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41)
로판 속 공무원 441화(442/451)
황실부장과의 논의는 짧게 끝났다. 논의라고 해봤자 장식품 배치나 품질 정도에 관한 얘기길래 그냥 더 화려하고 더 고급인 것을 요구했다. 어차피 예산은 황실에서 나가니까.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황제의 돈을 빼먹겠나. 애초에 가문에서 진행하려던 결혼식을 본인이 낚아챈 거잖아. 이 정도 출혈은 각오했을 거라 믿는다.
“벌써 끝났니?”
“네. 그냥 간단한 질문이라 빨리 끝내고 왔습니다.”
광속으로 복귀하자 조금 놀란 듯한 어머니가 반겨주셨다. 사실 나도 황실부장이 얘기할 게 있다고 하길래 오래 걸릴 줄 알았지. 정말 얘기만 하고 끝날 줄 누가 알았겠나.
‘응?’
그렇게 어머니에게 복귀 신고를 하고 시선을 돌리자, 어째서인지 헤실헤실 웃고 있는 마르가 시선에 들어왔다.
이상한 일이다. 내 앞에서야 자주 웃고, 어머니 앞에서도 사근사근한 모습을 보이는 마르기는 한데─ 공녀로서 품위를 지키기 위해 저렇게 히죽거리는 모습은 지양하는 편이다. 그런 마르가 어머니와 단둘이 있는 장소에서 저런 표정을 짓는다고?
물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친해진 것 같아 기꺼운 상황이기는 하다만, 낯선 건 어쩔 수 없다.
“나 없다고 좋아한 건 아니지? 그러면 조금 서운한데.”
“그, 그럴 리가요! 어머님이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그래요!”
슬쩍 농담을 건네자 마르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단순한 농담에도 기겁하는 걸 보니 정신이 다른 곳에 가있던 것 같다.
게다가 고개를 저으면서도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
‘뭐지.’
이쯤 되면 진심으로 궁금해진다. 대체 어머니가 얼마나 좋은 말을 해주셨길래 저러는 거야.
“이거… 어머님이 주신 선물이에요.”
내 눈빛에 담긴 의문을 읽었는지, 마르가 조심스레 왼손을 뻗었다.
‘반지?’
그러자 새끼손가락에 당당히 자리 잡은 은색 반지가 보였다.
반지 자체는 평범했다. 백작가의 안주인인 어머니의 선물인 만큼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물씬 풍겼으나, 딱히 특별한 장식이나 보석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보편적으로 보석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작은 문장이 새겨져있었다.
‘인장 반지였구나.’
그 문장을 보자마자 빠르게 의문이 해소됐다.
저 문장, 크라시우스 가문의 일원으로서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가 직접 결재한 서류에 찍혀있던 안주인의 문장이 딱 저 모양이었다.
‘기뻐할 만하지.’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가 시어머니에게서 가문의 안주인이 쓰던 인장 반지를 물려받았다? 그건 예비 신부가 명실상부한 가문의 일원이자 맏며느리로 인정받았다는 증거다. 귀족 입장에서는 식장에서 입을 웨딩드레스보다 더 귀한 물건이 아닐까.
“귀한 걸 받았네.”
“네. 평생 간직하고 싶지만, 저도 제 며느리한테 물려주려고요.”
그렇게 말한 마르는 어머니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다시 미소를 지었다.
사이좋은 고부인 것 같아 중간에 낀 아들로서 기쁠 따름이다.
황제 이 새끼는 출근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부터 다시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출근은 단순히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는 업무만 칭하는 게 아니다. 상사가 있는 곳에 가서, 상사와 대면하는 것 자체도 엄연한 출근이다. 이건 1억 제국 신민들도 동의할 불변의 진리다.
“어서 오게, 감찰성 장관.”
그러나 그 원통함을 황제 앞에서 따질 수는 없었다. 괜히 불만을 표했다가 지금 누리고 있는 한 달 휴가가 취소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나. 까라면 까야지.
사실 황제가 줬던 걸 도로 뺏을 만큼 치졸한 새끼는 아니지만, 휴가를 줘놓고 툭하면 황궁으로 불러대는 놈이니 방심할 수 없다.
