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46)
로판 속 공무원 446화(447/451)
새삼스럽지만 결혼식은 나와 인연이 먼 행사였다. 결혼식 당일에 할 생각은 아니지만 정말 그렇다.
그야 빙의 전 세상에서는 고아라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할 일도 없었고, 빙의 후에는 지인이라고 할 사람이 적어 아주 간혹 하객으로 얼굴을 비추는 수준이었으니까. 빈말로라도 연이 깊은 행사라고 하기 어렵다.
물론 나도 한때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성대한 결혼식을 꿈꾸었으나, 그 꿈이 한낱 몽상으로 끝난 이후로는 마음을 접었다. 정확히는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기뻐하는 결혼식을 포기했다는 말이 맞을 거다.
“하여간 사람 앞날은 모르겠어.”
‘진짜 모르겠네.’
문득 대기실에서 장관이 했던 말이 떠올라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 개인의 사랑을 포기하고 귀족의 의무를 위한 결혼, 오직 그것만이 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라 생각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귀족이 아닌 개인으로서 이 자리에 섰다.
“신부, 마르게타 바렌티 공녀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내 의지로, 내 동반자를 기다리게 됐다.
사회자를 맡아준 리시우코 추기경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카펫 끝에서부터 마르가 걸어왔다. 장인어른의 손을 잡은 채로 한걸음 한걸음, 수줍은 얼굴을 면사포로 가린 채 조금씩 조금씩.
그 모습을 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속에서 날뛰었다. 기쁜 건 맞는데, 이 감정을 고작 기쁘다는 말로 취급해도 되는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더 예뻐진 것 같은데.’
오늘 하루에만 몇 번째인지 모를 생각을 하며 점차 가까워지는 마르를 바라봤다.
그리고 무심코 시선을 넓혔다. 정면에 있는 마르가 아닌, 그 옆에 앉아있는 하객들을 향해.
‘…많구나.’
많다. 너무 간단한 표현이지만 많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가장 앞에 앉은 부모님과 장모님,결혼식의 주인공은 가족이라며 그 뒷줄에 앉은 황제와 황후, 다시그 뒤에 나란히 앉아있는 다섯 연인들.
‘많이 모였어.’
마지막으로 제국 각지에서 모여든 귀족들까지. 누가 봐도 상당한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일개 제국백 결혼에 뭐 이리 많이 모이느냐 탄식이 나왔는데, 막상 나를 축하하기 위하여 이리 많은 인원이 모였다고 생각하니 복잡한 기분이다.
남의 육체를 빼앗은 빙의자, 가짜 가족, 처음 사귄 친구들과 연인을 지키지 못한 무능력자. 그게 이 세계에서 내가 가지는 입지였다. 분명 처음에는 그러했다.허나이 소설 속 세계의 인물로서 최선을 다해 나아갔다. 절망과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느리게나마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는 빙의자라고 하기도 힘들겠다.’
그렇게 나아간 결과, 나는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가짜 아들이 아닌 진짜 아들로서 가족을 대하였다. 친우들과 연인이 원하던 평화를 이룩했다. 그 녀석들이 목숨을 바쳐 지키려던 세상을 위해, 그 세상을 지키기 위한 기둥이 되었다. 오리지널 칼이 아닌 나를 사랑해주는 연인들과 함께 걸어가게 되었다.
‘여기가 내 세상이니까.’
어느 순간부터 빙의 전 세상이 가물가물했다. 애초에 그곳에 미련도 없었다.
그저 이 세계가 소설 속 세계라는 사실 때문에,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 때문에 애써 구분하고 있었으나─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소설 속 빙의자가 아닌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칼이니까.
내가 이 세계에서 느꼈던 감정은 만들어진 게 아니고, 쌓아왔던 인연은 가짜가 아니니까.
지금 이 결혼식 자체가 내가 이 세계의 주민임을, 열심히 살아간 일원임을 말해주고 있으니까.
‘…갑자기 왜 이러지.’
뒤늦게 머쓱해졌다. 유부남이 되기 직전이라 감성이 폭발하는 건가?
“칼.”
그나마 다행이라면 마르가 오기 직전에 상념이 끝났다는 것.
“역시… 가까이서 보니 더 멋있네요.”
