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51)
타니안을 판 대가로 우호적인 첫인상을 박는 것에 성공한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 나름 온화한 분위기에서 인사를 나누게 된 알디노 추기경.
혹여나 깐깐한 상대와 피곤한 대화를 나누면 어쩌나 우려한 것과 달리, 두 추기경과의 대면은 제법 괜찮게 시작됐다. 그러니 저 추기경들이 나와 마르 앞에서 꼬장꼬장한 모습을 보일 일은 없겠지. 그거면 충분하다.
“차는 입에 좀 맞소? 엘프들이 직접 재배하는 찻잎으로 우린 것이라 독특한 풍미가 느껴질 것이오.”
황제도 그러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연신 미소를 지으며 추기경들을 상대했다.
아무리 제국이어도 신성교국의 추기경─ 그것도 성장이 작정하고 분탕질을 치면 피곤한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신의 존재감이 덜한 빙의 전 세계에서도 교회의 위엄이 상당했는데, 이 세계는 오죽하겠나. 그렇기에 황제는 성장들의 방문을 반기면서도 경계했을 거다.
하지만 성장들과 신의 축복을 받은 내가겉으로나마우호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황제로서는 혹시나 싶은 걱정이 순식간에 사라졌을 터.
“폐하의 은혜 덕분에 이 늙은이가 귀한 것을 마시게 되었군요. 사실 소천하기 전에 꼭 한 번 마셔보고 싶었습니다.”
성장도 황제의 은근한 우려를 알고 있었는지, 황제의 말에 과장된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하하, 그렇소? 이거 짐이 추기경의 꿈을 이루어준 것 같아 기쁘구려.”
그 말에 힐끔 황제를 쳐다봤다가 도로 찻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본 추기경의 꿈도 이루어주는 주제에 왜 내 꿈은 무시하는 건데. 나도 알디노 추기경처럼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다면 은퇴라는 죽기 전 소원을 들어줬을까…?
“참. 사절단이 머물 숙소는 아우스엔 대교구에서 마련했다 들었는데, 괜찮다면 황궁에 머무르지 않겠소? 마침 황궁에 빈방도 많으니 사절단이 머물기에 충분하오.”
그 와중에 황궁을 여관처럼 여기는 듯한 발언이 나왔지만 그러려니 했다. 이미 상황부터가 황궁을 목장으로 쓰고 있는데 여관 정도면 양호한 거지.
“과분한 배려에 감사드리오나, 저희는 성 파로나스 대성당 근처에서 머물 예정입니다. 주의 축복이 깃든 곳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더군요.”
“그런가? 아쉽군. 그래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하시오.”
“예, 폐하. 유념하겠습니다.”
정중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이윽고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장관.”
“하명하소서.”
“시성성 성장은 주의 축복을 받은 장관과 부인을 만나 신앙에 대해 논하고 싶다고 했었지.”
“부인과 함께 귀빈들이 머무는 숙소로 찾아가겠습니다.”
황제가 원하는 대답을 알아서 내놓자 황제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성장과 신앙을 논하는 건 짐도 탐이 나는 기회이나, 신혼인 장관을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군. 이 일은 잊지 않을 터이니 장관은 지금에 충실하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허나 황제가 생각하기에도 신혼인 새신랑을 타국 주요 인사와 붙이는 건 너무한 일이었는지, 지금 구르는 만큼 휴가를 연장해 주겠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언급했다.
‘그럼 참을 수 있지.’
마음이 급속도로 평온해졌다. 대가 없이 굴리면 개새끼지만, 휴가를 보존해 주면 까짓 못할 것도 없다.
휴가는 휴가대로 얻고 시성은 시성대로 하는 것이니 이득이─
“형제님이 괜찮으시다면 제가 형제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가도 될까요?”
“…예?”
갑작스러운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의 말에 놀라고 말았다. 직접 우리 집까지 오겠다고? 내가 찾아가는 게 아니라?
어떻게 들으면 신혼집에 눈치 없이 방문하는 손님 같은 모습이지만, 이미 황제에게 휴가를 일시 정지 당한 상태니 큰 문제는 없다. 사실 상대가 알아서 찾아온다면 더 편하기도 하고.
그러나 이미 시성이라는 권한을 들고 제국까지 찾아온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이다. 제국에 숙여주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다음은 내가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내 집까지 직접 찾아오는 건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이 연달아 숙이는 모양새에 가깝다.
“제가 형제님과 자매님의 시간을 방해한 것인데 어찌 두 분을 오라 가라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주인이 손님을 찾아오는 것보다 손님이 가는 게 맞겠지요.”
진심이 가득한 발언이라 무심코 황제를 쳐다보니, 황제도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의 말이 의외인 듯 턱을 매만지며 침묵을 지켰다. 상대를 숙이게 하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먼저 배려를 해주겠다는 고위직은 드물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나를 향해 아주 미세히 고개를 끄덕였다. 추기경의 말대로 하라는 의미.
“추기경께서 저희를 배려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군요. 기쁘게 호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 손님을 극진히 대접해주길 거라 믿습니다. 제가 나름 미식가라서요.”
“하하, 명심하겠습니다.”
요구를 빙자한 농담이라 웃음을 흘리며 맞장구를 쳐줬다. 손님을 대접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사실상 아무런 부탁이나 조건도 없이 맨몸으로 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잖아.
너무 긍정적인 일이라 이제는 얼떨떨할 정도다. 설마 타니안을 판 효과가 이렇게 큰 건가?
‘앞으로 열심히 팔아야겠는데.’
이번처럼 추기경급 인사와 만날 일이 있다면 타니안부터 팔고 시작하자.
양심이 약간 아프지만 그 고통을 감수할 만한 효과니까.
