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52)
로판 속 공무원 452화(453/945)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과의 신앙 토론은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사실 추기경과 오붓한 신앙 토론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교황을 제외하면 사제의 정점에 오른 것이 추기경이자 성장인데, 그런 사람이 다른 사제와 신앙을 논한다? 그건 상대의 논리와 가치관을 개박살내겠다는 정중하고 우회적인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허나 나와 마르는 추기경에게 박살 날 논리나 가치관이 없는 일반인이며, 신의 축복을 받은 귀인이다. 아무리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이 화려한 입담과 탄탄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도 우리 앞에서는 웃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세상을 담지 않고 세상에 나를 담는 것이 마땅하리라. 어찌 인간이란 작은 그릇으로 세계라는 바다를 담겠는가─교단의 다섯 번째 교황인 성 갈렌 1세께서 광야에서 얻은 깨달음입니다. 혹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부끄럽게도 처음 듣습니다.”
“그분의 깨달음은 오늘날 교단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지만, 워낙 현명하시고 선량하신 분이라 많은 말씀을 남기셨지요. 열정 가득한 사제들도 성 갈렌 1세의 말씀을 전부 기억하지는 못할 정도입니다.”
바로 지금처럼.
혼란스럽기 그지없다.교단의 일화와 그 의미를 설명해 주는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은 무지한 학생에게도 그럴 수 있다며 다독여줬다. 몰랐다고 말한 내가 더 민망해질 정도로.
‘왜 이렇게 물렁하지?’
만약 우리가 사적으로 우연히 만난 것이라면, 할 얘기가 없어서 그냥 신앙 얘기를 하는 거라면 이 분위기를 납득할 수 있다. 평범히 사교를 위한 대화인데 분위기가 험악하고 딱딱하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
하지만 이 자리는 시성을 위한 자리다. 아무리 나와 마르가 에넨의 축복을 받았다지만, 그건 시성 후보에 오를 조건을 충족한 것이지 확정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성 후보인 만큼 더욱 깐깐하고 확실하게 검증해야 하는 것이 맞다.
헌데 추기경은 깐깐과는 거리가 너무 먼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치 이 대화가 시성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것처럼.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도 아닌데.’
혹시 황제에게 갈굼 당한 경험이 있어 딱딱한 분위기에 면역이 생긴 건가 싶었으나, 슬쩍 마르의 표정을 살피니 마르도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추기경과 신앙을 논한다는 말을 듣고 열심히 경전을 공부한 마르였지. 그런데 정작 돌아온 건 싱글벙글 교양 수업이니 얼마나 정신이 없을까.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그러던 중, 시계를 본 추기경이 슬슬 대화를 끝낼 조짐을 보였다.
“두 분께서 성실히 답변해주셨기에 저도 흥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부드럽게 말하는 추기경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모른다는 말이 답변의 대부분이었던 입장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양심이 아프다…
하루를 정리하고 침대에 누워야 하는 시간.
“성 갈렌 1세는 혼란스러웠던 여명 교단이 지금의 보편 종교로 나아갈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한 교황으로, 대교황이라 불리는 몇 안 되는 교황 중 하나에요.”
“그렇군.”
“대표적인 가르침으로는 이교의 수장과의 대담에서 신도의 강압적 귀의가 아닌 자발적 귀의를 강조한─”
예습 욕구로 불타는 마르에게 휘말려 아직 눈을 감지 못했다.
‘슬슬 자야 하는데.’
야속하게 분침이 움직이는 시계를 보다가 다시 마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만하고 자자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으나, 마르가 이리 열정적인 이유를 알기에 차마 꺼내지 못했다.
‘불안하겠지.’
애석하게도 마르의 열정은 지식욕이 아닌 불안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시성을 위해 찾아온 시성성 책임자가 왜 저런 행보를 보이는 거지?’ 싶은 그런 불안감.
며칠 전부터 마르는 시성 후보에 올랐다는 고양감과 긴장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설령 성인이 되지 못하더라도 결혼식 때 에넨의 축복을 받은 것, 부부가 나란히 시성 후보에 오른 것 자체로도 가문의 영광이라며 기뻐했다.
