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456)
로판 속 공무원 456화(457/945)
손님이 방문했다면 접견실로 가는 것이 옳지만, 세라는 평범한 손님이 아니다. 내 친구이자 유모의 딸이니 가문의 사용인들도 세라를 외부인보다는 가족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
덕분에 세라가 성에 오면 사용인들은 접견실로 안내하지 않는다. 시녀장인 유모의 방으로 안내하거나, 아니면 내 방으로 보내버리는 경우가 잦다.
‘씻고 가야 하나?’
이번에도 유모의 방이나 내 방에 있겠거니 생각하며 복도를 거닐던 중, 잠깐 발걸음을 멈추며 소매 부근의 냄새를 맡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수련 중이었으나, 마나를 그럭저럭 다룰 수 있다면 아무리 격렬하게 움직여도 땀이 나는 경우가 드물다. 그냥 수련 중 몸에 묻는 흙이나 먼지 때문에 씻는 경우가 많지.
하지만 내가 둘째 형수님처럼 마법의 극에 이른 존재도 아니니 완벽하지는 않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는 둔한 편이기도 하고.
‘간단하게라도 씻어야겠네.’
짧은 고민 끝에 몸을 돌렸다. 생각해 보면 몸이 허약한 세라를 보러 가는 길인데 더러운 모습으로 갈 수는 없─
“어디 가?”
얼마 걷지 못하고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멈추고 말았다.
“나와보길 잘했네. 계속 방에서 있었다면 한참 기다렸겠어.”
슬며시 고개를 돌리자 눈을 깜빡이는 세라의 모습이 보였다.
마침 세라도 나한테 오고 있었구나.절묘한 타이밍이다.
“연무장에 있다 온 거라 씻고 오려 그랬지. 방 안에 있는데 냄새나는 놈이 있으면 좀 그렇잖아.”
“냄새?”
고개를 갸웃거린 세라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더니 크게 숨을 들이셨다.
“안 나는데?”
나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는 세라를 조심스레 밀어냈다. 냄새가 나지 않더라도 흙 정도는 묻었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평소라면 내가 밀어내기도 전에 떨어졌을 세라가 굳건히 버티고 있다. 물론 조금만 더 힘을 줘서 밀면 금방 떨어지겠지만 연약한 애를 상대로 힘을 줄 수는 없는 노릇.
“나 좀 더러울 텐데.”
“전혀. 이 정도도 더럽다고 여길 거면 수도원에서만 지내야지.”
킥킥 웃음을 흘린 세라는 자연스레 나와 팔짱을 꼈다.
팔을 통해 느껴지는 감촉과 체온에 입이 다물어졌다. 친구끼리 이 정도 접촉은 할 수도 있지만, 세라가 이 정도로 적극적인 접촉을 하는 애는 아니었는데?
“어차피 나갔다 들어오면 또 씻을 거잖아. 이따가 씻어.”
“나가?”
그 말에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기울였다. 나가다니, 어디를?
“응. 나 제도에 가고 싶은데, 같이 가줄 수 있어?”
“당연히 가야지.”
짧은 말이었지만 계획에 없던 외출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아카데미 입학을 제외하면 세라가 먼저 어디를 가자고 한 건 처음이었으니.
***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에리히는 곧장 크라시우스 가문의 마법사를 불러 제도로 이동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라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갑자기 제도로 가자는 말을 꺼냈으니 오래 설득해야 할 줄 알았는데, 에리히는 내가 가고 싶다는 말에 아무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혼자 가질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얼마 지나지 않아 뿌듯함은 씁쓸함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배려심 넘치고 자상한 애인데, 이런 애를 온전히 독점할 수 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이미 독점을 포기하기로,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를 택하기로 결정했으면서도 미련이 남는다. 차라리 에리히가 무뚝뚝한 모습을 보였다면 모를까, 일상 속에서 미련이 생길 모습을 보여주는데 어떻게 해.