“요즘 볼 때마다 안색이 밝군. 결혼을 앞둔 새신랑이라 그런가?”
‘개새끼.’
순간 ‘네가 부르지만 않았어도 더 밝았을 거다.’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지만 참았다. 애초에 휴가 중인 부하를 상대로 ‘볼 때마다’ 라는 말을 하는 게 맞는 거냐.
“…예. 아무래도 가정을 꾸린다는 설렘을 억누를 수 없어 얼굴에 드러난 것 같습니다.”
“이해한다네. 나도 황후와 결혼했을 때 그런 기분이었지.”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그런 말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황제와 황후의 결혼은 단순히 가정을 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제국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었으니까.
아마 황제는 가정을 꾸린다는 기쁨 외에 다른 이유로도 설렜을 거다. 예를 들면 생존의 기쁨이라거나, 2황자를 담가버릴 수 있다는 기쁨이라거나─ 대충 그런 것들.
‘하여간 부인 복은 좋아.’
물론 나보다 부인 복이 좋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겠지만, 황제 정도면 상위 0.1%에 속할 녀석이다. 에넨이 말아먹은 동생 복을 대신해서 부인 복만큼은 넉넉히 챙겨준 모양.
그래, 솔직히 동생이 2황자인데 부인 복이라도 좋아야지. 내가 1황자로 태어났으면 2황자 죽이고 같이 지옥 갔다.
“그건 그렇고 장관이 부러워. 그 설렘을 앞으로 다섯 번이나 느낄 거 아닌가.”
“과분한 행복이라 두려울 정도입니다.”
그 와중에 농담을 건네는 황제를 향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부인 여섯, 결혼식 여섯 번이라는 말에 발작을 하기도 했었다. 마르와 트릭시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 상황에서 고백 릴레이를 받았고, 멀쩡한 반지를 반으로 쪼개는 등 여러 일이 있었으니 정신적으로 피폐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여섯이나 있고, 그 여섯과 일생의 동반자가 되는 건데 싫어할 일이 어디 있겠나. 부인이 여섯인 걸로 놀리는 사람이 나오면 부러움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세상에 과분한 행복은 없네. 다 본인이 행동한 만큼 돌아오는 법이니 분수에 맞는 행복이야.”
그리고 내 대답에 옅은 미소를 지은 황제는 그렇게 말했다.
의외다. 이 새끼가 정상적인 위로와 격려를 해줄 줄은 몰랐는데. 새해가 돼서 인성이 조금이나마 진화한 건가?
“일단 앉지. 아, 그러고 보니 주례자는 정했나?”
“전승공에게 부탁했습니다. 흔쾌히 들어주시더군요.”
“이런, 그거 아쉽군. 아직도 못 구했다면 짐이 맡으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진화는 진화인데 암흑 진화였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따로 있지, 그런 소름 끼치는 농담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혹 전승공에게 일이 생겨 급히 사람을 구해야 한다면 말하게. 어차피 하객으로 얼굴을 비출 생각이었으니, 주례 정도야 가능하지.”
…농담 맞지?
***
어지간하면 감찰성 장관을 부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직접 한 달 휴가를 준 상황이고, 굳이 결혼을 앞둔 관료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본래 힘들 때 도움을 준 사람이 기억에 남는 것처럼, 일생의 경사 때 귀찮게 구는 사람도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다. 전자가 되지 못한다면 후자라도 피해야 한다.
허나 부르고 말았다.
“로벤스 왕가와 오스티아 왕가에서 선물을 보냈네. 장관의 결혼을 축하한다더군.”
당사자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겼다. 무려 왕가에서 보낸 선물을 황제가 가로챌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로벤스 왕가와 오스티아 왕가에서, 말입니까?”
내 말에 장관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 반응은 두 왕가에서 선물을 보냈다는 것에 대한 당혹감보다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한 의문에 가까웠다.
“류티스 왕자와 라테르 왕자가 보낸 선물이라면 확인했습니다. 2년 동안 함께 지내며 제법 정이 쌓인 모양입니다.”
장관의 대답을 듣고 나니 장관이 작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장관. 다시 말하지만, 왕가에서 보낸 선물일세.”
“…….”
그 말에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던 장관은 이윽고 딱딱히 굳고 말았다. 그제야 내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모양이다.