허나 정작 시성성 책임자는 시성을 위한 행보가 아닌 평온하고 일상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혹여 자신이 받은 축복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지, 자신이 추기경에게 실수를 한 건 아닌지 괜히 걱정이 들 이유로는 충분하다.
그렇기에 마르는 경전과 성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추기경이 어째서 저러는지 모르니, 적어도 신앙 토론만이라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못난 남편이라 미안해.’
진지하게 눈을 빛내며 경전을 넘기는 마르를 보니 죄책감이 몰려왔다. 추기경이 온화하게 나오는 이유라도 알면 마르를 위로할 텐데, 도저히 짐작 가는 게 없으니 함부로 말도 못 꺼내겠다.
그러니 어쩌겠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하면 정신적 위안이라도 줘야지. 마르가 만족할 때까지 밤을 새며 공부하는 수밖에.
“그리고 이건…. 카, 칼!?”
“공부도 좋지만 편한 분위기에서 하자. 너무 긴장해서 하면 오래 못 해.”
그래도 소중한 부인을 고통 속에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 마르를 품 속으로 끌어당겨 안은 채 침대에 누웠다.
마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니 급속도로 마음이 평온해졌다. 책은 누워서도 읽을 수 있으니 이렇게 공부하면 되지 않을까?
“칼, 학습은 환경과 자세도 중요… 꺅!”
못된 말을 하려던 마르의 목덜미를 오물거리며 말을 끊었다.
다행히 내 진심이 전해졌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도 경전을 내려놓고 내 목에 입을 맞췄다. 자연스럽게 심야 자습이 아닌 수면으로 이끈 것 같아 만족스럽다.
“…칼이 먼저 시작한 거예요.”
“아.”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경전을 내려놓았음에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는 거지만, 신혼 때 시끄러운 밤을 보내는 건 정말 사소한 문제다. 신경 쓰지 말자.
***
감찰성 장관에게 타니안이 지내던 방을 안내받은 이후, 매일매일 장관의 저택에 방문했다. 장관 부부에게 성인의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주를 위해 노력하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닷새나 장관 부부와 대화를 나눈 끝에 결론을 내렸다.
“다시 말해주겠나? 지금 뭐라고 했지?”
“어르신. 벌써 귀가 먼 거예요? 아니지, 연세를 생각하면 이제야 먼 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성력이 담긴 손수건이 날아왔다.
물론천 쪼가리를 사람에게 던져봤자 나풀거리며 제대로 날아오지도 않겠지만, 추기경의 신성력이 담겨서 그런지 피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날아와 몸에 부딪혔다.
그래봤자 강도는 여전히 손수건이지만.
“아프잖아요. 멍이라도 들면 어떡해요.”
허나 맞은 건 맞은 것. 손수건이 몸에 닿자마자 알디노 어르신을 향해 투덜거리며 항의를 했다.
“그거 맞고 아플 몸이면 걷다가 다리가 부러지겠지.”
슬며시 주먹을 쥐며 말하는 알디노 어르신의 모습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여기서 더 긁었다가는 권풍이 날아올지도 몰라.
“…그래, 아무튼 다시 말해보게. 지금 뭐라고?”
“두 분을 복자로 시복하고, 사후에 성인 시성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빠르게 대답하자 알디노 어르신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아마 알디노 어르신은 성인 시성이나 복자 시복, 둘 중 하나를 예상했을 거다. 결혼식에 주의 축복이 내려진 기적을 겪었으니 시복조차 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생전에는 복자로 지내다가 죽으면 바로 성인 시성? 예상도 못 한 기괴한 방식일 거다.
“사후에 성인으로 시성할 거면 처음부터 시성하면 되지 않나? 뭐하러 시복을 거치는 거지?”
그럼에도 어르신은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호통 대신 내 의중을 물었다. 사절단의 책임자니 무슨 생각인지는 알아야겠으나, 시성성 성장인 내 권한을 존중하는 발언.
“두 분이 겪은 축복은 무수히 많은 목격자가 있는 기적이에요. 심지어 두 분이 이교나 이단도 아니니 부정할 필요가 있지도 않죠.”
