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44)
로판 속 공무원 444화(445/451)
눈가를 매만지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 시간 동안 혹사시켜서 그런지 눈이 뻐근하고 건조한 느낌이 든다.
‘많이도 보냈네.’
책상 한쪽에 가득 쌓인 미개봉 편지를 보다가 조심스레 하나를 집었다. 분명 몇 시간이나 소모했음에도 읽은 편지보다 읽지 못한 편지가 더 많다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경사를 맞이한 귀족으로서 감내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속세와 연을 끊고 홀로 살아갈 것이 아닌 이상, 타인과의 교류는 중요한 일이니까.
[ 장관 각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비록 직접 인사를 드리지는 못하나─ ]피곤함을 억누르며 새 편지를 확인하니, 이번에도 비슷한 레퍼토리로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어차피 이 시기에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 사실상 모든 편지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6군단장이라.’
그렇기에 빠르게 내용을 넘기며 발신인을 확인하니, 당당히 6군단장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6군단장은 국경을 지키는 동부 방면군 소속 인사다. 당연히 제도까지 오기 난감한 입장일 터. 다른 동부 방면군 소속 지휘관들도 편지를 보냈기에 짐작하고 있었다.
‘가끔 인사 정도는 나눈 사이였지.’
빠르게 6군단장과의 인연을 떠올리며 6군단장의 편지를 따로 분류했다.
축하 인사를 받았으면 마땅히 답장도 보내야 하나, 모든 인물에게 동일한 수준의 답장을 보낼 수는 없다. 상대의 직책이나 나와의 인연을 고려하여 보내는 것이 맞지 않겠나.
속물처럼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백작과 남작의 대우를 같게 하면 백작이 분노하고, 친우와 지나가다 만난 지인을 대하는 감정이 동일하면 친우가 서운해한다.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지.
‘…후작 편지는 하나도 없네.’
그렇게 다른 편지들도 하나둘 확인하는 사이, 깨달아서는 안될 진실에 도달하고 말았다. 불참 양해 편지를 보낸 사람 중 후작이 없다.
지금까지 본 편지는 전부 백작 이하, 혹은 그와 비슷한 직책의 인물들이 보낸 편지다. 그보다 위인 공작이나 후작이 보낸 편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미개봉 편지가 잔뜩 남아 있으니 그중에 섞여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편지의 탑은 집사가 한 번 정리해서 나에게 건네준 덩어리다. 고위직이 보낸 편지를 빠르게 읽을 수 있도록 정리해 준 것.
그런데 아직까지도 공작, 후작의 편지가 없다?
‘후작도 전부 오는 거구나.’
불참 양해를 구할 필요 없이 전원 참석한다는 의미다. 제국 동서남북 곳곳에 퍼진 열세 후작 전원이.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공작이야 다섯 명 전원이 결혼식에 참석할 거라고 알고 있었지만, 설마 후작도 전원 참석할 줄은 몰랐다. 몇 명 정도는 불참할 줄 알았는데.
“이게 어딜 봐서 제국백 결혼이야.”
결국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한탄을 하고 말았다. 어지간한 황족 결혼식도 이 정도로 휘황찬란하지는 않을 거다. 이건 거의 황위 계승자의 결혼식 수준 아닌가.
만약 누군가 일개 귀족이 과분한 권세를 누린다고 욕을 하면 고개를 들어 황실을 보게 할 거다. 아직 20대 초반인 어린놈한테 온갖 감투를 씌워주니 이 꼴이 난 거 아니야. 예상 수명이 수십 년인 실세가 결혼한다는데 오지 않고 배기겠냐고.
‘이걸 다섯 번.’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내 결혼식은 다섯 번이 더 남았다는 거고.
‘실세로 수백 년.’
내 예상 수명이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 정도로 늘어날 수도 있다는 것.
…
‘어디까지 읽었더라.’
머리를 비우고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일단 눈앞에 닥친 상황에만 집중하자.
마르가 사랑받는 막둥이라는 걸 다시 느끼게 되었다.
“드디어 우리 막내도 결혼하는구나. 축하한다.”
마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짓는 형님.
“그, 그 작은 애가 벌써 짝을 찾고… 아장아장 걸어다니던 애가…”
“얘는. 대체 몇 년 전 얘기를 하는 거야.”
막내의 결혼에 눈물을 보이는 셋째 처형과 그런 처형을 다독이는 다른 처형들.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서 얼굴이 붉게 물든 채 어쩔 줄 모르는 마르까지.
장인어른과 장모님보다 먼저 제도에 온 형님, 처형들의 방문 덕분에 저택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보기 좋네.’
그래, 보기 좋은 화목한 광경이다. 가족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그 가족이 자신들의 곁을 떠나는 걸 아쉬워하는 모습이다.
물론 일방적으로 어린애 취급받는 마르는 애써 시야에서 지웠다. 솔직히 마르는 바로 위 남매인 넷째 처형과도 나이 차이가 제법 있으니까. 막내가 아니라 딸 취급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지.
“우리 마르, 기껏 아카데미도 졸업했는데 바로 출가하고… 마음 같아서는 제부가 우리랑 같이 살았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훌쩍이며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는셋째 처형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마르가 바렌티 공작가에서 나오는 방식이 아닌, 내가 바렌티 공작가와 같이 살려면 데릴 사위의 방식밖에 없다. 타일글레헨 백작위를 포기해야 가능한 일.