이번에 황궁으로 날아온 선물은 ‘왕자’의 명의가 아닌 ‘왕가’의 명의였다. 왕가를 대표하는 자가 왕가의 이름으로 선물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로벤스 왕가의 대표와 오스티아 왕가의 대표가 누군지는 굳이 말할 것도 없다.
‘아르메인 국왕과 유벤 연합국왕.’
다행히 교황마저 선물을 보내지는 않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보는 게 맞는지 의문이지만, 아무튼 그렇다.
“아무래도 두 왕자가 장관에 대해 좋게 말한 모양이야. 아르메인에 도착한 사절단도 좋은 분위기 속에서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더군.”
“대제께서, 보우하심입니다.”
잠시 말이 없던 장관은 겨우 입을 열며 그렇게 말했다.
글쎄. 이건 대제의 보우하심이 아니라 살아있는 누군가의 지분이 큰 것 같은데.
‘이렇게 쉬운 외교는 처음이군.’
복잡미묘한 표정의 장관을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사절단이 보고한 ‘좋은 분위기’는 장관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좋았다.
이미 아르메인 국왕은 아카데미에 있던 장관에게 우호의 선물을 보냈었다. 그런 만큼 장관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선물을 보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고, 심지어 협상장에서 장관을 언급하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이끌었다고 한다.
– 아르메인의 체면만 적당히 세워준다면… 못해도 30년은 폐하의 위엄 앞에 엎드릴 것입니다.
오죽하면 현장에 있는 외무성 장관이 그런 말까지 했겠나.
위엄 앞에 엎드린다, 아주 매력적인 말이다. 전쟁 없이 그 아르메인이 제국의 우위를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다니, 그것도 최소 30년이라니.
‘더할 나위 없는 일이지.’
상황께서도 아르메인을 완벽히 굴복시키지는 못하셨다. 동부 왕국들과의 전쟁 중 아르메인의 군세를 꺾기는 하셨으나, 어디까지나 서로 전쟁을 피하는 것이지 명백한 상하관계를 세운 것은 아니었다.
협상장에 없는 장관이 그 상하관계를 주도한 것이다. 이 얼마나 기특한 충신이란 말인가.
‘그분을 뛰어넘는 치적을 세우지는 못할 줄 알았는데.’
즉위 초에 바로 세울 줄은 몰랐다.
“그리고 장관에게 온 선물은 짐도 잠시 확인해봤는데, 제법 화려한 물건들로 보냈더군. 장관도 만족할 거야.”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한 장관을 보다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전해야 할 말은 전했으니 슬슬 돌려보내야겠지. 괜히 휴가 중인 관료를 오래 붙잡고 있는 건 도리가 아니다.
“조만간 시종들을 시켜 장관의 저택으로 보내도록 하지. 아, 혹시 저택이 아닌 영지로 보냈으면 하나?”
“…저택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폐하.”
“그러도록 하지.”
조금 아쉽다. 영지라고 했으면 타일글레헨인지 위리디아인지 말하라고 하려 했는데.
장관이 돌아가고 얼마 후, 황후에게서 연락이 왔다.
– 장관이 샤를로테를 만나고 갔습니다. 샤를로테도 대부를 보니 기뻐하더군요.
“그렇소? 그거 참 제국의 홍복이로군.”
이건 진심이다. 두 국왕이 보낸 선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대녀를 보러 가─
– 헌데 폐하. 장관이 조금 특이한 말을 했습니다.
?
– 폐하께옵서 장관에게 결혼을 앞둔 설렘을 여러 번 느낄 테니 부럽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아.’
다소 싸늘해진 황후의 목소리에 몸이 굳고 말았다.
– …혹 폐하께서는 새로운 두근거림을 원하시는지요?
어느새 손이 떨렸다. 장관은 대녀를 보러 가기 위해 황후궁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그걸… 일렀다고?’
본인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내 심장에 비수를 박기 위해 움직인 거였다.
독한 놈. 대대로 우직한 충신을 배출한 크라시우스 가문에서 어떻게 저런 놈이.
– 폐하?
“오해요.”
착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재빨리 입을 놀렸다.
이 위기를 넘기지 못하면 한동안 태양전에서 홀로 지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