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36)
로판 속 공무원 436화(437/451)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 후, 동시에 제국의 영토가 급격히 넓어진 이후로 처음 열린 신년하례식.
그렇기에 이번 신년하례식의 규모와 화려함은 작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비록 최근 양위식과 즉위 기념 연회를 연달아 치르며 예산이 녹아내렸지만, 신년하례식을 소소하게 진행하면 ‘검소한 군주’ 라는 평보다 ‘가난한 재정’ 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니까. 세상에는 절대 줄여서는 안 되는 예산이 존재하는 법이다.
“감찰성 장관 오셨습니까? 벌써부터 오시다니, 역시 높은 곳에 오르신 만큼 성실하시군요.”
그러나 나는 황제의 체면이나 제국의 예산 같은 문제에 관심 없다. 그저 눈앞에서 화려한 도발을 하는 미친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중요할 뿐.
“그러는 재무성 장관은 저보다도 먼저 오시지 않았습니까. 잠이 많이 줄어드셨나 봅니다.”
늙어서 그런가─ 라는 말을 조용히 덧붙였음에도 장관의 미소는 깨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알고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장관에게는 어떠한 대미지도 먹히지 않을 거라는걸. 지금 상황에서는 장관이 일방적으로 팰 수 있는 입장이라는걸.
‘뭐라고 하든 웃음벨이겠지.’
씁쓸한 심정으로 장관과 그 뒤에 있는 재무성 부장들을 바라봤다. 원래라면 나도 저 무리에 끼어있어야 하나, 이제는 아니다. 나는 저 사이에 낄 수 없다.
내 뒤에 토템처럼 서있는 북방 파벌원들. 이 파벌원들이 있는 이상 나는 장관 휘하의 재무성 부장이 아닌, 대영주들을 이끄는 파벌장으로서 사교장에 서야 한다. 파벌장으로서 파벌원을 두고 다른 집단에 섞일 수는 없지 않나.
물론 파벌원들과 함께 재무성에 섞인다는 선택지 또한 골라서는 안 된다. 특정 파벌이 재무성과 친한 모습을 보이면 다른 귀족들이 여러 의미로 질투할 테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후작 각하. 그간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여 아쉬웠는데, 이리 다시 뵈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장관의 업무가 고달프다는 건 익히 들었기에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할 일이 없는 제가 먼저 찾아갔어야 할 일이지요.”
그 와중에 장관은 내 뒤에 있던 바란디가 후작과 훈훈한 인사를 나누었다.
장관은 나에게 파벌이라는 짐을 얹어준 바란디가 후작에게 감사를, 후작도 제국의 예산을 담당하는 장관을 향한 호의를 가지고 있을 터. 덕분에 둘은 데면데면한 관계임에도 제법 우호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내 편이 없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그 누구도 파벌장이라는 거대한 의무와 책임을 짊어진 나를 가엽게 여기지 않는다.
나에게 단체라는 힘이 생긴 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많다. 내가 일개 개인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직책에 오른 것에 웃음을 터뜨리는 일생의 원수도 있다.
그런데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그래도 사람이 외로움 속에서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관료로서 부하들 위에 서는 것과 귀족으로서 앞에 서는 것은 다른 일이지.”
나를 기피하거나 비웃는 사람이 아닌, 내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귀족들을 이끄는 건 쉬운 일이 아닐세. 칼 군도 잘 알고 있듯, 명백한 수직관계가 있는 관료와 달리 귀족은 이권과 혈연이 얽힌 집합체니까. 아무리 작위의 높고 낮음이 있다고 한들 작위 하나로 모든 귀족을 호령하는 건 무리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북방 파벌원과 북부 파벌원들이 대화를 하는 사이, 한쪽 구석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해주는 전승공을 향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 말을 하는 전승공은 공작이라는 압도적 위치로 인해 귀족들을 강압적으로 이끌 수 있으나, 강압적인 리더와 파벌원들의 이해 관계를 고려하여 나아가는 리더는 다른 법. 후자인 쪽이 파벌원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환호를 받는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칼 군이 이런 일을 꺼린다는 건 잘 알고 있네. 정계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칼 군이 북방을 떠맡았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이번에도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신하로서 아니라는 대답을 해야 하지만,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잠깐 민망한 침묵이 감돌았지만, 전승공은 이해한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 칼 군이 먼저 짐을 짊어진 만큼, 폐하께서는 적극적으로 북방 파벌을 보듬으실 걸세. 나도 최대한 협조할 터이니 홀로 감내하려 하지 말고 힘들면 말하게.”
