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55)
로판 속 공무원 455화(456/945)
세라를 설득하는 작업은 제노비아를 설득하는 것보다 힘들었다. 제노비아를 설득할 때는 상대가 순순히 협조한 것도 있지만, 지금은 어린 시절부터 연심을 품어왔던 아이에게 ‘너 두 번째로 만족해야겠다.’ 라는 통보를 하는 꼴이니까. 상대의 태도보다는 내 양심의 문제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만일 세라도 백작가의 영애였다면 누가 먼저 에리히와 친구가 되었는지를 따지며 순서를 정했을 텐데, 애석하게도 남작가인 세라가 첫 번째가 되면 제노비아는 자동 탈락이지 않나. 그건 제노비아에게 못 할 짓이다.
“만약 네가 첫 번째가 되면 제노비아는 마지막까지 반대하거나 방해할 거야. 그러면 이 상황이 지속될 거고, 어쩌면 제3자가 튀어나올 수도 있지.”
– 그건… 그래요.
더욱 가슴 아픈 건 내 설득을 듣는 세라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
차라리 왜 내가 두 번째냐고, 왜 도둑고양이한테 에리히를 양보해야 하냐고 울분을 토했다면 이렇게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거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에리히가 순서로 차별을 할 애는 아니잖아.”
그런 세라를 보며 딱히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건넸다. 두 번째가 될 당사자 입장에서는 무슨 말을 듣더라도 위안이 되지 않겠지만, 인간의 도리로서 이런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에리히는 눈치가 파멸적인 거지 지능─ 아니, 지능도 뭔가 좀 위험하지만 심성이 나쁜 새끼는 아니다. 세라를 첩이 아닌 정당한 부인 중 하나로 대할 것이고, 첫 번째와 두 번째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에리히의 작위는 첫 번째 부인인 제노비아의 자식에게 이어질 테지만, 세라도 자이겔 남작위를 물려받을 예정이니 큰 문제는 아니고.
– 하긴. 에리히가 오빠를 닮았다면 그렇겠죠.
명치 쪽으로 날아오는 묵직한 돌직구에 흠칫하고 말았다.
딱히 악의가 있어서 하는 말보다는 ‘여섯을 공평하게 대하는 사람의 동생이니 둘 정도는 문제없을 듯.’ 라는 의미의 발언이겠지만, 저 말을 듣고 다니 제3자가 바라보는 내 모습을 깨달을 수 있었다.
본인도 부인을 여섯이나 들여놓고, 동생의 부인도 여럿으로 만들려는 뒤틀린 형의 모습.
‘미친놈이잖아 이거.’
정신이 아찔하다. 일부일처제라는 개념을 파괴하기 위해 나타난 악당이 된 기분이야.
– …솔직히, 두 번째가 되고 싶지 않아요. 에리히의 유일한 부인이 되고 싶고, 유일하지 못하다면 첫 번째가 되고 싶었어요.
허나 세라의 우울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금방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나는 악당이 맞다. 지금의 난 피해자가 아닌 제2의 가해자나 다름없다.
물론 제1은 에리히고. 그 새끼는 아주 개새끼야.
– 그런데 지금까지 은근한 지원만 해주던 오빠가 이렇게 나설 정도면… 두 번째조차 힘든 상황이라는 거겠죠?
“그건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에리히가 너무 못나서─”
– 아뇨. 제가 부족해서예요. 에리히랑 1년을 같이 지냈으면서 아무 진전도 이루지 못한 제 잘못이에요.
희미한 미소를 짓는 세라의 모습에 마땅한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확실히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세라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에리히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 기회를 놓쳤으니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리고 오빠 말처럼 에리히가 차별을 하지는 않겠죠.
하지만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사람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당사자는 오죽했을까. 겉으로만 표현하지 않았을 뿐, 속으로는 자괴감과 불안감이 꿈틀거렸을 거다.
‘너무 오래 끌었네.’