‘…두 번째가 어디야.’
점점 마음을 좀먹어가는 씁쓸함을 억누르며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그래, 두 번째로 끝나는 게 어디야.칼 오빠는 두 번째 연인이 무려 공작이잖아. 후작가 영애는 다섯 번째고. 그런데 남작가인 내가 두 번째면 선방한 거야. 그렇고 말고.
“저 카페 어때? 몇 번 가봤는데 괜찮더라.”
그렇게 긍정이라는 이름의 자기합리화를 하는 사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에리히가 아담한 크기의 카페를 가리켰다.
빠르게 에리히가 가리킨 카페를 살피니 손님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이었다면 손님이 찾지 않는 망해가는 가게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제도에서 영업 중이라는 것 자체가 실력 있는 가게라는 증거. 아마 아는 사람만 아는 작은 카페인 것 같다.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저 카페에서 많은 일들이 생길 텐데, 보는 눈이 많으면 민망했을 거다.
“응, 좋아 보이네. 저기로 가자.”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으며 에리히와 다시 팔짱을 꼈다.
대담한 스킨십에 에리히가 조금 굳은 게 느껴졌지만 굳이 내색은 하지 않았다.
‘흐으읏─’
나도 부끄러웠으니까.품위를 지켜야 할 귀족가의 영애가 이렇게 대담한 접촉을 한다는 게 낯설었으니까.
게다가 단순한 접촉도 아니고, 그, 가슴을…
“조, 조금 춥네. 빨리 들어가자.”
황급히 에리히를 이끌며 카페로 향했다.지금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실리를 따져야 할 시간이다.
칼 오빠랑 예비 형님들도 그렇게 말했잖아. 에리히에게 이성으로 보이는 게 가장 급하니,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다가가라고. 부끄러움만 감수하면 할 수 있는 일이 굉장히 많다고.
결혼에 근접한 사람들의 조언이니 분명 맞을 거다.
카페 내부는 밖에서 본 것보다 더욱 넓고 아늑했다. 역시 에리히가 몇 번이나 방문했을 정도의 수준은 되는 것 같다.
“괜찮지? 나름 제과 동아리라 디저트 관련해서는 눈만 높아졌는데, 여기는 그걸 감안해도 좋더라고.”
“그러게. 손님이 적은 게 신기하다.”
“일부러 오기 힘든 위치에 세웠다고 하던데? 돈은 벌만큼 벌어서 소일거리로 하는 건데, 사람 많으면 귀찮다더라.”
픽 웃음을 흘린 에리히는 마카롱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귀족치고는 너무 호쾌한 모습이지만, 나와 같이 있을 때만 보이는 편한 모습이니 오히려 기껍다.
내 앞에서는 가면을 쓰지 않고 편하게 늘어질 수 있다는 의미잖아. 그건 이미 가족이나 마찬가지지, 응.
‘부부가 아닌 남매라는 게 문제지만.’
가족의 방향이 조금만 달랐다면 정말 좋을 텐데.
– 딸랑
에리히를 따라 마카롱을 한 입 베어 문 직후, 방울 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이 카페에 들어왔다.
‘빨리 왔네.’
예상보다 빠른 방문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애초에 제도에서 지내는 사람이니 빠르게 올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
갑자기 방울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이 카페에 온 것도 벌써 다섯 번째지만, 기이할 정도로 그 다섯 번 동안 다른 손님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 신기한 마음에 고개를 돌렸으나─
“누나?”
손님의 정체가 너무 의외였다.
현직 제국백이라 가주님과 함께 제국의회에서 업무 중일 제노비아 누나. 아무리 여기가 제도라지만 이 손님 없는 한적한 카페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안녕. 직접 보는 건 오빠 결혼식 이후로 처음이네?”
빙긋 웃은 누나는 우리에게 다가와 자연스레 합류했다.
“세라 영애도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나요?”