“예, 각하. 명심하겠습니다.”
그 말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파벌 자체를 무를 수는 없지만 최대한 편의를 봐주겠다는 격려와 위로 아닌가.
심지어 그 격려가 황제의 장인이자 북부 파벌을 이끄는 전승공 입에서 나왔다. 전승공의 장담처럼 힘들 때 도움을 요청할 명분은 충분하다.
“아, 그리고 칼 군의 인생 선배로서 조언할 것이 하나 있네.”
“경청하겠습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감동이 밀려왔다. 이미 마음 따뜻해지는 격려를 들었는데 조언까지 해주다니, 역시 전승공의 인성은─
“앞으로 권력을 과시하고 욕심을 보이게.”
“…예?”
예상도 못 한 말이라 내가 들어도 얼빠진 목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권력을 지양하고 욕심을 자제하라는 조언이라면 그러려니 할 텐데, 오히려 그 반대를 요구하는 조언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 세상 그 어떤 귀족이 다른 귀족에게 이런 조언을 할까. 누가 들으면 정적을 담가버리기 위한 술수인 줄 알겠네.
그리고 그런 반응에 전승공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신하로서의 칼 군은 완벽하네. 사사로이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성실한 모습을 보이니 황실의 큰 신뢰를 받았지 않나.”
큰 신뢰가 아닌 큰 족쇄라면 맞는 말이기는 하다.
“허나 폐하의 신하가 아닌 파벌장인 칼 군은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해. 자신들이 따르는 파벌장이 강력하다는 것을, 그 파벌장이 무엇을 선호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야 파벌원들이 안심할 수 있으니.”
이어지는 말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파벌장이니까 파벌원들에게 화려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건가?
“개인이 검소한 것은 미덕이나, 수장이 조용하면 곤란한 일이지.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칼 군도 이해하는 날이 올 걸세.”
“아, 예.”
“당연한 말이지만 파벌장으로서의 행보는 폐하도 이해하실 테니 걱정하지 말고.”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확실히 수십 년을 공작으로 살아온 전승공의 말이니 영양가 없는 말은 아닐 거다.
‘권력 과시라.’
단지 내 인생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 귀족 생활이 짧은 사회 초년생으로서 난해한 조언이라는 것이 문제다.
‘개인이 아닌 파벌장으로서의 나.’
그래도 전승공의 말을 몇 번이나 되뇌며 머리에 각인시켰다.조언을 기억해둬서 해가 될 건 없을 테니.
전승공과 합류한 후로는 굳이 다른 귀족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이미 북방 파벌원과 북부 파벌원들이 융합해서 북적거리는 상황. 여기에 다른 파벌까지 합류하면 인구 밀도가 너무 높아진다.
그렇게 장인어른들과 만나는 것도 뒤로 미루며 대기한 끝에, 마침내 황제의 신년사가 시작됐다.
“천명을 따르는 귀족들은 무릎을 꿇으라!”
단상 위에서 황제의 행차를 선포하는 황실부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공석인 궁내성 장관직을 채운 것은 황실부장인 모양이다.
하긴. 황실부장 정도면 장관하기에 충분하기는 하지. 2황자가 득세하던 시절에도 당시 1황자였던 황제에게 온정적이었고, 1황자가 황태자가 된 후에는 바로 황태자 파벌에 합류했으니까. 능력, 성품이 좋고 라인도 잘 타는 양반이다.