애써 한숨을 억누르며 여전히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세라를 쳐다봤다.만약 지금이 3개월이나 4개월 차라면 절대 양보할 수 없다며 고개를 내저을 수도 있다. 아직 마음이 꺾이지 않았고, 불씨가 꺼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벌써 1년이다.너무 예스러운 말이지만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듯, 건강과 거리가 먼 세라가 1년이나 마음고생을 한 건 정신적인 부담이 매우 큰 일이다.
그렇기에 내 설득에 우울함과 자괴감을 보이면서도 반발은 하지 않는 거겠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째 남 일 같지가 않냐.’
이번에는 내가 자괴감이 들었다. 짝사랑 상대가 굳건한 철벽을 올려서 마음에 상처를 입고 타협을 하는 광경, 나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광경이다.
망할. 형제라고 이딴 걸 닮을 필요는 없는데.
두 예비 제수의 동의를 구한 후, 급히 부인 회의를 개최했다. 부인 회의라고 해봤자 공식적인 부인은 아직 마르 혼자지만 아무튼 부인 회의다.
“그렇게 됐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까?”
“…….”
“…….”
구구절절한 상황 설명이 끝나자 회의 참석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침묵을 지켰다. 아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혼란스러운 모양.
지금도 행정부에 있는 에리와 피네를 제외하면 다른 부인들은 에리히의 눈치가 유니콘, 아틀란티스, 황제의 양심과 동일한 반열이라는 것도, 세라의 속이 지옥불이 되어가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야 나처럼 실시간 직관했으니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래서 힘든 것이다. 아무리 세라와 제노비아가 공동 투쟁 선언서에 서명을 했다지만, 공동 투쟁의 결과가 무조건 승리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둘이 힘을 합해도 에리히의 굳건한 철벽을 넘을 거라는 확신은 들지 않는다.
“일단 둘이 힘을 합한 건 잘된 일이에요. 목표에만 집중해도 모자란 상황에서, 의미 없는 곳에 여력을 낭비할 일은 사라졌으니까요.”
침묵 끝에 마르가 입을 열었다.
마르는 현재 크라시우스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 에리히의 결혼은 크라시우스 가문의 번영과 연관된 일이기도 하기에, 안주인인 마르가 먼저 발언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게 다예요. 사실 둘이 서로를 견제한 적은 별로 없었잖아요. 힘을 합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요.”
“그건 그렇지.”
실로 타당한 말이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작년 동아리 박람회 때 세라와 제노비아의 대립이 치열해서 그렇지, 정작 둘이 직접 대면하고 견제구를 날린 횟수는 극히 적다. 둘이 같은 자리에 모여야 싸우든 말든 할 텐데 만날 일 자체가 없잖아.
덕분에 둘이 힘을 합쳤다고 해도 극적인 변화는 기대할 수 없다. 애초에 세라와 제노비아의 역량은 상대 견제보다 에리히에 쏠려 있었으니까.
단지 아주 미미한 변화라도 줘야 할 만큼 사태가 암울할 뿐.
“그러니 근본적인 방식을 바꿔야 해요.”
“방식을?”
“네.”
결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마르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괜히 천천히 다가가는 게 아니라 직설적으로, 우리가 칼한테 솔직히 고백한 것처럼요.”
그 말에 폭풍 같았던 고백 릴레이 사태가 떠올랐다. 마르에게 자극받은 트릭시의 고백을 시작으로 리제, 린, 에리, 피네까지 아주 화려한 릴레이였지.
‘확실히 효과가 있기는 하겠네.’
납득했다. 당시의 나도 연인들을 이성으로 여기지 않았다가 고백을 듣고 나서야 다른 시선으로 보지 않았나. 고백은 상당한 용기와 그 자리에서 차이는 리스크를 감당해야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밝히는 데는 더없이 효과적이다.
고백을 받고도 세라와 제노비아의 마음을 모른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는 무기체일 터.
“다들 같은 생각이야?”
