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33)
로판 속 공무원 433화(434/451)
신년하례식까지 며칠 정도밖에 남지 않은 연말. 보통 이 시기에는 부서의 1년 업무를 정리하고, 다가올 새해를 준비해야 하나─ 1년 내내 바깥을 떠돈 방랑자가 할 일은 극히 적었다.
그나마 한 일이 있다면 감찰성 창립 업무로 바쁜 차장 옆에서 도장을 찍고, 좀비처럼 죽어나가는 사무직 애들을 격려하는 정도. 사실상 응원 토템 역할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현장 출신이라 다행이다.’
점점 차장의 책상에 쌓여가는 커피잔을 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저 끔찍한 광경을 보면 내가 사무직이 아닌 현장직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게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된다. 만약 사무직으로 경력을 시작했다면 나도 차장처럼 구르고 있었겠지.
물론 차장도 처음에는 현장직이었지만, 그건 잠시 잊기로 했다. 현장 출신인 차장을 사무직으로 꽂아버린 게 나니까.
그래서 내가 차장한테는 늘 고맙고 미안하다. 우리 평생 가자…
‘응?’
그러던 중, 품 속에 있던 통신구가 진동했다. 누군가 문자라도 보낸 모양.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연말부터 연초까지는 공무원들 사이의 연락이 폭증하는 기간이지 않나. 나는 누군가에게 할 말이 없지만, 누군가는 나에게 묻고 싶은 게 있을 수도 있다.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통신구를 확인했다가 그대로 굳고 말았다.
[ 긴히 논할 것이 있으니 태양전으로 올 것. ]짧고 간결한 황제의 호출 문자에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누군가 나에게 묻고 싶은 게 있는 건 맞지만, 하필 그 누군가가 황제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이 새끼는 할 일도 없는 건가. 왜 애꿎은 사람을 툭하면 부르고 난리야.
태양전으로 가는 길은 평화로웠다. 이번에는 계공 각하가 너겟이 되기 위해 탈출하는 일 따위도 없었고, 상황이 성심껏 키우는 브레멘 음악대가 출몰하지도 않았다.
기이한 일이다. 황궁에 있는 황제를 만나러 가는 길인데, 난동을 부리는 동물과 마주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게 말이 되냐.
허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말이 된다. 황제 위에 상황이 버티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황제 폐하 만세. 크라시우스 가문의 가주,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이 존귀하신 제국의 태양을 뵙나이다.”
아무튼 아무 소란 없이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엎드리며 인사를 올렸다.
“왔군. 대화가 길어질 것 같으니 우선 편하게 앉도록.”
“예, 폐하.”
이어지는 말에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부른 것도 귀찮은데 대화가 길어질 것 같다니,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뭐지?’
그리고 고개를 들어 황제의 표정을 확인하고 나서야 움찔하고 말았다.평소처럼 미묘한 비웃음이 섞이거나 피로에 찌든 표정이 아닌 철저한 무표정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마치 황제 시절의 상황 같은 표정.
그렇기에 조심스레 소파에 앉으며 말없이 황제를 바라봤다. 저 새끼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감정적으로 복잡할 때, 혹은 정신 나간 결단을 내릴 때밖에 없었다. 어느 쪽이든 썩 달갑지 않은 일이다.
‘한동안 잠잠했는데.’
상석에 앉은 채 한참이나 말이 없는 황제를 보며 머리를 굴렸다. 저 누구 하나 잡아죽일 것 같은 표정을 마지막으로 본 건 약 3년 전, 1황자였던 황제가 황태자로 막 등극했을 때였다.
그때는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누구를 처리하라는 명을 내려서 개같이 굴렀었지. 이제 와서 다시 저런 표정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 어서 오게, 장관. 잠시 생각할 것이 있었네.”
이윽고 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참. 손님을 불러놓고 혼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민망하기 그지없어.”
심지어 웃음까지 터뜨리기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옛날처럼 망나니 활동을 할 필요는 사라졌다.