미소 가득한 칭찬에 나 역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부부는 닮는다고 하던데, 벌써 하는 생각이 비슷하면 얼마나 닮아질까 두려울 정도다.
***
결혼식 내내 감찰성 장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면 볼수록 웃음이 터질 뻔했다. 저놈이 저렇게 웃을 수 있는 놈이었나. 평소에는 다 죽어가는 표정이나 인상을 쓴 모습만 봐서 낯설기 그지없는데.
‘나도 저랬겠지.’
그런 장관을 보니 황후와 결혼을 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나도 장관처럼 웃고 있었겠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처럼 만인의 축복을 받지는 못했다는 점일 터.
다 죽어가는 1황자와 공녀의 결혼은 누구도 원하지 않은 결혼이다. 물론 2황자의 패악질에 질린 귀족들 입장에서는 판을 뒤엎을 기회였을 테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축하해주지 않은 결혼이었다.
아, 에르제베트 영애도 빼고.
‘축하받지 못한 결혼이라.’
슬쩍 고개를 돌리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장관과 공녀를 보고 있는 황후가 보였다.
안타깝다. 아까부터 황후는 저 예비부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마 속으로는 자신의 결혼식과 지금의 결혼식을 비교하고 있지 않을까?
“황─”
그렇기에 우리끼리 두 번째 결혼식이라도 올리자는 말을 하려는 찰나, 사회를 맡은 리시우코 추기경의 목소리가 끊겼다.
이상한 일이다. 빠른 예배가 특징인 만큼 거침없이 사회를 진행하던 추기경이었다. 잠깐 목을 가다듬는 거면 모를까, 이 정도로 침묵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해서 황후에게 향했던 시선을 도로 정면으로 돌렸고─
“…….”
대성당에 걸린 십자가가 찬란한 빛을 내는 걸 보고 말았다.
‘…뭐지?’
머리가 새하얘졌다. 내가 본 어떠한 빛보다도 찬란한 빛이었고, 신앙심이 썩 좋지 않은 나조차 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혼란스럽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아무리 대성당의 십자가라지만 평범한 십자가가 갑작스레 빛을 내는걸, 그 십자가를 보자마자 경건해지는 걸 단순한 우연이라고 봐도 되는 건가?
“신이시여…”
그 심정을 대변하듯, 겨우 입을 연 추기경의 중얼거림만이 고요한 대성당에 울러 퍼졌다.
***
이런 미친.
‘이건 또 뭐야.’
허탈한 심정에 실소가 나왔다. 당혹감보다도 어이없는 감정이 먼저 생기는 걸 보니, 근래 들어 내가 이래저래 많이 시달리기는 한 모양이다. 이런 걸 보고도 실소로 끝나는 게 정상적인 멘탈이겠냐.
아무튼 갑자기 빛나는 십자가를 보며 마르의 손을 잡았다. 마르도 난데없는 발광 십자가 때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 와.
손이 닿자 움찔한 마르가 조심스레 내 손을 마주 잡는 사이, 머릿속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 쟤가 웬일로 하계를 보는 거지? 저렇게 대놓고 본 적은 드물었는데.
영원한 푸른 하늘이었다.
하필 가장 바라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 한숨이 나올 뻔했다. 여명 교단 대성당의 십자가가 빛나고, 신격 존재인 영원한 푸른 하늘이 반응한다? 그렇다면 저 빛의 정체가 너무 뻔하다.
‘에넨입니까?’
– 응. 이 대륙에서 저런 존재감을 낼 수 있는 신은 걔밖에 없지.
잔인할 정도로 뻔했다.
미치겠다. 여명 교단의 신이니 자기 교단 대성당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드문 일은 분명 아니겠으나… 역사를 뒤져보면 비슷한 사례 정도는 나오겠지.
그런데 왜 내 결혼식 중에 이런 일을 터뜨린 건지 모르겠다. 혹시 제국 수뇌부가 모인 김에 깜짝 쇼를 한 건가? 내일부터는 교회에 헌금 많이 내라는 퍼포먼─
– 잠깐만. 쟤 뭐라고 말한다.
그 와중에 영원한 푸른 하늘이 심상치 않은 말을 꺼냈다.
– 정착… 축하…? 너는, 진짜?
‘예?’