황제의 호출을 받고 태양전으로 간 다음날,바로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이 저택에 방문했다.
“하루 만에 뵙습니다, 형제님. 빈손으로 오기는 죄송해서 나름 선물을 준비하기는 했는데… 딸기 좋아하시나요?”
그것도 바구니에 딸기를 가득 담은 채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바구니를 들어 올리는 추기경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첫 만남 때는 말에게 당근을 먹이던 모습을 보이더니, 이번에는 딸기다. 혹시 시성성이 아니라 농수산식품성 성장이었나?
“좋아합니다. 안 그래도 조만간 사려고 했는데, 감사히 먹겠습니다.”
애써 그런 잡념을 밀어내며 바구니를 건네 받았다. 마침 루이제가 유독 과일을 좋아하기는 하지.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한 맛일 거예요. 탐스러워 보이길래 축복도 내렸거든요.”
“…그렇군요.”
난데없이 ‘그냥 과일’에서 ‘추기경의 축복을 받은 과일’로 진화한 딸기를 내려다봤다.
살다 보니 추기경의 축복을 받은 과일을 다 보네. 이걸 먹으라고 준 거야, 팔라고 준 거야.
‘왜 이런 사람이 성장인 거지.’
복잡한 심정으로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을 쳐다봤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은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다 기행까지 벌이는 성격이다. 아무리 봐도 고위직에 있을 사람은 아니라는 말.
아무래도 신성교국도 나름 복잡한 사정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도 아니라면 나이와 성격을 씹어 먹을 만한 능력이 있거나.
***
감찰성 장관은 내가 머무를 방까지 직접 안내를 해주었다.
딱히 사양할 필요가 없는 성의기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복자 시복을 기본으로 생각해두었으나, 성인 시성마저 가볍게 결정해서는 안 된다.
덕분에 심층조사는 무리더라도 명목상의 문답만큼은 꼭 해야 하는데, 그 문답만으로도 충분히 대화가 길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방을 제공해 준다면 나야 고맙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저택에서 꼭 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이곳입니다. 타니안 형제님이 이 방에서 지내셨죠.”
어느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감찰성 장관의 말에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방심하면 히죽거리는 표정을 보여줄 것 같으니까.
그래, 이거다. 이걸 원했다. 이 방을 보기 위해서 굳이 감찰성 장관의 저택까지 찾아온 것이다.
“형제님. 제가 듣기로 타니안 형제님도 형제님의 저택에서 머무신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방에서 머물러도 될까요?”
“아, 물론입니다. 그 방으로 안내해드리죠.”
심지어 그 원대한 목표를 위해 손님인 입장이면서 구체적이고 당당한 요구까지 했다. 다행히 장관은 흔쾌히 수락했지만 민망한 건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민망한 게 무슨 상관이야. 수치심을 조금만 감수하면 타니안과 같은 방을 쓸 수 있는데.
비록 과거에 썼던 방이지만, 나와 타니안 사이에 시간 따위는 벽이 되지 않아.
“그럼 편히 쉬십시오. 식사 때가 되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배려에 다시 감사드립니다, 형제님.”
슬쩍 방문을 열어주고 물러나는 장관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주의 축복을 받은 자이자 타니안의 고문이며, 나에게 이 방을 선사해준 은인. 실로 천상의 주와 교황 성하 다음으로 존경해야 할 사람이다.그런 사람을 향해 고개 정도야 수십 번이고 숙일 수 있다.
‘갔지?’
물론 존경과 사생활은 별개의 문제. 장관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재빨리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렇게 방에 발을 딛자마자 황홀감이 몰려왔다. 그 황홀감을 느끼며 한걸음 한걸음 침대에 다가갔고,
“흐으으으으으─”
침대에 엎드리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 방이 타니안이 있던 방.
이 침대가 타니안이 누웠던 침대.
…
습─ 하─
습─ 하─습─ 하─
습─ 하─습─ 하─습─ 하─
격하게 호흡할수록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식사 시간까지만 이러고 있어야지.
***
빵을 찢어서 조용히 입에 넣는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의 모습은 경건하고 신실한 사제를 보는 것 같았다.
저 사람이 황궁 한복판에서 처음 보는 말한테 당근을 먹이고, 딸기 따위에 축복을 걸었던 사람이 맞나? 기행과 별개로 입만 다물면 정상적인 미녀인데.
아니,생각해 보니 내 주변에만 그런 사람이 둘이구나. 에리와 현명공도 입만 다물면 그냥 미녀잖아. 입을 안 다물어서 문제지.
‘입에는 맞는 것 같네.’
아무튼 빵을 씹는 추기경의 표정을 살핀 뒤, 나도 수프를 한 입 먹었다. 다행히 손님은 불만이 없는 것 같으니 안심하고 식사를 해도 되겠다.
역시 믿고 맡기는 주방장이다. 누가 손님으로 와도 만족시키는 능력이라니.
‘정작 주인이 실수를 할 뻔했지만.’
아직도 생각만 하면 아찔하다. 타니안이 이 저택에 머문 것도 벌써 2년 전의 일이라 어느 방에서 지냈는지 가물가물했다. 그래서 최대한 기억을 쥐어짜 안내해 주기는 했는데, 추기경이 들어간 방의 바로 옆 방이 류티스의 방이더라.
에넨의 축복 덕분인지 추기경이 머무는 방은 타니안의 방이 맞지만, 까딱 잘못했으면 추기경을 류티스의 방에 넣었을 거라는 사실에 공포를 느꼈었다.
‘귀빈을 그놈하고 같은 방을 쓰게 하는 건 좀.’
신분으로 따지면 류티스도 귀빈이라는 사실은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