그러나 황제는 분명 ‘감찰’ 명령을 내리기 직전까지 갔었다. 아무리 뜻을 접었다지만 그 자체로도 심상치 않은 일.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우둔한 소신도 폐하께옵서 제국과 신민의 평온을 위해 늘 고심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하, 그런가? 역시 장관은 짐의 마음을 잘 아는군.”
혹여나 다시 발작하지는 않을까 최대한 듣기 좋은 말을 하자, 황제는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능글맞은 반응이 오히려 기꺼웠다. 그래, 이렇게 자연스레 넘어가─
“사실 제국과 신민의 평온이 아닌 황태후를 생각하고 있었네.”
‘이 시발.’
황제의 입에서 황태후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무심코 주먹을 쥐고 말았다.하필 가장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물론 현시점에서 황제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황태후밖에 없기는 하다. 2황자를 죽이고 애실론 가문을 박살 냄으로써 2황자의 흔적을 철저히 지운 황제였지만, 그런 황제도 황태후만큼은 건드릴 수 없었으니까.
계승 분쟁에서 패배한, 모두의 미움을 산 동생을 처리하는 건 가능해도 명목상 어머니를 죽이는 건 패륜이다. 아버지의 부인을 죽이는 건 아들로서 부담이 큰 일이다. 도덕적 이유가 아니라, 명분적인 이유가 그렇다. 그래서 황제는 황태후를 유폐라는 형태로 죽였다. 물리적으로 죽이지 못하기에 사회적으로 죽인 것이다.
그런데이제 와서 황태후를 언급한다고? 황제의 권위가 굳건한 지금, 굳이?
‘괜히 욕만 먹을 텐데.’
그리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표정에 나타났는지, 황제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말게. 이제 와서 황실을 소란스럽게 만들 생각은 없어. 즉위 초를 패륜으로 얼룩지게 할 생각도 없고.”
“…송구하옵니다.”
“장관이 송구할 게 어디 있나.”
픽 웃음을 흘린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장관은 이미 3년 전에, 짐의 가장 큰 한을 풀어줬지. 그거면 충분하네. 이 이상 나아가는 건 이득이 없으니.”
그렇게 말한 황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미치겠다. 차라리 말을 꺼내지도 말든가, 애매하게 말을 하다 끊어서 더 심장이 떨린다. 시가지에서 불발탄을 발견하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원망과 함께 안타까움도 고개를 들었다. 황제의 가장 큰 한이 지옥에 있을 2황자기는 하겠다만, 그렇다고 황태후는 죄가 없고 선량했겠나. 2황자 다음가는 개새끼가 황태후였는데, 황제는 그 개새끼를 죽이지 못하고 살려둬야 한다. 아무리 명목상이라지만 어머니인 황태후로 섬겨야 한다.
내 인생으로 비유하면 전대 감찰부장을 살려둬야 한다는 의미겠지.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참, 논할 것이 있어서 불렀는데 이상한 말만 하고 있었군.”
정작 황제는 역류하는 피를 그새 진정시켰는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지만.
“장관. 바란디가 후작 영애를 본 적 있나?”
“바란디가 후작 영애, 말씀이십니까?”
의외인 질문이라 잠깐 당황했지만, 금방 기억 저편에 있던 자료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예. 북방 원정 중 바란디가 후작과 교섭을 할 때, 호위로 참가한 영애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잘됐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다시 상석에 앉더니, 품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받게.”
“아, 예.”
몇 초 정도 종이를 훑어보던 황제는 자연스레 그 종이를 나에게 건넸다.
‘빽빽하네.’
종이를 받자마자 떠오른 감상이다. 집무실에 종이가 다 떨어지기라도 한 건지, 양면에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있다.
난감하다. 황제라는 놈이 이 정도로 근검절약하면 아랫놈들은 어쩌라고.이거 앞으로 감찰성은 이면지라도 사용해야─
“아인테르의 혼수품 목록일세.”
막 글자로 향하던 시선이 도로 황제에게 향했다.
미친놈인가. 지 동생 혼수품 목록을 왜 나한테 보여주지?
“안 그래도 아인테르를 바란디가 후작 영애와 맺어줄까 싶었는데, 마침 장관도 영애를 봤다고 하니 마음이 놓이는군. 장관이 힘 좀 써주게.”
