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54)
로판 속 공무원 454화(455/945)
내 선포에 제노비아는 침묵 상태에 빠졌다.
이윽고 눈을 깜빡, 입을 달싹, 그러고는 다시 침묵.
– 네?
그렇게 한참이나 멍한 모습을 보이고 나서야 겨우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치 자신이 들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해한다. 나와 제노비아가 어색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밀한 관계도 아니다. 그냥 어쩌다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고, 서로에게 경사나 불행이 생기면 안부 연락을 걸 정도의 의례적 사이에 불과하다.
물론 제노비아 입장에서 나는 예비 아주버님이기에 온갖 예의를 갖추어 대하고 있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공개적으로 제노비아의 짝사랑을 지지한 적은 없으니 제노비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거다.
“네가 에리히랑 결혼하는 거 돕겠다고.”
허나 지금, 제노비아의 상식이 무너졌다. 자신이 포섭해야 할 예비 아주버님이 자신을 돕겠다고 스스로 나선 것이다. 아마 기쁨과 별개로 당혹감이 더 클 터.
– 저, 정말이신가요?
“어.”
그럼에도 무슨 말이냐는 반문 대신 정말이냐는 사실 여부부터 따지는 걸 보면 당혹감보다 기쁨이 더 큰 모양이다.
마음이 아프다. 얼마나 절박하고 속이 타들어갔으면 뜬금없는 기회에 눈이 뒤집힌 걸까. 못난 동생 때문에 이 형은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대신 조건이 있어.”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하기에 덤덤히 입을 열자 제노비아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혹시 히덴 가문의 이권을 요구하지는 않을까 우려스럽겠지.
솔직히 침묵을 지키던 예비 아주버님이 갑작스레 결혼을 돕는다고 나서면 정치적 행보 같기는 하다. 나였어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세라하고 싸우지 말고 두 번째 부인으로 인정해 줘.”
그러나 아니다. 난 정치니 뭐니, 가문 사이의 이권이니 뭐니 그런 거에 관심 없다.
그저 지금쯤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고 있을 어머니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딸의 연애를 걱정하며 정신이 나갔을 유모를 위해 나선 것이다.
– …….
“…….”
– …그게 전부, 에요?
“응.”
제노비아의 얼굴이 다시 멍해졌지만 난 진지하다.
둘이 사이좋게 손을 잡고 공동 투쟁을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사람이 연인의 사랑을 독점하고자 하는 건 당연한 욕구다. 그건 욕심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원초적 본능이며, 정략혼과 일부다처, 일처다부가 일상적인 귀족들도 억누를 수 없는 사안이다.
그래, 잘 알고 있다. 세라든 제노비아든 에리히의 유일한 부인이 되고 싶어 할 가능성이 높다. 상대와 손을 잡고 공동 투쟁하라는 건 개소리로 들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겠나. 공동 투쟁이 아닌 상호 간의 막고라를 펼치면 공멸할 미래가 뻔한데.
‘연애 싸움은 참가자가 정해진 싸움이 아니니까.’
만약, 아주 만약 이 세상에 여자가 세라와 제노비아밖에 없다면 둘이 끝장을 볼 정도로 싸워도 된다.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살아남을 텐데, 까짓 끝까지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허나 세상에는 남자가 반인 것처럼 여자도 반이다. 세라와 제노비아가 서열 정리를 하는 사이에 다른 여자가 에리히를 노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유감스럽게도 난 비슷한 일을 직관한 적이 있다. 본인들끼리 견제를 날리며 싸우다가 다른 사람에게 패배한 안타까운 현실을, 예상도 못 한 플레이어에게 패배한 눈물겨운 결말을.
‘제과 동아리.’
77년도 시즌 동아리 부원들이 그 주인공이다. 그것들은 리제에게 홀려서 서로에게 견제구를 날린 주제에 리제에게 제대로 된 고백도 하지 못했고, 그 머저리 같은 싸움에 참여하지 않은 내가 리제의 연인이 됐다.
그렇기에 미래가 보인다. 세라와 제노비아도 77년도 시즌 부원─ 아니, 그냥 79년도 시즌 세트와 제트가 될 미래가 보여.
‘에리히도 결혼 시장에서는 우량 매물일 텐데.’
결정적으로 에리히가 연인 없이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결국 정략혼 루트를 밟을 텐데, 에리히 정도면 결혼 시장에서 엄청난 우량 매물 취급을 받는다.
나이도 아직은 결혼 적령기 수준이고, 얼굴도 잘 생겼고, 성격도 괜찮고, 무력도 강하고, 가문도 좋고, 본인도 남작이라지만 작위 귀족이고, 내 동생이다. 흠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세라랑 힘을 합하면 반은 확보할 수 있어. 그런데 지금 상황이 이어지면 반도 못 건질 수도 있지. 아니면 아예 제3자한테 뺏길 수도 있고.”
동생을 재산처럼 얘기하니 기분이 묘했지만 진심을 다해 말했다. 제노비아가 독점을 고집하면 일이 귀찮아지─
– 좋아요.
생각보다 시원한 대답이 나왔다.
– 제가 첫 번째라면 괜찮아요. 하위 귀족이 부인을 여럿 두는 건 드문 일이지만, 에리히라면 그럴 수 있죠.