그 말에 절로 반문을 하고 말았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문자 보내느라 전송 오류라도 터진 건가? 무슨 신이 하는 말이 저렇게 띄엄띄엄해.
– 쟤 원래 지 혼자 아는 말만 하는 애야. 너무 신경 쓰지 마.
허나 누가 들어도 신경 쓰이는 말을 해놓고 영원한 푸른 하늘은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화려하게 빛나던 십자가도 서서히 빛을 잃기 시작했다.
‘망할.’
남의 결혼식에 난입해서 깽판 치고 사라졌네, 개 같은 거.
침묵 섞인 혼란은 이윽고 환호 가득한 축하로 변모했다. 눈이 있고 머리가 있다면, 방금 있었던 발광 십자가 사태가 에넨의 짓이라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성당에 신의 의지가 발현된 상황. 이 경이롭고 상서로운 징조에 사회자인 추기경은 물론, 하객들마저 감동한 기색이 역력했다.
“신께서 지켜보시는 아래,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과 마르게타 크라시우스는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이는 천상의 주께서 축복하심이니, 이를 부정하는 자는 신을 부정함입니다.”
오죽하면 결혼식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말까지 했겠나.
사제에게 사회를 맡기면 의례적으로 ‘신께서 지켜보시는 아래’ 라는 말을 하지만, 이번 결혼식은 진짜 신이 지켜봤다. 그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또한 신께서 축복하신 결혼식을 주관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두 분을 위해 작은 선물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리 말한 추기경은 양손을 나와 마르─ 정확히는 나와 마르의 왼손으로 뻗으며 작게 기도문을 읊었다.
‘또 빛나네.’
그러자 내 왼손에 끼어진 결혼 반(지)가 빛을 냈다. 에넨이 난입해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교환한 결혼 반지, 그 와중에 약혼 반지처럼 반으로 나뉜 반지.그 소중한 반지마저 신의 기운이 묻고 말았다.
‘…나쁘지는 않은데.’
사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좋다. 신의 존재가 입증된 세계에서 신의 축복을 받은 결혼식을 진행했고, 이제는 추기경의 축복을 받은 결혼 반(지)를 끼게 됐다. 추기경이 직접 축복을 건 물건이면 성물로 취급돼서 부르는 게 값일 정도.
물론 팔 생각은 없다. 미친 놈도 아니고.
“에넨께서 축복하신 결혼식이면…”
그렇게 은은한 백색 빛을 내는 반지를 보다가 마르의 목소리가 들려 시선을 돌렸다.
“저희가 죽으면 천상에서 만나든 다시 태어나든… 그때도 칼과 같이 있을 수 있겠죠?”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마르의 모습에 나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결혼식에 신이 난입했어도 마르가 좋아하면 그만 아닐까 싶다.
“예, 그럴 겁니다. 주께서는 선량하고 정의로운 자를 기특히 여기시니 두 분의 사랑은 이번 생에 국한되지 않겠지요.”
추기경도 마르의 수줍은 발언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참, 타일글레헨 백작부인?”
“…아, 네!”
추기경의 부름에 마르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황급히 대답했다.
귀여운 반응이라 안 그래도 지워지지 않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러다 며칠 동안은 마르만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질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부케를 던져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마르는 본인이 들고 있던 부케를 내려보다가 무언가 다짐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응?”
“호오.”
도대체 어떻게 던지려고 각오까지 다지나 싶어 지켜보니, 마르는 부케를 던지지 않고 살포시 걸음을 옮겼다.
우리 부모님이 계시는 곳으로. 더 정확히는 부모님의 뒤, 트릭시가 앉아있는 곳으로.
“다음은 언니 차례니까, 지금 드릴게요.”
위풍당당히 걸어간 마르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트릭시에게 부케를 건넸다.
“프흐.”
결국 웃음이 터졌다. 무슨 결혼식이 마지막까지 상상도 못한 일들만 터지는지.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굳이 고르라면 유쾌한 쪽에 가까웠다.
‘언제는 뭐 상상한 대로만 움직였나.’
뜻대로 흐르지 않는 결혼식? 괜찮다. 난장판은 익숙해서 오히려 평온할 정도다.
아무리 소란스럽고 뜻대로 흐르지 않더라도, 마지막에는 웃음만 남을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