‘뭔.’
순간 손이 떨렸다. 이 미친 새끼, 이제는 나를 중매인으로 부리려고?
이건 내 권한을 벗어난 과잉 업무 부담이다. 세상에 어느 황제가 감찰성 장관한테 중매를 맡기겠는가. 명백히 선을 넘고, 상식을 벗어난 명령이다.
그렇기에 용맹한 야수의 혼을 내 심장에 담았다. 이런 불합리한 명령에는 단호히─
“서로 만나지도 못한 두 남녀를 잇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 그러니 한 달 정도는 출근하지 말고 이 일에만 집중해 주게.”
…
“맡겨주십시오, 폐하. 황실의 번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실상 한 달 휴가라는 말에 더러운 짐승의 망령을 걷어냈다.
오늘부터 난 월하노인이다. 붉은 밧줄로 둘을 납치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잇는다.
***
제국의 작위 귀족이라면 신년하례식에 참가해야 한다고 한다. 이는 국경을 지키는 변경백을 제외하면, 설령 공작이라도 따라야 하는 절대적인 의무.
당연히 나 역시 제국의 후작으로서 신년하례식에 참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준비라고 해봤자 수행원을 꾸리는 것이 전부지만.
허나 예정에도 없던 일을 준비하게 생겼다.
“…백작, 실례지만 다시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근래 무리를 해서 그런지 귀가 안 좋아진 것 같군요.”
– 저런. 날도 추운데 조심하셔야지요. 후작께서는 북방의 기둥 아닙니까.
통신구 너머에서 미소를 짓는 위리디아─ 아니, 타일글레헨 백작의 모습에 혼란이 가중되었다. 반응을 보니 내가 들은 게 맞는 것 같다.
– 황제 폐하께서는 후작 각하의 여식이 아인테르 황제 전하의 동반자가 되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정말 맞았다. 두 번을 들어도 내가 들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내가 들은 것이 맞았다고 내 혼란이 사라질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동반자?’
다소 돌려서 말했지만 저 동반자라는 말이 부부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아인테르 황제 전하?’
황제에게 유일한 동생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 샤티가, 황제의 혈육과 결혼? 그것도 먼 혈육도 아닌 유일한 동생과?
‘꿈인가.’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혹 백작이 농담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지만, 백작이 이런 농담을 할 사람은 아니다. 그것도 황실을 거론하며 농담을 할 사람은 더더욱 아닐 거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샤티를 부인으로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들으니 그동안의 설움이 폭발할 것만 같다. 심지어 그 사람이 황족이라는 것에 오열할 것 같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던가. 얼마나 속이 타들어가는 시간이었던가.
“전 결혼할 생각 없어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사장이 될 거니, 순결을 유지할 거예요!”
“아니, 나는 뭐 바위 밑에서 널 주워왔겠냐! 제사장들도 다 결혼하고, 애도 낳아!”
제사장 직책을 언급하며 남자를 꺼리던 샤티.
“나약한 남자는 관심 없어요. 전 부족을 이끌 부족장이 될 건데, 그런 제 옆에 약한 사람을 둘 수는 없잖아요!”
제사장이라는 방패가 뚫리니 무력을 들먹이던 샤티.
“육체적인 힘이 전부는 아니죠. 지성과 예의도 힘의 일부!”
무력이라는 방패가 뚫리기도 전에 다른 방패도 덧씌운 샤티.
미칠 것 같았다. 다른 부족의 여식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약혼자도 정하고 결혼도 하는데, 내 딸은 대체 왜 저러는 걸까.
그래서 샤티의 혼인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냥 이 애비랑 평생 같이 지내고, 평생 농담을 주고받으며 사이좋게 지낼 효녀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아니다.’
하늘이 그런 나를 가엽게 여겼는지, 샤티의 방패를 간단히 치워버릴 강력한 존재가 나타났다.
– 물론 결혼은 당사자들의 문제고, 가문 간의 문제이지 않습니까? 만일 후작께서 원치 않는다면─
“샤티를 데리고 상경하겠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백작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지만 무시했다.
지금을 놓치면 다음은 없다.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