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43)
로판 속 공무원 443화(444/451)
결혼식 날짜가 가까워지자 저택은 만남의 광장으로 변했다.
“함께 걸어갈 동반자가 생긴다면 혼자 가는 것보다는 느리더라도, 더욱 멀리 나아갈 수 있다고 하더군요. 부인분과 함께 누구보다 멀리 나아가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역시 후작 각하의 연륜은 못 따라가겠군요.”
“하하, 사실 저도 제 아버지께 들은 말입니다. 북방에서는 꽤 유명한 격언이죠.”
웃음을 터뜨린 바란디가 후작과 악수를 나누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파벌장의 결혼이 임박해서 그런지, 바란디가 후작을 위시한 파벌원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내 저택에 방문했다.
사실 굳이 인사를 올 필요는 없다. 어차피 결혼식에 참석한다면 그때 인사를 나눠도 상관없지만, 아무래도 파벌원들 입장에서는 당일에 인사를 하기 꺼려지는 모양이다.
‘나였어도 그랬겠지.’
이해한다. 나름 파벌이라는 이름으로 뭉친 사이인데, 아무 관계도 아닌 남들과 같이 인사하면 서로 민망한 일이다.
“북방이 결코 가까운 곳은 아닌데, 이리 귀한 발걸음을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올 수단이 없는 것도 아니고, 친우의 경사는 당연히 참석해야죠.”
그렇기에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파벌원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누었다.
공적으로는 다른 귀족들보다 먼저 인사를 온 파벌원들을 향한 격려를 위해, 사적으로는 내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한 지인들을 향한 감사를 위해.
“참, 보내주신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너무 큰 선물이라 제가 받아도 되나 잠깐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인사를 나눈 뒤, 슬쩍 파벌원들이 보낸 선물을 언급하자 파벌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자신들의 선물이 마음에 들었다고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니까.
물론 파벌의 우애를 생각하면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좋은 말을 하는 게 당연하지만, 이번에 받은 선물은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큰 선물이었다. 말, 모피, 은, 철을 한가득 보냈는데 어떻게 작은 선물로 취급할 수 있겠나.
심지어 말은 3천필이었다. 북방 전체의 말을 생각하면 적은 숫자처럼 보이나, 지금 이 시간에도 대다수의 말들이 동부로 팔려가는 걸 생각하면 최대한 신경 써서 준 숫자가 맞다.
“주머니가 가득할 정도로 받았으니 저도 보답을 해야겠죠. 여러분의 가문에 경사가 생기면, 제가 넉넉히 채워드리겠습니다.”
“이런, 그럴 줄 알았으면 미혼으로 지낼 걸 그랬습니다.”
카이타나 백작의 너스레에 다른 파벌원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를 깰 수 없어 같이 웃기는 했지만 속은 조금 복잡했다. 그러고 보니 파벌 중에서 나만 미혼이었네.
‘내가 어리긴 어리구나.’
파벌원들은 다 기혼에 자식도 두었으나 파벌장이라는 놈이 이제야 첫 부인을 들이는 상황. 새삼스럽지만 내가 젊은 나이부터 개처럼 굴렀다는 게 실감이 됐다.
대신 젊어서부터 굴렀으니, 은퇴도 남들보다는 조금 빠르겠지?
그럴 거라 믿는다.
신년하례식 때와 달리 제도에 거점을 구한 파벌원들이 각자의 저택으로 돌아간 이후, 의외의 손님이 방문했다.
아니, 정확히는 당연히 와야 할 손님이지만─ 지금껏 기이할 정도로 볼 일이 없었던 손님이 왔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구나.”
하얗게 센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금빛 모노클을 쓴 노신사. 그리고 그 옆에 선 온화한 인상의 귀부인.
두 손님의 외견을 확인하자마자 빠르게 허리를 숙였다. 저분의 말씀대로 이렇게 가까이서 대화를 나누는 건 몇 년 만에 있는 일이다.
