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53)
로판 속 공무원 453화(454/945)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사랑을 제대로 주지 못한 아들이 훌륭하게 자라 가주가 되고, 좋은 짝을 만나 결혼을 하고, 결혼식 중 에넨의 축복을 받아 신성교국에서 성장이 직접 찾아왔다. 시복, 어쩌면 시성까지 가능한 일이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정말 과분한 행복이다. 이쯤 되면 에넨은 칼과 며느리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축복을 내린 것 같다. 과거의 내가 저지른 업보에 비해 너무나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으니.
심지어 에리히가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빌리도 완전히 업무에서 물러날 테니 부부가 오붓하게 지낼 수 있다. 게다가 에리히가 졸업할 즈음이면 첫째 며느리도 안주인 업무에 익숙해졌을 거고.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눈이 쌓인 정원을 바라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업무에 치여 살았던 남편의 완전한 은퇴, 아들의 장성과 행복, 가문의 번영. 하나만 겪어도 하늘에 감사해야 할 일을 연이어 겪었으니 올해 헌금은 작년보다 많이 내야 할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내년에도 두둑이 내야 할지도 모른다.
‘내년이면 에리히도 결혼하겠지.’
마침 목검을 든 채 정원을 지나가는 에리히를 보자 더욱 흐뭇해졌다.에리히의 나이도 어느덧 열아홉. 결혼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나이이며, 형이자 백작인 칼도 결혼을 했으니 더 이상 망설일 필요도 없다.
만약 에리히에게 짝이 없었다면 열아홉이 아닌 스물아홉이라도 결혼을 권하지 않았겠으나─ 다행스럽게도 에리히에게는 짝이 있다.
라우라의 딸이자 나도 딸처럼 여긴 아이,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아 걱정이 많았지만 무사히 회복한 장한 아이.
‘세라가 며느리라.’
자이겔 남작 영애이기도 한 세라. 그 아이가 에리히의 유력한 예비 부인이다.
웃음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어릴 때부터 친했던 두 아이가 마침내 부부의 연을 맺는다. 마치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아름다운 광경 아닌가.
그리고 세라가 에리히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진작에 알고 있었으니, 흐뭇함과 별개로 대견함도 느껴졌다. 드디어 세라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 같아서.
‘아카데미에서 같이 지낸 게 효과가 있었어.’
이미 친했던 아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1년이나 지냈으니 효과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만.
“니아, 나야.”
그렇게 연무장 쪽으로 사라지는 에리히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사이, 문 밖에서 짧은 노크 소리와 함께 라우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다. 오늘은 라우라도 쉬는 날이라 가족끼리 있어야 할 시간인데?
“무슨 일이야? 시녀장이 휴가도 반납하고 일하면 시녀들이 눈치 볼 텐데.”
일단 의아함을 억누르고 농담 섞인 말과 함께 문을 열었으나, 딱딱하게 굳은 라우라를 보니 나도 굳어버리고 말았다.
심상치 않다. 라우라가 이렇게 굳은 얼굴로, 그것도 휴가까지 반납하며 나한테 찾아왔다. 결코 가벼운 일일 리가 없다.
정말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뭐라고?”
내가 들어도 넋이 나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만큼 라우라가 알려준 정보는 심각하고도 중대했다.
“세라랑 에리히, 아무 관계도 아니야…”
그리고 라우라는 다시 끔찍한 정보를 전해줬다. 본인도 믿고 싶지 않은지, 제발 아니기를 바라는지 침통한 표정이었으나 정보는 변하지 않았다.
그런 라우라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혹시 라우라가 농담을 하는 건가? 농담치고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데.
‘거짓말.’
이윽고 머리가 라우라의 말을 부정했다. 에리히와 세라가 연인이 아니라는 말도 안 되는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다. 그 아이들이 어떤 사이인데. 나랑 라우라의 우정을 그대로 이어받은, 사실상 태어날 때부터 친구인 사이잖아.
‘거짓말이야.’
세라는 옛날부터 에리히를 마음에 품고 있었고, 에리히도 최근에 하디네르 남작령을 영지로 택했다. 하디네르 남작령은 세라가 머무는 자이겔 남작령과 맞붙은 영지. 즉 세라와 가장 가까운 지역을 영지로 고른 거다.
당연히 세라의 마음을 에리히도 눈치챈 거라 생각했다. 에리히가 세라의 마음을 받아들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고? 둘이 여전히 평범한 친구 관계고, 하디네르 남작령을 택한 건 우연이었다고?
‘그럴 리가 없어.’
그 모든 게 우연일 리가 없다. 아니, 그것보다 세라의 마음을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과거에는 에리히가 자이겔 남작령까지 찾아가야 겨우 세라를 만날 수 있었고, 세라도 몸이 약한 자신이 에리히의 발목을 잡을까 두려워 자제했다고 쳐도─ 아카데미에서 1년이나 같이 지냈지 않나. 1년이나 남녀가 함께 지낸 것이지 않나.
모를 수가 없다. 절대, 절대 그럴 리가…
…
“니아!”
이마를 짚은 채 휘청이자 라우라가 서둘러 부축해 줬다.
유감스럽게도 자신 있게 부정할 수 없다. 에리히가 자신이 물려받을 작위로 하디네르 남작위를 택했을 때, 나와 라우라의 반응은 ‘이제야’ 같은 반응이 아니라 ‘마침내’라는 반응이었으니까.
