 위한 보석이나 드레스도 챙기는 게 좋겠다만, 이건 내 심미안에 의지하는 것보다 황후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그건 그렇고 기묘한 일이다. 설마 살면서 동생의 혼수품을 챙기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황족이 적으니 원.’
본래 황제의 남매가 혼인을 하게 된다면 선황의 부인들이 관리하는 게 관례다. 혹시 현 황제가 남매들에게 억하심정이 있어서 성의 없이 처리할 수도 있으니, 황족을 향한 최후의 배려나 다름없다.
허나 상황께서는 두 명의 부인만을 두셨고, 그 둘은…
그만 생각하자. 어머니를 떠올리면 애틋함이 생기지만 다른 한 명을 떠올리면 속만 타들어 간다.
‘망할.’
2황자를 처리할 때 그 여자도 같이 처리할 걸 그랬나.
감찰성 장관이라면 알아서 잘 처리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