아무 관계도 아닌 사이라면 몇 년이 아니라 평생을 보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으나, 눈앞의 노신사와는 가까우면 가깝지, 절대 먼 관계가 아니다.
“그간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외조부님.”
저분은 아라스 백작가의 가주인 켐니스 백작. 즉, 나한테는 외조부 되시는 분이니.
“반가워서 한 말이니 죄송할 것 없다. 손주가 바쁜데 그것도 이해하지 못할 외조부가 어디 있겠느냐.”
덤덤히 답하는 외조부님을 향해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아무리 괜찮다고 하지만 나름 가족인데 몇 년이나 만나지를 못했다. 솔직히 외조부님보다 현명공을 더 많이 만났어.
물론 외조부님도 작위 귀족인 만큼 신년하례식 때마다 얼굴을 보기는 했지만, 정말 얼굴만 본 수준이었다. 오붓한 대화는커녕 인사조차 제대로 나눌 수 없었다.
“당신이 칼을 피해 다닌 거니 당연히 죄송할 게 없지 않나요?”
외조부님 옆에 계신 외조모님의 말처럼 외조부님이 나를 피해 다니셨으니까.
“피하다니. 잠시 거리를 둔 거요.”
“그게 피한 거죠. 글자만 바꾼다고 뜻이 달라지는 건 아니에요.”
두 분의 대화를 들으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다행히 나와 외가의 사이가 나쁜 건 아니다. 살가운 관계라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적어도 서로 무시할 수준 역시 아니다.
그러나 외조부님은 현명공의 시아버지다. 공작의 시아버지인 것만으로도 주목을 받기 충분한데, 외손자가 감찰부장이다? 귀족들에게 시달리기도, 괜한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충분한 사유였다.
그렇기에 외조부님은 철저한 중립과 칩거를 택하셨다. 괜한 소란에 휘말리지 않게, 혹여나 현명공과 내가 ‘켐니스 백작이 가족이라고 너무 편의를 봐준다.’ 라는 말을 듣지 않게 접촉 자체를 끊었다.
“히이잉, 아붜님이 나랑 안만나져! 나 혹씨 밉뽀인거아냐?”
현명공이 내 앞에서 힝힝거릴 정도로 철저한 단절이었다. 오죽하면 나와 현명공 사이에 아라스 백작가가 있다는 걸 모르는 귀족들마저 있겠는가.
그만큼 철저하게 침묵을 지킨 외조부님이 실로 오랜만에 내 앞에 나타나신 거다. 외손자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저는 괜찮습니다. 외조부님이 무슨 뜻으로 거리를 두신 건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내 말에 외조모님은 외조부님을 잠시 흘겨보시고 입을 다무셨다. 당사자인 내가 외조부님을 이해한다고 말했으니 더 구박을 주기도 애매한 상황.
“그래도 오랜만에 뵈니 기쁘군요. 앞으로도 인사드릴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대로 끝내면 외조모님이 서운한 채로 끝날 것 같아 조심스레 덧붙이자, 외조모님도 슬며시 미소를 지으셨다.
다행이다. 이게 정답이 맞았구나.
– 똑똑
“칼, 저예요.”
이윽고 노크 소리와 함께 마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외조부모님이 접견실에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허둥지둥 복장을 점검하던데, 그새 끝내고 온 모양이다.
‘딱 좋을 때 왔네.’
조금이라도 빠르거나 늦었으면 애매했겠지. 아무래도 에넨이 마르를 돕는 것 같다.
“부인이 두 분께 인사를 드리고 싶다더군요. 들여보내도 되겠습니까?”
“그러렴. 우리도 손주며느리 얼굴은 보고 가고 싶구나.”
외조모님의 흔쾌한 수락에 외조부님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후 접견실에 들어온 마르가 격렬한 귀여움을 받은 건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마르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어느덧 저녁에 가까워진 시간이었으니 더 올 손님도 없겠지. 잠시만 이러고 있자.