그렇기에 나도 진지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의 나는 알디노 어르신에게 가르침을 받은 꼬마 알렉산드리아나가 아닌, 시성성 성장 알렉산드리아나 테레지아 추기경이니까.
“게다가 장관은 2년 전, 황혼 교단 토벌에 참가했죠. 이번 기적이 아니었어도 교단에서 보상을 줬어야 할 일이에요.”
“그건 타니안 형제님께서 정식으로 건의하셨지. 토벌과 관련된 인원이 워낙 많아 아직 종합 중이지만.”
내 말에 알디노 어르신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목격자가 많은 기적, 황혼 교단 토벌 전적, 이교나 이단이 아닌 신실함. 비록 부인은 토벌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아무튼 둘은 자격이 충분하다.
“하지만 두 분은 신앙에 대한 지식과 논리가 부족했어요.”
그저 완벽에서 조금 부족했을 뿐.
“민중이 보는 성인은 완벽해야 해요. 물론 장관과 부인의 업적은 부정할 수 없지만, 민중은 자신들이 보지 못한 업적 대신 당장 볼 수 있는 신실함과 경건함을 찾겠죠.”
그렇게 된다면 곤란하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장관과 부인의 신앙적 지식은 신도와 수습 사제 사이의 어딘가다. 딱 귀족 평균이지만, 성인을 기준으로 삼으면 너무나 부족하다.
그러면 민중은 신앙심이 부족한 자가, 지식이 부족한 자가 성인이 되었다고 평할 것이다. 교단이 제국의 실세에게 성인이라는 명예를 억지로 주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끔찍한 일이다. 교단의 역사가, 교단의 자긍심이, 교단의 공정성이 의심받는 일이다. 성인이 되어 마땅한 둘의 능력도 덩달아 의심받는 일이다.
“그래서 일단 복자 시복으로 끝내려고요. 복자는 상대적으로 민중의 관심이 덜하지만, 귀족 사회에서는 알아주니까요.”
“흠.”
설명이 끝나자 알디노 어르신은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생전에는 복자로 두고, 민중의 시선이 닿지 않을 사후에 성인으로 이름을 올린다…”
다행히 몇 번이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걸 보면 썩 괜찮은 방식이라 여기는 것 같다.
당연히 괜찮아야지. 내가 시성성 성장으로 구른 경력이 있는데.
‘제비뽑기 얘기는 하지 말아야지.’
사실 노년 시성과 사후 시성 중에 뭐로 할까 고민하다 제비뽑기로 고른 거기는 한데,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잖아.
어차피 노년 시성이었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테니까.
***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은 조만간 좋은 소식이 올 거라는 말과 함께 발걸음을 끊었다.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여전히 혼란스럽다. 대체 우리에게서 뭘 보았길래 좋은 소식을 운운하는 걸까. 추기경 정도 되면 이마에 제3의 눈이라도 생기는 건가? 상대의 모든 걸 꿰뚫어보는 거고?
그럴듯한 가설이지만 애써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냈다. 추기경이 ‘조만간’이라고 한 만큼 기다리면 결과가 나올 테고,
– 잠깐 물어볼 게 있는데, 시간 괜찮니?
지금은 시성 문제보다 어머니의 연락이 더 중요하니.
“예, 물론입니다.”
조심스레 입을 연 어머니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하자, 어머니도 옅게 미소를 보이셨다.
조금 의외기는 하다. 당장 며칠 전에도 나랑 마르의 시성 후보 등극을 축하한다며 연락하셨었는데, 그때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질문할 게 뭐가 있─
– 혹시 에리히, 아직도 연인이… 없니?
아.
그 말에 본능적으로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저 ‘혹시’라는 단어와 ‘아직도’라는 단어에서 어머니가 오해를 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저건 에리히가 언제 연인을 데려와 결혼할지 궁금해서 묻는 말이 아니다. 에리히에게 연인이 있다고 착각했다는 뉘앙스의 질문이다.
– …….
허나 유감스럽게도 내 침묵이 어머니에게는 충분한 답변이 된 모양이다.
이마를 짚으며 잠깐 휘청이셨으니까.
‘에리히 이 새끼야.’
도대체 영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어머니가 저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