“에넨의 가호를 받아 천명을 바로 세운 에이만카 대제의 후예, 천명을 수호하는 리브노만의 주인이자 크펠로펜의 적법하고도 유일한 황제! 대초원의 칸이자 티라프 왕, 그로텐, 라티아, 프루니안, 갈란의 왕! 이티루나, 한텐, 나이갈, 라움, 레네우의 공작─”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황제의 작위와 직책에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작년에 상황이 가지고 있던 작위는 그나마 황태자였던 황제와 나눠가진 것인데, 지금 황제는 나눠 가질 사람조차 없다. 그런 만큼 작년과는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많은 작위가 이어졌다.
‘내가 네 덕분에 산다.’
진심이다. 내 명함에 적힌 감찰성 장관이니 위리디아 백작이니 타일글레헨 백작이니─ 그런 휘황찬란한 직함을 보다가 황제를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황제는 성군의 자질이 있다. 고통스러운 신하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는 황제가 성군이 아니면 무엇이겠나.
“고개를 들라.”
이윽고 황제를 수식하는 작위와 직책의 향연이 끝난 후, 황제의 호령에 자리에 모인 모든 귀족들이 고개를 들었다.
이어지는 신년사는 솔직히 기억에 남지 않았다. 딱히 중요하지도 않더라.
***
작년에는 긴장 속에서 진행했던 신년하례식이었으나, 연이은 행사로 인해 내성이 생겼는지 이번에는 큰 감흥이 들지 않았다. 그저 아무 소동 없이 신년하례식이 끝났으면 하는 소소한 바람만 품을 뿐이다.
문득 이것이 상황께서 갖던 시야가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이 자리는 정점이라는 자부심보다는 내려다봐야 할 곳이 많은 번거로움이 더욱 컸다.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황실도 더욱 정진할 터이니, 황제(皇弟) 아인테르 리브노만에게 이드라펜 후작위를 하사하며 황실과 제국의 기둥으로 삼을 것이다. 이는 단승 작위이나 그 대우는 일반 후작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허나 애써 그런 감정을 숨기며 신년사를 이어갔다. 아무렇지 않게 황실의 입장을 알리고, 아인테르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당연히 동요는 없었다. 황제의 남매가 단승 후작위를 받는 건 딱히 특별한 일도 아니니까.
‘저 영애가 바란디가 후작 영애로군.’
자연스레 단상 아래에 위치한 귀족들을 훑어보다가 감찰성 장관 근처에 있는 한 영애를 발견했다.
다소 날카로운 인상, 유목민이기에 햇빛에 탄 피부일 줄 알았으나 의외로 새하얀 피부, 황실의 금발과 대비되는 은색 머리.
‘은발이라.’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나도 은발인 황후와 결혼을 했는데 아인테르도 은발 영애와 결혼을 하게 생겼다. 아무래도 우리 형제는 은발과 연이 깊은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어머니도 은발이셨지. 상황께 물려받은 취향인 건가?
‘표정은 나쁘지 않고…’
이왕 확인한 김에 더 자세히 살피자 영애의 표정은 무난했다. 딱히 불만이 있거나 겁에 질린 듯한 기색은 아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
이는 장관이 내 명을 완벽히 수행하여 후작 영애도 결혼에 동의했거나, 설령 영애에게 불만이 있더라도 대놓고 표현할 심성은 아니라는 것.
물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최선은 전자지만 정략인 이상 후자도 각오한 일이다.
‘잘 처리했군.’
그렇기에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장관을 바라봤다. 아무튼 장관은 황실의 경사가 걸린 임무를 무사히 수행한 것이다.
‘당사자의 경사도 확실히 챙겨줘야겠어.’
장관이 황실을 위해 힘 썼으니 황실도 장관을 위해 힘 쓰는 것이 도리일 터.
역시 장관의 결혼식 장소로 성 파로나스 대성당을 빌려주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