“네, 걱정해주신 덕분에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리고 세라의 옆에 앉은 누나는 세라를 향해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존대?’
뭐지. 누나가 원래 세라한테 존대를 했었나? 나이 차이도 있고 가문의 격도 있어서 편하게 대한 걸로 기억하는데.
빠르게 동아리 박람회 때의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는 존대가 아니었다. 초면에 편히 대했다가 다시 만나니 존대라니, 뭔가 기묘하다.
“설마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누나도 여기 단골이야?”
일단 의아함을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존대고 하대고, 아무튼 누나를 이런 곳에서 만났다는 게 중요하니까.
“오늘 처음 오는 곳이야. 이런 데가 있는 줄도 몰랐어.”
그 말에 의아함은 더욱 짙어졌다. 있는 줄도 몰랐던 곳을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아, 백작 각하는 내가 불렀어. 아까 통신구로 위치 알려드렸거든.”
상상도 못 한 진실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상대의 통신구로 연락을 하는 건 그 통신구의 고유 번호를 알아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친분을 나누거나 업무적으로 연락이 필요한 경우에만 번호를 공유하는데, 설마 누나를 몇 번 만나지도 못한 세라가 누나 번호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내 생각보다 세라랑 누나가 친했나? 아니, 그렇다고 치기에는 서로 존대를 하고 있잖아.
“사실 에리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 나도, 각하도.”
세라의 말에 연신 눈만 깜빡거리다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뭔가, 뭔가 온다.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본능이 외치고 있다. 세라의 입에서 큰 게 나올 거라고.
“참, 제가 먼저 말하면 안 되죠. 각하께서 먼저 말씀하세요.”
“…고마워요, 영애.”
빙긋 미소를 지은 세라를 향해 고개를 숙인 누나는 긴장감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불안하다. 세라와 누나가 대체 무슨 조합인지도 모르겠고, 현직 제국백인 누나가 저렇게 굳을 정도의 사안이 뭔지도 모르겠다.
혹시 내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의원 대리가 되는 일 때문에 그런 건가? 하지만 그런 문제였다면 누나보다 가주님이나 형이 먼저 말했을 거다. 게다가 의회 관련이었다면 세라가 이 자리에 동석하지도 않았을 테고.
‘뭐지?’
빈약한 정보를 토대로 머리를 과도하게 굴려서 그런지 미약한 두통이 느껴졌다. 대체 무슨 일─
“좋아해, 에리히.”
?
“이렇게 말하면 오해할 테니 확실히 말할게. 누나로서 동생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여자로서 에리히라는 남자를 사랑해.”
미약한 두통이 사라졌다. 이제는 머리가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다.
“…어?”
이윽고 내가 들어도 한심한 목소리가 나왔지만 자괴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지금 누나가 한 말을 이해하기 위해, 굳어버린 머리를 다시 돌리기 위해 바쁘니까.
‘잠깐만.’
허나 머리가 다시 돌아가자마자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누나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세라는? 이 자리에 같이 있고, 누나를 직접 부른 세라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세라에게 시선을 돌리자 세라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 나도 옛날부터 사랑했어.”
눈앞이 하얘지는 기분이다.
폭풍 같았던 제도 구경을 마치고 성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내 머리는 여전히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당장 답을 달라는 건 아니야. 그냥, 그냥 우리가 이런 마음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해서 말한 거야. 우리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닿지 않을 테니까.”
언제나 당당했던 제노비아 누나가 쑥스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며 말하던 모습.
“네 마음이 정해질 때까지 기다릴게. 기다리는 건 익숙하니까 걱정 말고.”
얼굴이 붉게 물들었으면서 애써 농담을 건네는 세라의 모습.
그 두 모습을 떠올리니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이게 무슨.’
거칠게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침대를 굴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는다.
나를 좋아했다고? 세라랑 누나가? 그것도 옛날부터? 내가 루이제에게 반하기 전부터?
‘진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기 시작했다.