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35)
로판 속 공무원 435화(436/451)
황제와 어색한 침묵을 나누기는 했으나, 다행히 상황의 하사품이라는 말에 황제도 그 이상의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상황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가─ 딱 그것만 대화 주제로 삼겠다는 의지를 강렬히 보였다.
은근한 돌려까기나 짬처리의 기색도 보이지 않는 순수한 질문과 대답. 황제와 알고 지낸 시간은 몇 년이나 됐지만 이렇게 평범한 대화는 실로 오랜만이다. 아니, 어쩌면 처음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기에 황제와의 대화를 마치고 황궁을 나온 직후, 무심코 품에 안겨있는 인절미를 쓰다듬고 말았다. 이 녀석을 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황제와의 대화 난이도가 급락했다.
‘방어 토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해맑고 작은 인절미는 황제에게 쪼이는 나를 가엽게 여긴 상황의 자비라고. 이 아이와 함께라면 난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
‘평생 가자.’
쓰다듬는 손길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느새 내 얼굴을 핥아주는 인절미를 보며 다짐했다.
우리 인절미, 아니 복덩이가 어지간한 부유층 부럽지 않은 견생을 살게 해주리라.
아침 일찍부터 나간 놈이 웬 강아지와 함께 돌아오자 저택에 있던 연인들과 사용인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솔직히 나였어도 당황했을 일이니 이해한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저택에 내리깔린 당혹감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과정이야 어떻든 귀여운 애완동물이 생긴 것 아닌가. 딱히 동물을 싫어하거나 개털 알레르기를 가진 게 아닌 이상 꺼릴 이유가 없다.
“상황 폐하께서 하사하셨다고요?”
“응. 날 잘 따르는 것 같으니 데려가라고 하셨어. 못해도 10년은 살 거라던데?”
위풍당당히 방을 헤집는 복덩이를 보며 마르가 묻자 덤덤히 대답해 줬다.
그러자 마르는 더욱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상황 폐하를 뵈러 간 자리에 저 아이도 있었던 건가요?”
그 말에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차마 상황이 황궁 한구석에서 브레멘 음악대를 꾸리고 있다는 건 설명할 수 없었다.
이미 황궁에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황궁 출입 권한이 없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특급 비밀. 그런 비밀을 내 입으로 밝힐 용기 따위는 없었다.
“가끔 말 같은 것도 황실에 진상되잖아. 그때 같이 왔나 봐.”
억지로 쥐어짠 변명에 마르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납득보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는 것에 가깝지만.
– 왕!
그 와중에 복덩이가 해맑게 짖는 소리가 들려 시선을 돌리자, 바닥에 흩어진 트릭시의 머리 위에 올라가 뒹굴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미친.’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트릭시가 온화한 성격이라지만 털 달린 짐승이 자기 머리카락을 가지고 노는 건 별개의 문제다. 막말로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개가 자기 머리카락을 쪽쪽 빠는 건 싫어하지 않겠나.
“후후, 힘이 넘치는 아이구나.”
허나 트릭시는 그런 복덩이를 보며 오히려 작게 웃음을 지었다. 불쾌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그런데 오빠. 얘 이름은 뭐예요?”
“어?”
그렇게 복덩이가 방에 모인 사람들의 눈길을 독점하던 중, 툭 던져진 이리나의 말에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복덩이라는 임시 명칭을 불이기는 했으나, 아직 공식적인 이름은 짓지 않았다는걸.
‘이름이라.’
슬쩍 턱을 매만지며 고심에 빠졌다. 물론 상황이 기르던 녀석인 만큼 상황이 붙인 이름이 있기는 한데─
“편의상 3호라고는 불렀다만, 이제 장관이 키울 아이니 장관이 새로 이름을 붙이도록.”
아무리 그래도 3호는 좀 아니다. 상황이 이름을 새로 지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새로 지어야 할 만큼 처참한 이름이지.