사실 조금 끌리는 방식이기는 하다. 제국백이라는 짐을 털어내고 공작가 울타리 안에서 산다? 완벽한 백수 생활 루트 아닌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미래일 거다.
‘불가능하지만.’
허나 애석하게도 내가 어느 가문의 데릴 사위가 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성을 바꾼다면 지금 가진 작위를 다 내려놔야 하는 거니까. 지금보다 더한 걸 가지게 된다면 몰라도, 일방적으로 내려놓기만 하면 황제가 허락할 리가 없다.
한 4년 정도만 빨랐으면 가능했을 텐데. 아쉽네.
“걱정 마십시오. 자주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그냥 마르가 떠난다고 하니 저러는 거지, 며칠만 지나면 멀쩡해질 거다.”
아무튼 셋째 처형을 위로하기 위해 입을 열자 형님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가혹하고 냉정한 평가라 셋째 처형이 형님을 째려봤지만, 형님은 뭐 어쩌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남매지.’
그 모습을 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압도적 막내인 마르를 물고 빠는 모습만 봐서 망각했으나, 일반적인 남매라면 저게 당연한 거다.
아무리 남매가 나이를 먹어도 저게 평균이다…
“무리해서 올 필요는 없지만, 아이 생기면 꼭 오고. 알았지?”
그 와중에 넷째 처형은 마르를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역시 바로 위 언니라 그런가, 다른 남매들보다 애틋한 심정이 큰 것 같─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꼭 결혼식 후가 아니어도 괜찮아.”
“어, 언니!”
빼액 소리치는 마르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난 아무것도 못 들었다.
넷째 처형의 강력한 한 방 이후, 마르의 멘탈이 너덜너덜해진 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아무래도 우아하고 품위 넘치는 레이디 입장에서 ‘속도위반도 괜찮음.’ 같은 말을 면전에서 들었으니 버틸 수 없는 모양.
그리고 실로 다행히, 우리는 속도위반을 하지 않은 규정속도 준수 부부다.
‘과속했다가 무슨 꼴을 보려고.’
안 그래도 장인어른에게 밉보였다가 겨우 호감으로 이미지를 끌어올렸는데, 소중한 막내와 과속을 하게 되면 허리가 반대쪽으로 접힐 수 있다. 그건 곤란하지.
게다가 내 양심도 과속을 방지하는 데 한몫했다. 제국법으로는 17세부터 성인이지만, 20세부터 성인 취급하는 세상에서 살고 와서 그런지 느낌이 묘하더라. 괜히 마르가 아카데미 졸업할 때까지 기다린 게 아니다.
물론 마르가 알았다면 억울해 할 생각이다. 자기는 3년 전부터 성인이었는데 예비 남편이라는 놈이 홀로 미성년처럼 대했다는 거니까.
“칼…”
“어, 나 여깄어.”
살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찰나, 마르의 목소리에 황급히 대답했다.
형님과 처형들은 진작에 돌아갔으나 마르는 넋이 나간 것처럼 소파에 앉아 축 늘어져있었다. 넷째 처형의 말이 그만큼 강렬했다는 의미일 터.
“…언니가 했던 말, 칼도 들었죠?”
“처형도 마르가 떠나니 아쉬워서 농담하신 걸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라 픽 웃음을 흘리며 마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마르에게는 너무 자극적인 말이었─
“지금 가지면 올해 안에 태어날까요?”
?
그대로 몸이 굳고 말았다. 지금 뭐라고?
“카, 칼도 작위 귀족이니까, 자식은 조금이라도 빨리 낳는 게 좋을 것 같어서어어…”
당혹감이 뒤섞인 눈빛을 읽었는지 마르는 더욱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군. 크라시우스 가문의 안정도를 튼튼히 하기 위한 배려였군.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노력하면 올해 안에 태어날 거야.”
그 말에 마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빨갛게 물든 귀는 모른 척했다.
***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나와 칼의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직접 찾아오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것도, 결혼식날보다 먼저 찾아온 오라버니와 언니들을 만나는 것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칼의 외조부모님을 뵈었던 것도, 축하의 뜻을 적은 편지를 보는 것도. 전부 즐거웠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10년이 흐르고, 50년이 흐르고, 내가 죽는 날이 오더라도 절대 잊지 못할 추억들이겠지.
하지만 그 어떠한 추억도, 오늘의 행복을 능가하지는 못할 것 같다.
“마르.”
오늘은 몇 년 전부터 꿈꾸던, 간절히 기다리고 열망하던 날이니까.
“가자. 하객들보다는 먼저 도착해야지.”
평소에도 멋지지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더욱 빛나는 미소를 지은 칼. 직접 마차의 문을 열어주며 나에게 손을 내민 칼.
그런 칼을 보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저택 본관에서부터 정문까지 양옆으로 나열한 사용인들, 어서 타라는 듯 미소 짓고 있는 언니들과 루이제, 이리나를 눈에 담았다.
“네.”
작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어느 때보다 밝은 목소리로, 어느 때보다 기쁜 감정으로.
“어서 가요.”
칼이 내민 손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칼의 말처럼 하객들보다는 먼저 도착하는 것이 맞다.
오늘은 우리가 주인공이니까.
하객들에게 행복한 모습을 과시해야 하는 주인공이니까.
‘마르게타 크라시우스.’
이제 몇 시간 후면 불릴 이름을 떠올리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