“저, 좋은 인상 드린 거 맞겠죠?”
그 와중에 작게 중얼거리는 것이 들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다소 피곤한 기색의 마르가 보였다.
“응. 엄청 예뻐하시는 것 같던데?”
그런 마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마르는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조금 긴장했어요. 아버님과 어머님은 자주 뵀었지만, 두 분은 처음 뵌 거니까요.”
마르가 느낀 심적 부담을 알 것 같기에 그저 조용히 머리만 쓰다듬었다.
시부모님을 뵙는 것도 긴장하게 되는 것이 예비 며느리인데, 졸지에 시외조부모님까지 보게 됐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긴장을 할 일이겠지. 특히 외조모님은 마르 입장에서 시어머니를 만든 사람이잖아. 위압감이 엄청났겠어.
“…켐니스 백작님은 대외 활동이 드문 분이세요. 대외적으로 나서야 하는 일은 후계자가 맡은 지 오래됐고요.”
“그럼 귀한 분을 뵙게 된 거네?”
“그렇죠. 어떤 성격인지도 모르는 분이라 두근거렸지만요.”
그 말에 나도 마르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국의회 의원으로서 활동하는 아버지, 제국백 가문의 안주인인 어머니는 사교계에 알려진 정보가 적지 않게 있다. 마르로서는 ‘시부모님 공략법’을 마련할 수 있는 것.
허나 이번에 뵌 분들은 정보라고 할 게 희미했으니, 마르가 골골거릴 수밖에 없었다. 공략법 없이 처음 보는 보스를 상대한 꼴이니까.
“그래도 좋았어요. 처음 뵙는 분들이지만, 저랑 칼을 아끼는 게 느껴졌으니까요.”
“마르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지.”
그렇게 말하고는 마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집사가 찾을 때까지만 이러고 있자.
***
결혼식 준비가 전부 끝났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완벽하군. 수고 많았다, 황실부장.”
“황송하옵나이다, 폐하.”
황실부장의 안내를 받으며 성 파로나스 대성당 내부를 살피니, 정말 완벽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사소한 좌석 배치 하나하나에 신경을 기울인 것이 느껴졌다. 대성당 내부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결혼식의 화려함과 따뜻함을 살리는 장식을 했다.
그렇게 허리를 숙인 황실부장의 어깨를 토닥이며 평가를 마쳤다.
‘믿을만하군.’
황실부장은 오래 써도 될 인재다.
전 황실부장이 궁내성 장관으로 승진하며 후임자로 추천한 인물이기에 능력은 확실히 있을 테지만, 보다 자세한 것을 판단하기 위해 이 일을 맡겼었다.
결과는 흡족스럽다. 황실부장으로서 황족이 아닌 일개 귀족의 결혼식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명에 철저히 따르는 우직함, 장관이 황실의 총애를 받는 신하라는 걸 감안하는 융통성을 갖춘 것이다.
또한 본인의 경험과 거리가 먼 결혼식 업무를 완벽히 수행했다. 이는 황실부장 본인이 의외의 적성을 찾은 게 아닌 이상, 외부 전문가의 조언을 귀담아들었다는 것.
‘다음 궁내성 장관으로 딱이겠어.’
궁내성 장관은 오직 한 명의 황제를 모시지만, 황제는 여러 명의 궁내성 장관을 둘 수도 있다. 황제보다 궁내성 장관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그 공백을 채워야 하니 당연한 일.
그리고 현 궁내성 장관은 나보다 나이가 많기에 필연적으로 두 번째 궁내성 장관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황실부장을 믿고 많은 일을 맡길 것이다.”
“예, 폐하! 반드시 폐하의 신뢰에 보답하겠나이다!”
우렁찬 목소리도 마음에 들었다.
황실부장이 오래 살기만 하면 다음 궁내성 장관이 될 확률은 한없이 높아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