씁쓸한 심정으로 복덩이를 내려다봤다. 어떻게 개 이름이 3호야. 공작들 칭호는 잘만 붙이던 사람이 왜 자기가 기르는 개한테는 냉혹한 건데.
“베아티투도는 어때?”
잠시 고민한 끝에 복덩이의 정식 이름을 입에 담았다.
베아티투도, 라틴어로 행복을 뜻하는 아름다운 단어. 황제와의 대화를 무난히 끝나게 해준 방어 토템에게 적합한 이름이다. 저 아이와 함께라면 황궁 출입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티티는 어때요?”
“응, 그거 괜찮네.”
이상하다. 분명 내 의견을 냈는데 자연스레 무시당했다.
그 모습을 보니 ‘루’의 악몽이 떠올랐다. 난 괜찮다고 생각한 이름이 남들에게는 별로였구나.
‘베아티투도가 뭐 어때서.’
서러움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얘들도 상황이 지은 이름을 알았어야 내 이름이 선녀라는 걸 알았을 텐데.
3호랑 베아티투도 중에 하나만 고르라고 했다면 무조건 후자였을 거다.
***
황제 폐하와 대면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부름을 받았다.
심지어 저번에 언급하신 작위 수여에 대한 일이라고 하셔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괜히 굼뜨게 움직였다가 작위 수여에 불만이 있다는 오해를 받으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폐하의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작위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바란디가 후작 영애가 용맹함과 현명함을 두루 갖춘 기재라고 하더구나. 마침 네 또래기도 하니, 좋은 인연을 이었으면 한다.”
에둘러 좋은 인연이라고 말했으나 사실상 혼인 상대로 권한다는 것 정도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니, 에둘러 말했다는 표현마저 민망할 정도의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고작 이 정도도 눈치채지 못했다면 3년 전에 죽었겠지.
“허나 능력이나 성품과 별개로, 영애는 유목민으로 살아온 세월이 길어 너와는 다소 어색할 가능성이 높다.”
혹시라도 꺼려진다면 말하라는 말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저것이 진심인지, 아니면 의례적으로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다.
물론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폐하께서 친히 바란디가 후작 영애를 언급한 것은─ 내가 바란디가 후작 영애와 혼인하는 것이 황실과 제국을 위해 이롭다는 뜻.
“과거가 어떻든 이제는 같은 제국의 일원인데 어찌 어색하겠습니까. 기쁜 마음으로 폐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나.”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폐하는 온화한 목소리로 답해주셨다.
역시 이게 정답이었다. 설령 폐하께서 혼인을 물려주실 마음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 선택이 모두를 위해 옳다.
‘나한테도 이게 좋다.’
그래, 나를 희생해서 모두가 행복한 것이 아니다. 나를 포함해서 모두가 행복한 것이다.
만약 내가 루이제에게 마음이 있던 시절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절망했을 것이다.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을 두고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해야 하는, 그렇다고 거절하기에는 내 목숨은 물론 루이제에게도 피해가 갈 수도 있는 상황이니까.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이제 나와 루이제는 일방적 사랑을 보내는 관계가 아닌 쌍방으로 우정을 나누는 관계가 되었다. 나 개인의 욕심이 사라졌으니 황족으로서의 의무를 마땅히 수행할 수 있다.
‘추구해야 할 욕심이 없다면 의무를 따라야겠지.’
심지어 그 의무가 지옥불로 향하는 의무도 아니다. 바란디가 후작이라면 북방 유일 후작이니, 폐하께서 홀대하거나 가볍게 쓰고 버릴 귀족이 아니다.
게다가 바란디가 후작이 속한 파벌을 생각하면 오히려 중용할 확률이 높다. 나를 그런 귀족의 영애와 연결하겠다는 건 바란디가 후작을 중히 여기는 것뿐만 아니라 나 역시 우대하겠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모두가 행복한 결혼이다. 나는 불합리한 위기로 걸어가는 게 아니라 평온한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황족으로 태어난 이상 정략결혼은 각오한 일이고, 한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도 했으니 후회는 없다.