슬쩍 다른 연인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물론 마르의 방안이 효과적이기는 하지만 ‘기습적으로 핵 투하하면 이김 ㅎ’ 같은 느낌의 수준이라 무조건 채택하기는 좀 그렇다. 고백하는 용기는 뭐 아무나 갖나.
게다가 기껏 고백했는데 ‘우리 그냥 좋은 친구로 지내자.’ 같은 대답이 돌아오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
“1년이나 성과가 없었으니 충격요법이 필요하기는 하단다. 설령 한 번 거부당하더라도, 상대에게 마음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맞아요. 적어도 평범한 친구에서 자신을 좋아하는 상대로 인식이 변하잖아요. 그러면 지금 거절하더라도 나중에는 생각이 변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내 시선을 받은 트릭시와 린은 마르의 의견을 지지했다.
좋아, 만장일치네.
“저, 저어… 도… 그렇게 생각해요…”
허나 내 배려 아닌 배려를 눈치채지 못한 리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의견을 표시했다.
그 안쓰러운 목소리에 말없이 리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제 입장에서는 자신이 찬 도련님의 결혼을 논하는 것이니, 무슨 말을 해도 기분이 묘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회의에 부른 건 다른 연인들이 다 참석한 와중에 혼자 따돌릴 수는 없으니 부른 것뿐인데, 아무래도 참석자로서 의무감을 느낀 것 같다.
‘이게 다 에리히 때문이다.’
진짜 에리히 때문이야.
***
오늘도 평소처럼 수련을 마친 뒤, 연무장 구석에 앉아 숨을 골랐다.
비록 겨울이라 날씨도 춥고 눈도 내리지만 고작 그런 걸로 수련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날씨에 영향을 받는 건 기사가 아닌 병사들에게나 통용될 일.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게 진정한 기사이자 무인이다.
‘슬슬 다른 대련 상대를 찾아야 할 텐데.’
빈 물통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크라시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나 어느덧 열아홉이라는 나이가 되었고, 그 세월 동안 가문의 기사들과 무수히 많은 대련을 했다.
물론 기사들로서는 가문의 도련님을 진심으로 팰 수 없으니 설렁설렁 임했겠지만, 진심이 아니었더라도 몇 년이나 같은 상대들과 같은 대련을 진행했다. 더 이상 색다름을 느낄 수 있는 대련이 불가능한 상황.
그렇기에 다른 대련 상대가 절실하다. 그나마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로는 동급생이나 선배들이 있었으나, 그것도 2년이나 재학하니 영.
‘류티스가 그립다.’
지금쯤 조국에 있을 빨간 머리를 떠올렸다.
지겨운 대련 상대지만 그래도 좋은 대련 상대였던 류티스. 근처에 있을 때는 미친놈이 따로 없었는데, 막상 없으니 괜히 아쉽고 생각이 난다. 하여간 특이한 놈이야.
‘다른 영지에 가야 하나?’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크라시우스 가문의 기사들로 부족하다면 다른 가문의 기사들과 붙어야 하나? 제노비아 누나가 제국백이니 잘만 부탁하면 어떻게든─
“도련님.”
“응?”
누나에게 징징거리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리려는 찰나, 기사 한 명이 나가왔다.
“트리마라 남작가의 세라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세라가?”
“예.”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에는 내가 세라를 찾아갔지만, 요즘은 세라가 나를 찾아오는 경우도 많아졌다.
친구로서 매우 기쁜 일이다. 매일매일 침대에만 있어야 했던 친구가 아카데미도 다니고, 이렇게 우리 집에 놀러 오기도 하잖아.
‘무슨 일이지?’
그런데 조금 의아하기는 하다. 어제도 통신구로 연락했었지만 직접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그냥 놀러 온 거겠지.’
짧은 고민 끝에 그런 결론을 내렸다. 친구가 친구를 보러 오는데 이유가 어디 있어. 보고 싶으면 오는 거지.
나랑 세라 사이에 그 정도도 못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