사실 알고 있다. 에리히는 눈치가 없다. 내 자식이지만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부족하다. 그걸 알고 있기에, 짐작하고 있기에 에리히가 하디네르 남작이 된 것을 뛸 듯이 기뻐한 거다. 드디어 눈치가 생겨서 세라를 받아들인 거라 착각한 거다.
“라우라.”
겨우겨우 현실을 직시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에리히를 잘 돌봤다면, 어미로서 사랑을 알려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에리히가 눈치가 없는 건 에리히의 죄가 아닌 내 죄다. 에리히가 정상적인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기에 타인의 애정에 둔감한 것이다.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칼은 연인이 여섯이나 되지만, 그건 칼이 대단한 거지 에리히가 못난 게 아니─
“너 대신 내가 아들처럼 돌봤잖아.”
“…….”
그 말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확실히 못난 어미 대신에 유모인 라우라가 정성을 다해 칼과 에리히를 돌봤다. 부모의 정은 모를지언정 사랑을 모를 환경은 아니었다.
‘신벌이구나.’
결국 그런 결론이 나왔다. 에넨은 나에게 축복만 준 것이 아니라 벌도 내린 거라고.
장남이 아무 문제 없이 나아가는 대신, 차남에게 족쇄를 채운 거라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이교의 씨앗이 자랄 것 같았다.
***
어머니의 서글픈 설명을 듣고 나니 안 그래도 무거웠던 입이 더욱 굳게 닫히고 말았다.
‘왜 그런 오해를 하셔서.’
그리고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나야 에리히와 세라를 가까이서 직관했으니 둘의 관계를 바로바로 파악할 수 있지만, 어머니와 유모는 다르다. 어쩌다 한 번 보는 상황이니 괜한 오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때 제대로 설명했어야 했는데.’
동시에 죄책감도 치솟았다. 타일글레헨 백작위를 승계하기 위하여 영지에 방문했을 때, 유모가 에리히와 세라의 사이가 진전됐다고 오해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유모가 실망할 게 우려스러워 입을 다물었으나, 이렇게 진실이 밝혀질 줄 알았다면 그때 사실대로 말했을 거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들킨 거지? 어머니보다 유모가 먼저 알았다는 건 에리히가 아닌 세라를 통해 진실이 밝혀졌다는 건가?
‘설마.’
순간 아찔한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형인 내가 결혼을 했으니 다음 순서는 에리히와 그 연인이라 추정되는 세라다. 그래서 유모는 기쁜 마음으로 세라에게 언제 결혼할 거냐고 떠봤을 테고, 당연히 에리히와 아무 사이도 아닌 세라는 눈물을 머금으며 오해를 정정해 줬겠지.
피가 마르는 기분이다. 자기 입으로 ‘저랑 에리히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라고 말했을 세라를 떠올리니 내가 다 미안하다.
– 정말 아무 관계도 아니구나.
그 와중에 자세를 바로잡으신 어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미안하다. 시녀장에게 듣기는 했지만… 혹시, 혹시 우리가 착각하는 게 아닌가, 세라가 부끄러워 숨기는 게 아닌가 싶어 물어봤단다.
이번에도 입이 닫히고 말았다.
그렇구나, 마지막 희망을 걸고 나에게 연락하신 거구나.
“그, 저도 당사자가 아닌 곁에서 보는 입장이라, 저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관계를 맺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생각해도 설득력이 없는 말이었지만 애써 그렇게 말했다. 일단은 어머니부터 위로하는 게 옳지 않겠나.
허나 내 위로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으셨다.
– 에리히가 네 눈을 피할 정도로 철저할 것 같지는 않구나.
분하게도 납득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묘하게 촉촉한 눈망울로 연락을 끊으셨다.아마 한동안 정신적 충격으로 몸져누우시지 않을까. 조만간 영지에 찾아가야겠어.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작동된 마음속 삼각형이 명령했다. 동생이 저 모양이니 형인 내가 효도를 해야 한다고.
‘어쩔 수 없다.’
결연한 각오와 함께 통신구를 작동했다. 어머니와 유모가 도달해서는 안 될 진실에 도달하고 말았으니, 이제 나도 머뭇거리거나 여유를 가져서는 안 된다.
– 호르펠트 백작입니다.
다행히 내 각오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금방 연락이 닿았다.
“감찰성 장관 내정자,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이다.”
의외의 연락과 하대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호르펠트 백작─ 아니, 제노비아의 모습을 보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지금의 나는 행정부 장관으로서 제국의회 의원에게 연락한 것이 아니다.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 장관이 아닌 에리히의 형으로서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지금은 편하게 말해도 될까?”
눈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동생의 형으로서 연락한 거다.
– 아, 네, 네! 편하게 말하세요!
“그래, 고마워.”
양해를 가장한 일방적 통보였지만 제노비아는 오히려 기꺼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 남자의 형이 자신을 편히 대하겠다는 사실에 주목한 모양.
“제노비아.”
– 네, 칼 오빠.
그렇기에 더욱 각오를 다졌다.
“네가 에리히의 첫 번째 부인이 되는 거, 내가 최대한 도와줄게.”
더 이상 방관자나 사소한 도움을 주는 자가 아닌, 적극적인 개입자가 되자고.
제노비아를 첫 번째 부인, 세라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만들자고.
‘개 같은 놈.’
동생 연애에 개입하는 형이라니. 이 얼마나 기괴한 상황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