‘황족이라.’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살짝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복 형의 눈길을 피해 죽은 듯이 지내고, 도망치듯 아카데미에 입학하던 황자는 더 이상 없다. 이 자리에는 황제의 혈육으로서 황실을 위해 헌신할 황족만이 남았다.
인정하자. 앞으로는 폐하 앞에서 과도한 긴장을 품을 필요가 없다고. 이전과 다른 새로운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스물을 눈앞에 두고 나서야 진짜 황족이 됐어.’
헛웃음이 나올 것 같다. 동복 형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온갖 관심과 시선이 동복 형에게만 쏠려 조용히 지내게 됐고, 이복 형이 승리한 후에는 이복동생이라 잠자코 있었지.그랬던 암울한 인생이 결혼을 통해 새로운 인생으로 변하게 되었다.
‘의무를 다하자.’
그러니 황족의 의무든, 남편의 의무든 소홀히 하지 말자.그게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미래의 아내를 향한 최소한의 예의일 터.
…그런데 그 부인이 될 분은 어떤 분일까. 어지간한 고위 귀족 자제는 전부 기억에 있지만, 그분은 신진 귀족이라 정보가 없다.
***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이미 한 대 때렸다.
‘이 치사한.’
이가 부득 갈렸다. 치사하고 계획적이게도─ 아버지는 제도에 오고 나서야 나를 끌고 온 진짜 이유를 밝히셨다. 나 홀로 영지로 돌아가거나 어딘가에 숨을 수도 없게 되니 당당히 말한 것이다.
“진정해라. 곧 황족의 부인이 될 사람이 그렇게 흉포한 모습을 보이면 어쩌려고.”
“아버지!”
“나 귀 멀쩡하니 작게 말해.”
시큰둥한 아버지의 대답에 더욱 치가 떨렸다. 제발 한 대만, 딱 한 대만…!
‘하필 보는 눈도 많은데!’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는 제도, 그중에서도 아버지와 깊은 연을 맺은 위리디아, 아니 타일글레헨 백작의 저택이다. 아직 제도에 저택이 없는 북방 대영주들을 위해 타일글레헨 백작이 거처로 내준 곳.
그런 곳에서 ‘아버지를 폭행한 딸’이라는 추문을 일으킬 수는 없다. 모든 귀족들이 제도에 쏠린 상황에서 그런 일을 터뜨렸다가는 아버지는 물론, 우리 북방 출신을 향한 멸시가 쏟아질 테니.
“…전, 결혼할 생각 없다고 했잖아요.”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진정하며 입을 열자, 도리어 아버지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언제 그런 말을 했냐! 네가 조건만 주렁주렁 달았지, 비혼 선언은 한 적 없어!”
“아니, 그 정도로 조건을 달았으면 어련히 눈치채셨어야죠! 저 결혼 생각 없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뒷목을 잡으며 휘청거리셨다.
조금 미안한 반응이지만 이번에는 아버지 잘못이 맞다. 애초에 생각도 없는 사람을 제도까지 데려와서, 거절할 수 없는 판을 깐다고?
‘절대 안 해.’
싫다. 절대로 하기 싫다. 나보다 나약한 남자한테는 흥미도 없고, 나랑 생각도 맞지 않을 정주민은 더더욱 싫으며, 정원 속 꽃처럼 자랐을 황족이라면 더더더더더욱 싫다.
“내가 후작위를 받았을 때! 조상님들 무덤 앞에서 얼마나 울었는데! 우리가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위 귀족이 됐다고, 조상님들께 대대손손 영광을 바칠 수 있다고 기도를─!”
아버지가 무어라 소리치시는 게 들렸지만 무시했다.
이미 제도에 왔으니 그 황족이라는 사람과 만나는 건 피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고개만 끄덕일 생각은 없다. 최대한 발버둥 쳐서 결혼을 피할 거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