“정말 괜찮겠어? 제국백이 일개 남작의 부인인 것도 보기 이상한데, 그 남작이 다른 부인까지 두면 뒷얘기가 나올 수도 있어.”
너무 시원한 대답이라 오히려 내가 부정적인 얘기를 꺼내고 말았다.
설득하는 입장에서 스스로 약점을 까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상대가 너무 협조적이니 입 닦고 넘어가기는 좀 그래.
– 두 번째 부인 얘기를 꺼낸 건 오빠잖아요.
“그건 그렇지.”
설마 이렇게 흔쾌히 수락할 줄은 몰랐지만.
– 그리고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에리히를 좋아하는 입장이니 세라 영애의 마음도 이해할 수는 있어요. 단지 세라 영애가 첫 번째가 되면 저는 기회가 없으니 물러나지 않은 거지만요.
씁쓸한 듯 중얼거리는 제노비아를 보니 순순히 긍정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제노비아는 독점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첫 번째 자리를 유일한 목표이자 마지노선으로 설정했을 뿐.
‘하필 에리히한테 반해서.’
착잡한 심정으로 제노비아를 바라봤다. 에리히가 결혼 시장의 우량 매물인 것처럼 제노비아도 부족함 없는 인물이다. 아니, 현직 제국백이라는 걸 생각하면 오히려 더욱 높게 평가받을 매물이다.게다가 세라를 이해한다는 말을 한 걸 보면 성품이나 머리 굴리는 능력도 뛰어나고.
그런 인물이 하필 에리히라는 재앙적 눈치의 소유자에게 반한 것이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복받은 새끼.’
내가 할 생각은 아니지만 에리히는 분수에 맞지 않은 여복을 가진 것 같다.
***
멍하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침대에 누워있는 것만큼 내 인생에서 익숙한 일은 없지만, 지금만큼은 평온함이나 익숙함이 아닌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죽고 싶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태어날 때부터 병에 시달린 내가 하면 오해를 받을 말이니 평소에는 농담으로도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진심이다.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다. 기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에리히와의 결혼을 떠봤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향해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해야 했던 나.
미칠 것 같다. 가혹한 진실을 스스로 말해야 하는 것도,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변한 어머니를 보는 것도 너무한 일이다.
‘1년이나 같이 지내면 무슨 성과라도 있어야 할 텐데…’
서러움에 눈물이 찔끔 나오고 말았다.억울하다. 무려 1년이다. 1년이나 학창 생활을 같이 했다. 내가 에리히랑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이미 친한 상태에서 다시 1년을 붙어 지낸 건데, 대체 왜.
사실 에리히가 하디네르 남작이 됐을 때는 조금 기대를 했었다. 에리히가 표현만 하지 않은 거지, 나에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이제 조금씩 사이가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런데 아니더라. 에리히가 하디네르 남작령을 택한 이유 중에 내가 있는 건 맞지만, 사랑이 아닌 우정이라는 감정이 작용한 거였다.
‘어떻게 하지?’
슬슬 진지하게 미래가 걱정된다. 1년을 같이 지냈는데도 이 모양이다. 남은 1년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이 상태로 졸업을 하게 되면 다시 서로 다른 곳에서 지내게 될 테고, 아무리 인근 영지에서 지낸다지만 아카데미에서 같이 지낸 것보다는 육체적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가까이 지낼 때도 에리히의 마음을 얻지 못했는데, 거리마저 멀어지면 난 어떻게 해야 돼? 영원히 에리히에게 닿을 수 없는 거야? 영원히 내 마음을 보이지 못하고 이대로 끝나는 거야?
‘싫어.’
꾹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싫다. 그런 결말은 절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싫으면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내가 거부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데.
‘차라리 에리히의 방에 찾아가서─’
문득 극단적인 생각이 떠올랐지만 황급히 털어냈다.그 방법은 아니다. 그건 에리히의 마음을 얻는 게 아니라 에리히에게 마음의 빚을 지워서 옭아매는 거잖아.
애초에 내가 에리히를 찾아가 봤자 체력적으로 밀리잖아. 금방 제압당하고 반송당할 게 뻔해.
‘…응?’
그러던 중, 베개 옆에 둔 통신구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잠시 통신구를 바라보다가 눈가를 매만지고 연락을 받았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우울한 얼굴로 연락을 받을 수는 없지.
– 세라?
“어, 오빠?”
이윽고 익숙한 얼굴이 나타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아카데미, 그리고 제과 동아리에서 1년이나 같이 지낸 만큼 칼 오빠와 제법 친해졌다고 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연락을 주고받는 건 처음이다. 사적으로 대화를 나눌 주제도 없고, 설령 있더라도 에리히를 통해 하는 편이었으니까.
아무튼 의아함을 뒤로하며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오빠랑 누워서 대화를 할 수는 없으니.
–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지? 급하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근처에 누구 있어?
“아니요. 저 혼자예요.”
– 다행이네. 남이 들으면 조금 민망하거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오빠는 순식간에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 세라. 반이라도 얻는 것과 전부 잃는 것 중에 어떤 게 좋아?
“…네?”
그 말에 통신구를 쥔 손이 떨렸다.
맥락 없는 말이었지만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 전자라면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 수 있어.
오빠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밖에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